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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5
1부 유예기간·15 가시철망·18 진전·20 이물감·22 통로·24 한 사람·26 데칼코마니·28 매트·30 오아시스·32 몽타주·34 꼼치·36 Not Today·38 다슬기 먹는 저녁·42 문밖의 것·45 2부 역려(逆旅)·49 벙커·50 쉰·52 클라이언트·54 경유지·56 직립·58 가용자원·60 동종요법·62 해와 달·64 노천·66 미니스톱 파라솔·68 부재·70 주변인·72 전환·73 3부 튜브·77 균열·78 산내·80 주름·82 하지(夏至)·84 코와 입·86 광장·87 근린공원·88 문득·90 四인칭·92 연루·94 막간(幕間)·96 K씨와 유흥 전단·98 광대와 총·100 4부 개나리·105 빈방·106 from Flam·108 로드무비·110 셔틀콕·112 햇살은 이명이다·114 스위치·116 양육·118 모서리 통속·119 염색·120 방전·122 원근법·124 열섬·126 해설 | 정재훈(문힉평론가) 감정의 불모지에 온 최후의 밀항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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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철망
집 앞 공터에 가시철망이 선인장처럼 박혀 있다 들킨 짐승처럼 아직 뜯어먹을 풀과 빗물 고인 빈 병들을 거느리고 침입자에게 사나운 송곳니를 드러낸다 지날 때마다 눈이 따갑다 울타리를 벗어난 짐승이 녹슬어 간다 혓바닥을 빼어물고 바람이 뱉어 놓은 상처 공처럼 구르다 제 몸을 둘둘 말아 울타리 친다 스스로 제 가슴을 찌른다 위험할수록 안전한 보금자리 털이 달라붙은 가시철망과 담벼락 사이 벼려진 고양이 울음소리 날카롭다 펼쳐 놓은 책 속으로, 잠 속으로 고양이 울음소리가 뛰어다닌다 갈피마다 위태로운 활자가 박혀 있다 누구도 수거해가지 않는 무덤으로 버려진 길들이 모여든다 녹슨 둘레를 물고 축축한 땅속이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가시철망」중에서 원숭이가 털을 고르듯 쭈그려 앉아 바닥에 놓인 신문을 읽듯 쌀알을 휘저어 돌을 골라낸 적이 있다 고르는 것과 골라낸 것을 갈라놓고 같은 색깔이 될 때까지 쌀알이 나를 집중할 때까지 촉감이 파고든다 모래사장에 깔아놓은 은박지 앉은 자리를 향해 오므라드는 바닥 흘러들어온 모래 몇 알이 모래사장보다 따갑다 옷에 달라붙은 고양이 털을 떼어내다 고양이 털로 짠 스웨터를 생각한다 가장 가까웠던 사이가 핏기를 잃어가는 순간 나를 본뜬 차가운 손을 만질 때 낟알 껍질이 목에 걸린 것처럼 몸속에 돋아나는 촉감 밥을 먹다 돌을 깨문다 무방비 상태에서 불현듯 솟아나는 것 온통 나를 골라내는 순간 남겨지는 것 식탁에 앉아 잠시 선명해진다 ---「이물감」중에서 1. 닥칠 거면 빨리 닥치는 게 낫다 그런 마음으로 참석하는 탁자는 빈집처럼 넓다 대화는 수십 개로 쪼개져 벗어놓은 신발처럼 제각각이다 눈동자가 한곳으로 향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도열한 박수가 펼쳐졌다 접힌다 2. 주사위가 떠 있는 시간만큼의 유예 그 후 닥칠 긴 시간 주사위처럼 쥐었다 흔들어 펼쳐 놓고 자, 너도 해봐, 나올 수 있는 숫자보다 많은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결정된 것들 속에 있다 균열이 시작된 벽 앞에서 공포로 뻗어나가기 전에 어서 무너지라고 3. 남아 있는 것들을 빨리 걷어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벤치 옆자리에 가방을 앉히고 가방 속을 휘젓는다 뒤늦은 소명이라도 뒤적거리는 것처럼 손을 빼다 주사위처럼 떨어지는 것 한 면을 오래 들여다보다 어쩌면 나를 닮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줍는다 ---「유예기간」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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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 빈집, 모서리, 클라이언트를 상대해야 하는 루저처럼 소외된 삶 속에서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질감처럼 상정된 거리가 존재하지 않고, 같은 시공간에서 한몸이지만 한몸처럼 느낄 수 없는 불편함이 이물감이다. 그런 불편함은 가장 가까이에 존재한다. 그곳은 내가 한때 경험했거나 불길한 예감처럼 도사리고 있는 순간이다. 기억을 소환하고 그 기억의 어느 한 순간에 집중한다. 이물감처럼 느꼈던 순간, 그곳에서부터 나는 사건을 풀어나간다. 그러니까 나의 시들은 나를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고 어느 한 순간을 통해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햇빛을 모은 돋보기의 초점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확대해 나간다. 대상의 집중을 통해 이야기가 번져 나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렁한 눈동자의 한 장면, 혼자만의 벽에 갇혀 따사로운 햇살에 손등을 갖다 대보는 한 장면……. 아프고, 소외되고, 길을 잃은 사람들 속에 내 모습도 깃들어 있다.
― 「저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이해존 시인의 이번 시집은 느낌이 드라이하다. 시인이 가진 감성은 드러내기에 따라 따뜻할 수도, 차가울 수도 있다. 이해존 시인이 가지고 있는 느낌 혹은 생각은 결코 기쁜 것만은 아닌 듯 하다. 시는 기쁨 보다는 슬픔을, 따뜻함 보다는 거친 것을 가지고 있는 예술 장르이다. 이해존 시인의 이번 시집은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시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가 어떤 기억 혹은 경험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그려내지는 않는다. 다만 드라이함을 느끼며 시집을 읽어나가다 보면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 시인이 드러내고자 했던 생각이 조금씩 독자에게 다가온다. 시인의 말 당신에겐 수많은 일들 중 하나가 나에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 나는 실패한 발명가처럼 두 눈을 번뜩이고 조금씩 작아진다 집념이 체념으로 옮아가고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앓아온 것처럼 선명해진다 2023년 7월 이해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