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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5

1부

손톱의 서정·15
분홍의 서사·17
진폐(塵肺)·18
명랑 용어 사전·20
새를 심었습니다·22
모래의 시간·24
보라에 대하여·26
저녁의 양치식물·28
오늘의 사과·30
소년들의 세계사·32
나비의 밀도·34
첫사랑 1·35
동백 전언·36
소년들·38
소년들의 세계사 2·40
소년들의 세계사 3·42
반 고흐·44

2부

첫사랑 2·49
백 톤의 질문·50
파(波)·52
앨리스의 사물들·54
먼지 인간·56
피아노·58
도서관 활용법·60
애월 1·62
애월 2·64
애월 24·66
애월 29·68
사과·70
애월 30·72
애월 32·73
깊어지는 사과·74
애월 34·76

3부

슬픔의 좌표·79
웃는 돼지·80
침대 시위 - Bed?in For Peace·82
오후의 사물 연습·84
통조림·88
새벽 4시까지 나는·90
궁민교육헌장·92
생각하는 사물들·94
아를에서의 일기·96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98
진흙 연습·100
새라는 통증·102
프라하, 스타일·104

4부

불량사막·109
독쇼(Dog Show)·110
마스크·112
아침의 방향·114
미란다 원칙 - 와병의 계절·116
진흙 나무·118
사월의 질문법·120
그늘의 질량·122
효자동, 국경·123
새를 깨닫다 2·124
소년 A·126
소년 B·127
청소년·128
방 탈출·130

해설 | 육호수(시인·문학평론가)
육체의 비실감과 영혼의 실감·133

저자 소개 1

1990년 《문학과 비평》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 『정의홍 선집 1·2』 『전숙희 수필선집』,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이 있음. <불교문예 작품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제주작가회의 회원. <서쪽> 동인. carerina2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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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51쪽 | 216g | 124*198mm
ISBN13
9791192651019

책 속으로

새를 받았지요 택배로, 뿌리에 흙이 묻어 있었어요.

은행과 김밥천국과 데빌 피시방을 지나 도착한 새입니다.
새가 아니라고 말해도 새입니다.

설명서를 읽었죠.
새, 이것은 명사, 유목형입니다.
잘 깨지는 것, 씨앗이 단단한 것, 비정규직 냄새가 나는 것,

갓 배달된 1년생 새를 심었어요. 무채색의 새는 눈이 어둡습니다. 검은 것들은 어둠을 치는 기분입니다. 새는 나쁜 계절 쪽으로 한 뼘씩 자라고. 종이 인형처럼 잘 찢어집니다. 고독한 비행의 예감 같은 것이 따라왔습니다.

새를 심었지요. 오렌지 맛이 나는 새를요. 새는 시들다 화들짝 살아납니다. 새를 오래 들여다보면 새싹 같은 乙을 닮았습니다.

일주일에 물을 두 번 주었지요. 새의 눈동자가 조금 썩었어요. 얼굴을 매일 떨어뜨립니다. 새의 그늘이 깊어집니다. 실직의 징조입니다.

새를 두드리면 상자와 고양이와 단추와 감정노동자가 있습니다.

나는 살아야겠다라고, 자기소개서의 내용을 수정합니다.

乙은 당신을 지우고 내가 사는 저녁의 영광입니다. 동맹과 배반의 테이블에서 태어납니다. 내일은 새의 날개가 펼쳐지는 개화기입니다.

빨리 죽는 것들은 오래 삽니다. 유목의 계절입니다.
---「새를 심었습니다」중에서

나는 자주 빛났다

내 심장에
이빨 자국이 나 있다

벽지 무늬 속에서
검은 짐승들이 뛰쳐나온다

커다란 쇠망치를 들고
내 눈 속의 짐승을
차례로 내려쳤다

춥고 따스했다
한쪽엔 빙하가 가득했다

12마리의 개들이 사시사철 짖었다
---「첫사랑 1」중에서

극락사 저녁 예불 올린 처사가 길을 잃었나
연화정에 술 취해 쓰러진 사내
와불처럼 팔 베고 누워 열흘 붉은 꽃을 따라간다

물은 어떤 마음으로 죽은 꽃을 안고 우는가 물이 물을 안고 운다

연꽃 진 자리에 들새가 꾸룩거리며 내려앉는다

부처가 일곱 개의 꽃으로 물 위를 세 번 내려친다

취한 마하가섭이여 병 깊은 간과 폐를 씻고
당신에게서 어디까지 달아났는가
가섭은 물에서 걸어서 온 사람
녹색 손톱으로 연못을 가르고
팔목에 연꽃 문신을 새긴
---「애월 32」중에서

골목을 돌면 국경이었다

나는 가끔 국가의 국민이었다

효자동에는 골목마다 효자들이 붐볐다 효자는 줄기가 연하여 대개 여러 해를 산다 전생에서 교지와 말라붙은 양물을 들고 새카맣게 날아온다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잊었다 자두를 먹으면 향냄새가 난다 어떤 믿음은 환관처럼 은밀하다

창문을 반쯤 열어두고 사람들은 병든 얼굴로 어디를 갔나 죽은 자들은 밀서(密書)처럼 고요하다 낮에도 괴수가 출몰했다

골목이 질겼다 환관의 무리가 골목에서 검은 피리를 불었다 아이들이 초겨울의 음계로 노래를 부르며 사라진다

골목을 돌면 국경이었다
---「효자동, 국경」중에서

나는 태양을 파기했다
불타는 두 날개를 펼치고
영혼의 긴 복도를
의심 없이 걸어가리라
소년이 시작된다

---「소년 A」중에서

출판사 리뷰

영혼이 태어나고, 버려지고, 돌아오는 장소로서의 시를 복원하다

손톱은 내가 처음 버린 영혼
손톱은 영혼이
타원형이다

손톱은
죽어서 산다
끊임없이 나를 밀어낸다

손톱을 오래 들여다보면
나무뿌리가 뻗어 나오고
진흙으로 두 눈을 바른 아이가
더러운 귀를 씻고 있다

손톱을 깎으면
죽은 기차들이 나를 통과해 가고
늙은 쥐가 손톱을 먹고 있다

늘 바깥인
손톱의 밤은
얼마나 캄캄한가
사랑은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다

멀리 날아간 손톱은
가끔 얼굴이 되기도 한다 _「손톱의 서정」 전문(본문 15~16쪽)

‘손톱’은 나로부터 자라나는 육체이다. 손톱은 이미 죽은 세포이지만, 식물과 같이 끊임없이 자라나 나의 말단이 되고, 결국엔 잘려 나의 바깥이 된다. 끊임없이 자라나고, 끊임없이 버려진다. 손톱을 들여다보며, 손톱을 깎으며 내게 찾아오는 몇 이미지들을 지나, 시인은 이 손톱의 영혼을, 나의 바깥의 영혼에 찾아오는 밤을 떠올리게 된다. 죽은 채로 자라나고, 결국 버려짐으로 나의 바깥이 되는 ‘영혼의 세계’와 육체적인 고통 없이 영혼이 잘려 나가는 ‘비실감의 세계’는 분리된다. ‘손톱의 서정’이라는 시의 제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서정’은 세계의 자아화라는 오랜 명제에 기인했기보다는, 오히려 이 서정을 다시 명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멀리 날아간 손톱”이 얼굴이 되는 이 비현실적 상황에 빠져 있는(없는) “개연성”을 이어주는 “사랑”이 곧 서정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 “멀리 날아간 손톱”은 “가끔 얼굴이 되”어 시에 현현하는가? 단지 손톱의 영혼이 타원형이기 때문에? 나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손톱이라는 기표가 얼굴이라는 기표로 대체되는 과정일까?

시라는 공간에서 기표(손톱)가 됨으로 영혼을 획득한 육체가 다른 기표(얼굴)로 자리바꿈함으로 화자에게 의미화되는 과정인가? 이런 손톱이 만들어내는 시적 장소 앞에서 독자들은 잠시 걸음을 멈출 수도 있겠다. 해석이 잠시 멈추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흐릿한 공간에 몸을 밀어 넣고 어둠을 체험하는 일이 한 권의 시집을 읽어가는 일이고 한 명의 시인을 알아가는 일일 것이다. 개연성이 필요 없는 이 필연의 세계에 서안나의 서정이 있다. 나로부터 “끊임없이 나를 밀어”내는 척력과 “멀리 날아”가 얼굴이라는 이미지로 내게 돌아오는 인력. 그곳에 서안나의 ‘서정적 필연’이 있다. 이 필연이 “죽어서 산다는” 역설, 육체의 비실감과 영혼의 실감이라는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 밀물과 썰물의 세계가 있고, 애월 바다가 있다. 끊임없이 몸을 바꾸며 “생각하는 사물들”(「생각하는 사물들」)과, 세계와 자아의 경계면에서 “채집되지 않”(「방 탈출」)는 미성년 화자들이 있다.

개의 목줄을 놓아버리면 개는 새가 될까
여름에는 멍청한 벌레를 그릴 거야 _「명랑 용어 사전」 부분(본문 20~21쪽)

취한 손으로 천 마리 새를 쓰다듬었다
새를 만지면 온몸이 가려웠다 _「소년들의 세계사 2」 부분(본문 40~41쪽)

갓 배달된 1년생 새를 심었어요. 무채색의 새는 눈이 어둡습니다. 검은 것들은 어둠을 치는 기분입니다. 새는 나쁜 계절 쪽으로 한 뼘씩 자라고. 종이 인형처럼 잘 찢어집니다. _「새를 심었습니다」 부분(본문 22~23쪽)

젖은 침대 속으로 뱀들이 지나간다
생레미 정원의 해바라기가
개처럼 짖는다, 새가 외국어로
울고 간다 _「반 고흐」 부분(본문 44~45쪽)

새는 내 눈에만 보이는 통증

누가 죽은 새를 내 머리 속에 넣었나
나는 늘 길을 잃었다 _「새라는 통증」 부분(본문 102~103쪽)

이 새들은 무엇인가? 각각의 시에서 등장하는 새들은 같은 새인가? 날개가 있을까? 각각의 울음소리는 어떨까? 이 새를 ‘이미지’라고, 시의 ‘질료’라고, ‘시어’, ‘대상’, ‘주체’라고 말해보아도 충분치 않다. ‘감각’, ‘관념’, 혹은 ‘실체’, ‘실체화된 관념’, ‘관념화된 감각’이라고 말해보아도 역시 충분치 않다. ‘보조 관념’이나 ‘상징’이라고 말한다면 오답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 같다. 이것이 ‘새’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새는 때론 쓰다듬을 수 있는 대상(「소년들의 세계사 2」)이기도 하고, 뿌리와 씨앗을 가진 식물(「새를 심었습니다」)이 되어 자라나기도 한다. “내게만 보이는 통증”의 이미지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도착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새는 시적 화자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견되기도 한다.(「새라는 통증」) 죽은 채로 내 머릿속에 있기도 하고(「새라는 통증」), 기침을 하면 내게서 튀어나오기도 한다.(「새를 깨닫다 2」) 각각의 시편에서조차, 행간에서조차 직전의 새가 지닌 속성과 의미를 벗어난다. 앞서 멀리 날아간 손톱이 얼굴이 되었듯 그 형태와 존재 방식을 바꾼다. 그러나 “새가 아니라고 말해도 새”가 되고 마는 이 새는 모양과 속성을 떠나 결국 새이다. 이 새는 어떤 시에서는 “비정규직” “감정노동자”의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새를 심었습니다」) 읽을 수도, 미성년 화자들의 혼돈이나 쓰는 존재로서의 시인의 혼란의 표상이라고도 읽을 수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이 새는 벗어남 그 자체, 날아가고 미끄러짐 자체라고 볼 수 있겠다.

자신의 존재로부터 낯설게 되기를 끊임없이 갱신하고 있는, 그럼으로 새가 되는 존재이다. 이 새를 자아가 외부를 낯설게 포착하여 얻어낸 것이라거나, 낯설지 않은 것을 낯설게 한 것이라는 기성의 시론을 대입해서는 충분치 않다. 스스로 스스로에게서부터 낯설어지는 어떤 동력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 새로부터 벗어날 때 새는 새로 회귀한다는 역설이 여러 시편을 통해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리하여 “새의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부서진 새”는 세상의 모서리를 흩어지게 하는 동력이 된다. 분류와 배제의 논리를 통해 무언가를 규정함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의 모서리, 즉 경계는 세상의 중심과 주변을 나누고, 주체와 대상 (때론 시인과 언어… 언어와 시인인가?) 사이에는 위계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계에 포착되지 않는 새는 이 모서리를 교란하는 존재이다. “구겨져도 펼쳐지는 새는” 세계의 모서리를 교란하며 깨어지고, 화살에 맞기도 한다. 구겨지고 깨어짐으로 언어를 회복한다. 이 새를 시인이라고 말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도착하지 못하는 여행인” “앨리스의 사물”이나, ‘쓰기’ 혹은 ‘기도’라고 말해보아도 될 것이다. 때론 거짓말 같은 세계의 미달태인 “종이 인형”, “종이 꽃”, “종이 코끼리”처럼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가 마침내 이 종이마저 벗어나 이 시집을 읽은 당신에게 도달할지도. 도달하기를. 미달태로 도달하기를.

이처럼 언어의 제약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는 위에서와 같이 바깥으로 벗어남의 방향(척력)으로 뿐만 아니라, 동일성 속으로 재귀하는 방향(인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과에서 사과를 빼앗고
빨강에서 빨강을 빼앗고
사과는 쉽게 죽지 않으며
흙과 물의 계절로 돌아간다 _「사과」 부분(본문 70~71쪽)

분홍 속엔 분홍이 없다 _「분홍의 서사」 부분(본문 17쪽)

고통이 고통을 구원할 것이다 _「아를에서의 일기」 부분(본문 96~97쪽)

나는
나에게 운반되는 중이다 _「먼지 인간」 부분(본문 56~57쪽)

나는 원래 없었다
나는 내가 어렵다 _「소년들의 세계사」 부분(본문 32~33쪽)

나는 사라지는 중입니다
당신은 이미 검정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사라졌다고 사라졌다는 것을 증명해보세요
사막은 사막을 견뎌냅니다 _「불량사막」 부분(본문 109~111쪽)

“사과에서 사과를 빼앗고 빨강에서 빨강을 빼앗”는다는 구절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라는 불교 선승 임제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이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할 수 있다. 일체 사물에 걸리는 바 없이 철저한 해탈자재의 경지를 얻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이다. 스님들은 각 스님대로 해설하고 철학자들은 철학자대로 해석한다. 다만 이 ‘죽임’이 말 그대로 목숨을 빼앗으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결론이 “사물에 걸리는 바 없는” 상태로 나아간다는 것만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에서는 어떤가? 시인은 사과에게서 사과를 빼앗아 온다. 그리고 빨강에서 빨강을 빼앗아 온다. 그럼에도 “사과는 쉽게 죽지 않으며”, “흙과 물의 계절”로 돌아간다. ‘사과’라는 동일성으로부터 동일성의 속성을 제거한다. 그래도 사과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과의 이전으로 돌아갈 뿐이다. 스스로를 밀어내며 생동하던 새와 달리 사과의 세계는 정물의 세계이고 스스로 깊어지는 고요와 침묵의 세계이다. “분홍에 분홍이 없다”는 말은 분홍이라는 색을 지닌 사물은 사실 분홍을 밀어내기(반사하기) 때문에 분홍이라는 실재론적 인식이라도 볼 수 있겠지만, 불상에는 부처가 없다는 지성론적 인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그 둘을 동시에 품고 있는 문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러니 (고흐를 모티프로 한) 화자가 “실패란 어떤 색깔인가?”라고 물을 때 (「아를에서의 일기」) 이는 색(色)을 통해 공(空)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된다. 이처럼, 주체/객체, 인식/대상의 이분법을 벗어나고자 사물 연습을 하는 시인에게 이 사물은 “당신과 나의 침묵을 감당할 수 있”는 신이다. 그러므로 사물 연습은 참선(參禪)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참선이 그러하듯, 외부의 움직임을 멈추고 돌멩이처럼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돌멩이가 되지 않는다. 시인은 사물이 아니고,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사물 연습은 나의 내부로 향하는 동력이자 “도착하지 못하는 여행”이 된다. “나는 원래 없었다/나는 내가 어렵다”(「소년들의 세계사」)는 고백도 “나는 나에게 운반되는 중이다”(「먼지 인간」)라는 진술도 나의 내부로 향하는 인력이 작용한 문장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와 ‘사과’는 그저 언어와 시의 차원에서만 벌어지는 일인가? 시인 개인의 사유 실험에 그치는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시인은 하나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묵은 때를 씻기고, 언어가 가진 굴레를 풀어주는 존재이다.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시를 제시하고 전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렇다고 하여 언어를 맹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고, 교란하며 해방한다. 그럼으로 비로소 시인은 시와 함께할 자격을 얻게 된다. 그리고 말하자면, 이 과정은 이 글의 첫 시작에서 인용한 랑시에르가 말했듯 ‘정치적인’ 행위이며, 해방이고 저항이 된다. 또한 서안나는 언어 자체에 대한 실험과 갱신과 동시에, ‘제주와 여수와 순천과 광주’에서 일어난 폭력들(「아침의 방향」)이나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개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국가의 폭력에 대해(「궁민교육헌장」) 고발하기도 한다. 어른들의 공모로 유지되는 억압의 세계인 상징계에 온전히 진입하기를 거부하는 미성년 화자(소년 소녀)의 목소리를 거듭하여 내세우는 것도 이 저항과 해방의 과정과 맥이 닿아 있다. 이 시집에서는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실험, 언어와 기표(단어) 자체에 대한 실험, 주체-되기에 대한 실험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깨진 중국 인형의 눈동자 속에서
울고 싶은 자들이 운다
죽은 꽃이 죽은 꽃을 밀고 나오는
사라지는 밤이었다

돌아누우면
물결이던
애월 _「백 톤의 질문」 부분(본문 50~51쪽)

당신이 가장 아름다울 때
달이 뜬다, 애월에선
물이 깊어 떠난 마음을 잡아당길 수도 있겠다 _「애월 24」 부분(본문 66~67쪽)

폐가 아픈
나무 원앙

피가 돌아
교교교교 운다 _「애월 1」 부분(본문 62~63쪽)

흰 얼굴로 돌 속에 앉아 돌 해금을 켠다 해금이 노루 소리로 운다 _「애월 30」 부분(본문 72쪽)

맨발로 돌 속의 꽃을 꺾었다
흰 소와 만근의 나무 물고기가 따라왔다 _「애월 2」 부분(본문 64~65쪽)

앞서 말한 ‘새를 향하는 의지’를 척력, 혹은 원심력의 세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사과를 향하는 의지’를 인력, 혹은 구심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인력과 척력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일어나는 공간으로, 서안나의 바다가 있고, 애월이 있다. 인력과 척력은 여기에서는 밀물과 썰물이 되기도 한다. “깨진 중국 인형의 눈동자 속”은 인력이 작용한 세계이고, “죽은 꽃이 죽은 꽃을 밀고” 나와 “사라지는” 밤의 세계는 척력의 세계라 볼 수 있다. 이 둘이 교차할 때, 시인에게 필연 “물결이던/애월”이 찾아온다. 이 애월의 세계는 달이 뜨고, 달에 이끌려 밀려오고 멀어지는 바다가 있고, 물이 깊어 멀어진 마음을 (달이 멀어 깊어진 물을) 잡아 당겨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밀고 돌아오는 힘으로 나무 원앙에는 피가 돌고, 나는 돌 속에 앉아 해금을 켤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애월은 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이라는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돌 속의 꽃을 꺾”을 수 있고, “나무 물고기가” 움직여 나를 따라오는 세계가 이 애월의 세계이다.

물양귀비는 해마다 꽃을 피우고
새 피가 돈다
한밤에 천리를 가는 등대 불빛은 고요에 가깝다
검은 먹으로 둥글게 휘어지는
애월이라는 필체

저 파도 속을 달려가는
만 마리의 말들은 언제 다 썩을 것인가
무량한 달빛은 언제 사람으로 우뚝 일어서는가

절벽에서 창백한 손과 발바닥으로
일어서는 진흙 사람들
터진 눈으로 고요에서 얼마나 달아났느냐 _「애월 29」 부분(본문 68~69쪽)

흙에 물을 개면 불타는 진흙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은 여러 번 읽어도 낡지 않는다 황금빛 밤의 끝에서 멈춘다 뒤돌아보면 나를 따라온 병든 사내가 이끼처럼 물가에 앉아 있다 _「애월 34」 부분(본문 76쪽)

죽간을 쓰고 진흙으로 봉하는 밤이면
애월로 애월로 돌아오는 파도들 _「애월 29」 부분(본문 68~69쪽)

“새 피가” 도는 애월의 세계에선 등대 불빛의 고요와, “파도 속을 달려가는 만 마리의 말”의 혼돈이 공존하는 세계. 이곳에서 “진흙 사람들”이 태어난다. 이 진흙의 인형들은 어떠한가? 이 진흙은 사물과 새의 중간 물성을 가진 존재로 보인다. 물과 돌의 중간인 이 진흙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비를 맞으면/내 몸에서/무너진 풍경이 다시 무너지지 않”(「진흙 연습」)는 물성을 지녔다. 이 진흙은 “나를 따라온 병든 사내”이거나, 나의 아픔이 호출해낸 타인의 모습으로 시에 등장하기도 한다.(「진흙 연습」) 그리하여 이 진흙이 무엇인지, (시집의) 첫 시였던 「손톱의 서정」의 “진흙으로 두 눈을 바른 아이가” 무엇이고, 시인의 어떤 무의식이 발현한 것인지에 대해 섣부른 의미화나 해설은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손을 대면 지문이 묻어나고, 눈을 감아도 한 사람의 영혼과도 마주치지 않는, “진흙 피가 쏟 아지지 않고”, “진흙 심장이 금이 가지 않 ”(「진흙 연습」)는 이 진흙 인간을 시 안에서 만져보고 말 걸어보고, 껴안아 본다면 어떨까? 육체의 실감과 비실감이, 영혼의 실감과 비실감이 바라보는 자의 마음에 따라 순간순간 교차하는 이 진흙 인형의 얼굴을 거울 속 시인의 얼굴로 생각해본다. 언젠가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서 서안나의 「애월 혹은」을 통해 처음 그의 시를 만났던 순간이 아직 생생하다. ‘애월 혹은’. 이 ‘혹은’ 뒤의 공백에 여러 말을 넣어보며 열차를 기다리곤 했다. 스크린 도어의 시를 읽으며 재미있는 것은 시를 읽는 나의 표정이 스크린 도어에 실시간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그 공백에 공백을 넣어보는 얼굴의 시간에서부터 이 글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월 혹은. 나는 이제 이 ‘혹은’ 뒤에 잠겨 있는 침묵의 공간에 진흙 얼굴을 한 당신을 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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