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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조차도 빛이 푸르게 만물을 그리워하며 산 밑으로 돌아가는 봄날에는
여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치마 가득 바람을 맞는다 아지랑이들이 각각의 냄새를 풍기며 오얏나무에서 배꽃나무에로 넘실넘실 이동한다 벌들이 잉잉거린다 사방은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다 피라미들이 물 위로 떠오르고 나무들이 우듬지로 물을 나르면서 가지 끝 귀를 세운다 오늘은 굼벵이 같은 나도 몸을 뒤척이며 꽃상여처럼 찬란하게 봄을 엿듣는다 --- p.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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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흘러, 깊은 골짜기를 만들고
평원에서는 잡초들이 술렁이며 바람을 부른다 한밤에는 야생 노루와 멧돼지 같은 것들이 잡초를 짓밟고 가지만 아무도 간섭하는 이가 없다 들짐승들은 수풀을 헤치며 평원으로 평원으로 사라져간다 밤에 내 감각은 조용히 살아올라 강물 소리를 듣는다 강물 소리는 여러 벽을 넘어간다 기억의 아이들이 붉은 얼굴로 지나가고 어디서인지 흰 이를 드러내며 킬킬킬킬 웃는 아이도 있다 물은 다시 흘러, 마을을 만들고 구례를 만들고 떠도는 여인들의 니나노집도 만들지만 섬진강 깊은 물은 한밤에도 무엇으로 현신하지 못하고 이슬비 내리는 들판을 흘러간다 비 오는 날 새들은 오리나무 위에서 잔다 구름이 흐르고 달이 비쳐도 새들의 동요는 없다 이제 나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강이 물 속 깊이 산을 흔들며 유유히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다 --- p.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