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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그라운드 _007
포르투갈 _039 여기서 울지 마세요 _073 불상의 인간학 _107 z활불러버s _137 이승진, 이승진 그리고 이승진 _175 오렌지, 였던 _201 컬럼비아 _231 바과, 사나나 _265 그러다가 _293 해설|박혜진(문학평론가) 막돼먹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_319 작가의 말 _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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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준 대로 은행 앱에다 계좌번호를 누르자 이름이 떴다. 우규민이었다. 우규민이라니. FA를 두 번이나 한 최고의 언더 핸드 투수도 인생에서 야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프로야구가 계속됐다면 좋은 코치가 됐을 텐데. 해설을 해도 잘했을 거다. 타 팀으로 이적했지만 한 번도 미워한 적 없는 선수였다. 반가운데 반가운 티를 낼 수 없다는 게 슬펐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야구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과 울고 웃던 기억 전부였다. 그래, 이젠 정말 야구를 하는 거야. 야구 내가 지킬 거야. 규민이 형, 지켜봐줘. 최고의 투수가 될게. 입금을 완료하고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우규민이 내 손을 마주잡았다. 80승-80홀 드-80세이브라는 KBO의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운 남자의 두터운 손바닥이 내 손을 덮었다.
--- p.16 「인생은 그라운드」중에서 아, 포르투갈. 마르방 올리브 축제는 그 본질에 있어 증평인삼골축제와 다르지 않았다. 세계는 동일하다. 지구는 미국 아니면 유럽이다. 세계는 한때 유럽이었고 현행적으로 미국이다. 어디에 서 있든 당신은 다르지 않다.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엄청난 깨달음이 죽마 위에 선 나를 한순간 휘청거리게 했다. --- p.71 「포르투갈」중에서 살펴보니 MBTI라는 게 사주팔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덟 개의 글자를 모아 네 개의 기둥을 세우는 원리는 같았다. 육십갑자를 간소화해 열여섯 개의 유형으로 줄인 것은 서구적 합리성의 반영이라 할 만했다. 내가 오래 고민한 것은 오행에 대해서였다. B는 Bool이니 화火이며, T는 Ttang이니 토土였다. I가 조금 헷갈리긴 했다. 하지만 답을 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표’로 번역되는 Indicator에 다른 뜻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엔진 장치의 실린더 내부 압력을 표시하는 기계. 이것은 틀림없는 금金이었다. 문제는 M이었다. Mok이니 목木인 것인가, Mool이니 수水인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조금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M은 절대 水가 될 수 없었다. 영락없는 木이었다. --- p.92 「여기서 울지 마세요」중에서 정소려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척하고 검어진 내 뺨을 어루만졌다. 무슨 꿈을 꾸느냐고 내게 물었다. 언제부터였냐고도 물었다. 보이지 않고 기척만 느껴지는 꿈이라고 대답했다.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럼 내가 울면서 깬다고. 정소려의 눈이 붉어지더니 나도 그렇다고. 매일 아침 울면서 일어난다고. 죽어간 사람과 죽어갈 사람들이 자꾸만 보인다고. 어린아이들이 학생들이 교복 입은 사람이 일하는 사람이 움직이는 사람이 다만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이 모여 있는 사람이 서 있던 사람이 앉아 있던 사람이 죄 없이 도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 pp.163~164 「z활불러버s」중에서 “살아 있죠? 밥 먹죠? 옷 입죠? 어떨 땐 카드로 할부도 하고 공과금 나오면 안 내고 연체료 쌓이게 뒀다가 서너 달 치 한 번에 내죠? 밤에 늦게 자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죠? 병원에서 약 받아오면 이틀 치 먹고 다 버리죠? 전부 약정된 거예요. 이승진씨의 삶 전체가 약정이고 약정 할인이 엄청 들어가 있어요. 이걸 개명하면서 정리해버리면 약정 해지 위약금이 상당하게 청구될 수밖에 없어요. 근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에요.” “이미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 또 문제가 있어요?” --- pp.194~195 「이승진, 이승진 그리고 이승진」중에서 “그러니까 그 옹스테드라는 분은 지금…… 매달려 계신가요?” “옴스테드는” 나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옴, 옴, 옴오오오오오ㅗㅗ옴스테드는” 옴, 할 때마다 머리통이 울렸다. “재배되고, 수확되고, 낙과하고, 갈리고, 썰리고, 절여지고, 으깨져서 이렇게 내 앞에 스크루드라이버로 섞여 있습니다. 그가 원하던 바대로죠.” “멋진 이야기네요.” 묘하게 냉소적인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그에게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오렌지에 관해서라면” 바텐더는 앞에 앉은 손님의 미묘한 심리 변화 따위에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다 된 것 아닌가요. 아무리 멋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말이죠.” 이쯤 되면 대놓고 시비를 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pp.210~211 「오렌지, 였던」중에서 국장실에 국장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럴 때는 누구한테 인사해야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허공에 고개를 숙이면 아마추어처럼 보이고 인사를 하지 않으면 건방져 보인다. 권유수는 구 년 차 공무원의 숙련된 감각으로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둥굴레차 주전자에 허리를 굽혔다. 상석에 앉은 백발노인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자네가 권주임인가?” “네. 낙엽관리부 권유수 주무관입니다.” “거기 앉게.” 권유수의 자리는 문간에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였다. 무릎 위에 업무 수첩을 펴고 펜을 꺼내들었다. --- p.273 「바과, 사나나」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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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의 문을 여는 단편 「인생은 그라운드」를 보자. ‘나’의 집안이 망한 이유부터가 지극히 현실적이다. ‘나’는 과수원 부지를 둘러싼 기획 부동산 사기에 걸려들었고 이모는 가상화폐 사기에 넘어가 전 재산을 잃었다는 연령대를 반전한 설정, 나아가 KBO조차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바람에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사라져버린다는 거침없는 전개는 김홍식 ‘비틀기’로서 독자의 예상을 의도적으로 배반하며 신선함을 안긴다. 소설 곳곳에서 일확천금에 목맨 시대정신과 국가기관의 불도저식 상황 진압에 대한 풍자가 빛을 발한다. 야구가 사라진 세상에서 꿋꿋하게 야구를 하려는 ‘나’가 프로야구 선수 우규민과 야구 용품 중고 거래를 하는 장면은 독자를 둘러싼 현실의 맥락을 소설에 직접적으로 연동시키는 중요한 순간이다. 실존 인물을 언급함으로써 발생하는 이러한 현실감은 김홍 소설이 디테일을 획득하는 주요한 전략이다.
표제작 「여기서 울지 마세요」는 어떤가. 이 소설은 현실을 반영할 디테일로 MBTI 성격유형검사를 택하고 그에 사주풀이를 결합시켜 유머를 발생시킴으로써 비과학적인 유형화에 휘둘리는 사회를 풍자한다. 에너제틱한 ESFP 알바생 ‘산해씨’를 고용한 빵집 주인은 밝게 일해주는 만큼 임금을 인상하겠다는 자본주의적 약속을 한다. 소설에서 산해씨의 다정한 온기와 밝음은 조도를 측정하는 단위 ‘럭스’로 수치화된다. 3000럭스 정도로 시작했던 산해씨의 밝기가 2만 5000럭스를 돌파하자, 빵집 주인은 약속을 지키는 대신 산해씨를 해고한다. 하지만 산해씨의 밝아짐은 멈출 줄 모르고, 그가 내쏟는 에너지를 미국의 핵융합 연구소에서 눈독 들이면서 소설은 점차 파국으로 나아간다. “너무 환하지 말아요. 우리 견딜 수 있는 만큼만 밝아요.”(103~104쪽) 소설이 산해씨를 포함해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수행하는 감정노동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본문에 달린 18개 주석의 분량만 원고지 32매, 총 6,400자에 달하는 독특한 형태의 단편 「z활불러버s」는 현실계와 상상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김홍 소설의 백미를 보여준다. 비관적인 전망이 가득한 현대 한국사회에 인간의 몸으로 환생한 부처(활불活佛) ‘정소려’를 둘러싼 인간군상의 존경심과 시기심이 흘러가는 양상을 짚어나가며, 수많은 허구의 출처를 동원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소설이 펼쳐진다. 소설은 활불을 믿는 티베트 불교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을 시작으로 그간 광장에서 성토되었던 불의와 폭력을 하나씩 호명한다. 이 비극적인 세상에서 고통받는 모든 존재를 구원하려던 정소려는 결국 구원에 실패하고 자취를 감추는데, 이때 김홍은 환생을 거듭하는 활불의 특성을 온라인 게임과 접목시킨다. 이제 새로운 활불은 게임 캐릭터가 되어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하고, 정소려가 보여준 신화적, 전설적 행적들은 게임 속 이펙트처럼 축소되고 고결함을 잃는다. 이 ‘쪼그라든 세계’를 마주하는 회한이야말로 김홍이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여기서 울지 마세요』는 수록된 단편소설뿐만 아니라 ‘작가의 말’까지 남다르다. 「그러다가」의 화자는 『엉엉』*의 동그람씨가 맞다. 동그람씨는 지금도 [슬사모]** 회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귀는 동그람씨와 화해하기 위해 배치 크라우더의 ‘킹 프라이스 마트’를 찾아간 바 있다.*** 나 역시 그들의 관계 회복을 간절히 바라지만, 당분간은 요원해 보인다.(「작가의 말」, 340쪽) * 민음사, 2022. ** 슬픈 사람 모이세요. *** 『프라이스 킹!!!』, 문학동네, 2024.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이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 맺는 연관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작가의 말’을 읽다보면 김홍 소설들이 어느덧 서로 연동되면서 광활한 영토를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김홍이 자신의 영토를 넓혀가는 방식은 단지 질주하는 상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통통 튀는 상상의 틈바구니를 꽉 채우는 날카롭고 세밀한 현실 인식. 가상의 단체명부터 인물 간의 대화 흐름, 시공간적 배경까지 허투루 만드는 것이 없는 디테일한 설정. 이러한 미덕 덕분에 김홍 소설의 상상력은 현실세계의 맥락과 밀착되어 탄탄하고 실감 넘친다. 분명 이전까지 접해보지 못한 엉뚱한 설정에 웃음이 터지는데 어색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각각의 소설들이 이음매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세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홍 소설 안에서 독자는 자유롭다. 그 어떤 작가도 쉽게 형성하지 못할, 드넓은 동시에 견고하며 신선하기까지 한 상상의 세계를 마음놓고 유영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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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김홍 소설을 읽고 다들 유머에 대해 말할 텐데, 솔직히 소설에서 유머는 징글맞게 까다로운 것이다. 소설이 독자를 웃기려 들면 독자는 마음을 여는 게 아니라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 엄격해진다. 인터넷에서 자주 본 ‘드립’도 안 되고, 작가 혼자만 키득거리는 폐쇄적인 익살도 안 된다. 오직 웃기는 것만이 목적인 텅 빈 말장난도 안 되고, 은근슬쩍 교훈을 박아놓은 갑갑한 골계도 안 된다. ‘유머러스한 소설’ 아래에는 빽빽한 바늘 밭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김홍은 이 까다롭고 복잡한 바늘 위를 더없이 자연스레 거닌다. 소설을 읽다보면 익숙한 농담에 갸우뚱하는 찰나, 살짝 꺾였다 무섭게 휘며 마음을 스산하고 뭉클하게 만드는 훅이 온다. 김홍은 소설에서 유머가 해내야 할 것을 해냈다. - 이미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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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의 소설은 휘황찬란하다. 태양만큼 밝아지는 인간, 산산이 흩어지는 인간, 인간 속의 인간 따위 온갖 종류의 초현실적인 인간들이 너무나 담담한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통에 나에게 무슨 사기를 치려는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늘어놓는 현란한 말들의 곡예에 홀린 듯 넘어가 내 전 재산을 내어놓고 싶어지게 만든다. 잘 모르겠지만 적당히 똘똘한 이자로 보답을 할 것 같아서? 대단한 기술이다. 아니, 진정한 마술이다. 근데 솔직히 요즘은 다들 나와 비슷한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똘똘한 기적을 우리 모두 마음 깊이 원하고 있지 않는가? 그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엉엉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딱 그런 기분. 설명하긴 어렵지만 진짜 딱 그런 기분, 뭔지 아시죠? - 김사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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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소설 속에서 연속적인 변화보다는 불연속적인 변이가, 단계적인 사연보다는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사건이, 개연성보다는 우연성이 더 강력한 현실성을 동반하는 방법론으로 등장하는 실질적 배경이다. 김홍의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일종의 ‘황당함’은 금융자본주의 아래 극단으로 치닫는 상업주의와 물신주의를 살아가는 삶의 감각을 반영한 전략이 된다. -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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