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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이 써 내려간 모든 소설의 비밀] 소설가 최진영의 첫 산문집. 경칩에서 우수까지, 절기마다 띄웠던 24개의 편지에 산문을 더했다. 18년 차 소설가인 작가를 계속 쓰는 사람으로 만든 "어떤 비밀"들을 담은 책은 그간 작품을 읽어준 독자에게 전하는 선물과도 같다. 나와 당신, 그 사이의 모든 것을 껴안는, 사랑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책. - 에세이PD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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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眞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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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귀순이에게 종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엄마, 여기에 나무랑 집이랑 사람을 그려봐. 심리학 수업에서 HTP검사를 배웠기 때문이다. 귀순이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몰라. 그림을 왜 못 그려. 애들도 다 그리는데. 여기에 나무랑 집이랑…… 나는 그림을 그려본 적 없어. 그 말이 진심이란 걸 귀순이의 표정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제대로 깨달았다. 열네 살부터 공장에서 주야간 교대로 일해온 삶의 진짜 의미를. 이전까지 내가 ‘안다’고 믿었던 귀순이의 삶은 그저 전해 들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안다고, 많이 들었다고 생각할 뿐 제대로 상상해본 적 없는 타인의 이야기. 1950년대에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자기 몫의 도화지나 크레파스가 있었을까? 연필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귀순이는 그림을 그려본 적 없다. 아무도 귀순이에게 너의 그림을 보고 싶다고 청한 적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다 큰 딸이 느닷없이 종이를 들이밀며 나무를 그려보라고 한 것이다. 그 무렵 귀순이는 갱년기였고 나는 기나긴 사춘기의 마지막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 pp.97~98 「귀순이, 사랑하는 나의 엄마」중에서 나의 중심에는 폭발하기 직전의 용암 같은 사랑이 있다. 내 생애 최초로 생겨난 사랑이기에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고 순진하며 무겁다. 그 사랑이 너무 깜깜해 때로는 모든 걸 엄마 탓으로 돌렸다. 감당하기 버거워서 사랑일 리 없다고 부정했다. 그 마음만 없앨 수가 없어서 나를 없애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무게중심. 그 사랑이 가장 아래에 단단하게 있어서 쓰러졌다가도 일어났다. 나에게도 버티는 힘이 있다면 그건 엄마가 내게 먼저 보여준 힘. 나의 사랑이 폭발한다면 바닥부터 솟구칠 것이다.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은 가장 늦게 드러나 제일 오래 흐를 것이다. 살면서 사랑을 부지런히 모았다. 지금 내겐 사랑이 있다. 이제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이젠 내가 엄마를 사랑할 수 있다. --- p.100 「귀순이, 사랑하는 나의 엄마」중에서 당신이 멋있는 말이나 훌륭한 행동을 할 때, 많은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때, 성취하고 성공했을 때 당신은 아름답다. 빛난다. 그때 당신 곁에 나는 없어도 상관없다. 거기 사랑은 없어도 괜찮다. 당신의 쓸쓸한 옆모습, 힘없는 뒷모습, 저기 홀로 걸어가는 당신, 웅크린 어깨, 당신이 나약할 때, 맞서지 못하고 물러설 때, 홀로 울 때, 가만히 한숨 쉴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외로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슬프다. 당신 옆에 있고 싶다. 충분히 혼자였던 당신이 비로소 시선을 옮길 때 그 자리에 내가 있고 싶다. --- pp.141~142 「나의 사랑은 불수의근」중에서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구의 증명』을 쓰기 시작했다. 쓰면서 알아보자 생각했다. 담에게 몰입하여 구를 사랑했다. 그들을 사로잡은 감정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광기인지 연민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헤어질 수 없는 마음만을 생각했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담은 말한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내가 쓴 문장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없던 문장이었다. 담을 따라가다 만난 문장이었다. 그 문장을 쓴 다음 나는 항복했다. 이전까지는 사랑하면서 행복해지려고 했다. 이후에는 불행을 함께 껴안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담이 내게 알려준 사랑. --- p.245 「비가 오면 한 사람의 어깨만 젖는다」중에서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마음속 작은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작은 거울은 어른의 얼굴을 모두 담지 못하고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의 일부를 보며 물어봅니다. 누구일까. 누가 내 마음에 몰래 살고 있어 이토록 나를 못 견디게 하나. 거울이 말해줍니다. 아이에게는 자기를 사랑하는 둥그렇고 단단한 힘이 있었지.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 힘이 다 녹아버린 거야. 그래서 자꾸만 사랑을 원하는 거야. 스스로 다시 사랑해보려고. --- p.295 「대설의 편지」중에서 내가 어린이였을 때, 외할머니는 초등학교 근처에서 노점을 했다. 리어카에 화구 두 개를 달아서 쥐포와 핫도그를 튀기고 어묵을 끓여 팔았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외할머니를 찾아가 쥐포 부스러기나 핫도그를 받아먹었다. 할머니 옆에 앉아서 바라보던 풍기의 오거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리어카 가득했던 기름 냄새와 돌돌 말아 튀긴 쥐포의 맛도. 그때 할머니 머리카락은 검었다. --- p.306 「나의 가장 오래된 단 한 사람」중에서 좋은 사람에게 얼룩처럼 나를 묻히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묻어 있으면 나도 그처럼 좋아질 것 같았거든요. 그래요, 아마도 나는 기억되고 싶었나봅니다. --- pp.344~345 「대한의 편지」중에서 반가운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제주까지 온 날, 밤늦게까지 즐겁게 어울리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정리하면서 나는 그에게 문자를 남긴다. 이제 집으로 가. 바로 답장이 온다. 마중 나갈게. 다정한 사람들과 봄날의 밤길을 걷는다. 그들이 묵는 호텔 앞에 금세 닿고, 그들은 그를 만날 때까지 계속 걷자고 한다. 우리는 좀더 걷는다. 맞은편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그가 보인다. 밤 깊어 길은 어둡고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본다. 다정한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기 그가 오고 있어요. 멀리서, 그가 손을 흔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찾을 수 없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그가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에야 사람들은 그를 알아본다. 나는 이상한 뿌듯함을 느낀다. 나는 아주 멀리서도 너를 알아볼 수 있어. 다른 사람이 너를 보지 못할 때도 나는 널 볼 수 있어. 먼 훗날에도 알아보겠지. 나비가 되어도. 꽃으로 피어나도. 바람으로 잠시 머물러도. 어둠 속에서 한없이 멀어지는 별이 되더라도 --- pp.379~380 「오늘은 울고 내일은 올리브유를 사자」중에서 |
지어낸 이야기지만 진짜 마음이에요
장래 희망은 계속 쓰는 사람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친구를 사귀는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끌리는 대로 빌려 읽다가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에서는 꿈이 없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 잘못하는 사람, 걱정 많은 사람, 그러니까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등장해서 좋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 강사 일을 했다. 낮에는 중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밤에는 글을 썼다. 밤마다 무언가를 읽거나 쓰는 생활의 큰 틀은 유지했지만 달라진 부분도 있었다. 나의 문장을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보기로 결심했다는 것. 소설을 쓰려면 커피와 랩톱과 혼자만의 시간과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이 필요했다. 정말 그뿐이었다. 비싼 도구나 특정한 공간, 경력자의 교습이 필요했다면 아마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_「나는 나에게 필요한 문장」, 125쪽 올해로 등단 18년 차 소설가, 그동안 여덟 권의 장편소설, 네 권의 소설집을 상재하며 성실한 쓰기의 전범을 보여준 최진영. 『어떤 비밀』은 그가 자신의 작품을 따라 읽어온 독자에게 전하는 선물 같은 첫 산문집으로 이는 그동안 써내려간 모든 소설의 에필로그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알겠다는 마음, 이해했다는 끄덕임, 동감과 공감까지도 넘어,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겪어지는 소설(정용준)을 ‘인물의 심장을 통과한 문장’(조해진)으로 쓰는 작가. ‘하나같이 한 사람과 깊이 교감하고 나온 듯한 여운을 남기는’(전성태) 이야기로 독자의 고통과 변화를 겨냥하고 그들을 소설 서사에 연루시켜 삶을 새롭게 쓰도록 만드는 소설가(송종원). ‘우리 시대의 페미니즘 서사가 도달한 단연 뜻깊고 중요한 성취’(백지연), 이 수식어 앞에는 랩톱의 한글창을 열고 글을 쓰던 소설가의 처음이 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첫 문장으로 적당하다는 허락을 누구에게도 구할 수 없어서 그저 쓰고 지우던 시간. 그러다 마침내 한 문장을 완성하고, 남겨두고,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며 백지를 조금씩 문장으로 채우던 그때가(「작가의 말」, 15쪽). 최진영 작가는 말한다. 소설은 문장으로 만든 사진첩이라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그 시절의 진심이 깃들어 있다고. 소설을 쓰다보면 자신의 삶이 궁금해져 더 살아보고 싶어진다고. 그러므로 최진영의 장래 희망은 계속 쓰는 사람이다. 네가 빛을 주었으니 나는 어둠을 줄게 네가 어둠을 주었으니 나는 비밀을 줄게 『어떤 비밀』의 표지는 실로 짠 섬세하고 촘촘한 직물 느낌을 주는 리넨 계열의 친환경 종이로 제작했다. 비닐로 코팅을 하지 않고 특수 약품 처리를 하여 얼룩지고 젖을 수 있고 찢어지기 쉬운 취약한 종이의 특성을 그대로 살렸다. 손끝으로 매만지면 누군가의 고유한 지문처럼 느껴지는 촘촘한 살결, 그것이 품고 있는 두툼한 이야기의 부피. 표지 이미지는 이수진 화가의 작품 [잘못]이다. 거품을 내어 꼼꼼히 무언가를 씻어내는 그림 속 손은 이야기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최진영 작가는 한 대담에서 이 세계와 내가 너무나 닮았다는 것, 이 세계의 무자비함과 폭력성이 바로 나의 속성이라는 깨달음을 말한 바 있다(「또 다른 질문을 부르는 문장」, 『불가능한 대화들 2』). 누구도 살면서 한 번만 손을 씻을 수는 없다. 살아 있는 한 손은 거듭 더러워지고 우리는 반복해서 손을 씻어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자꾸만 잘못하는 존재’(동지, 313쪽)인 내가 다가가려는 소설의 세계는 아닐까. 우리는 이렇게 애쓸 수 있다고, 애써야 한다고, 우리는 사람이니까 그래야만 한다고 거듭 쓰면서(추분, 231쪽). 나는 지금 고통이란 단어를 생각한다. 글자에 갇힌 ‘고통’의 답답함을 생각한다. 제야처럼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때로 상상한다. 글자에 갇힌 감정이 폭발하듯 글자를 부수고 나오는 상상.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글을 쓰는 것만 같다. 일부러 글자에 무언가를 가두는 것만 같다. 나는 나의 문장이 파괴되길 바란다. 점잖은 문장이 산산이 부서져 의미와 감정이 책 밖으로 솟구치길 바란다. 그것이 당신에게 닿길 바란다. 출간 뒤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말했다. ‘이 소설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고. 지금은 후회한다. ‘이 소설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이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제야 곁에서 같은 방향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서 소설을 써놓고도 그 인터뷰 현장에서 나는 제야의 이야기를 불편해할 사람들부터 생각했다. (…) 제야라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이야기를 읽고 당신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나는 고통을 느끼는 당신을 믿고 싶다. _「우리는 이렇게 애쓸 수 있다고, 애써야 한다고, 우리는 사람이니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