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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의 글. 루이스가 초대하는 글쓰기의 세계
Part 1. 글자와 행간에 숨결을 불어넣다 - 글을 잘 쓰고 싶다면 - 생각을 글로 담아내는 과정의 수고와 기쁨 Part 2. 한 차원 깊은 글쓰기, 그 경이로운 모험 속으로 - 소설 쓰기 - 시 쓰기 -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 - 공상과학소설 쓰기 - 기독교적 글쓰기 - 설득력 있게 쓰기 - 다른 작가에 대한 루이스의 시선 출전 부록. 이 책에 나온 작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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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을 쓸 때 네가 묘사하는 대상에 대해 독자가 느꼈으면 하는 감정을 그냥 형용사로 말해 버리지 마라. 무언가가 “끔찍하다”라고 단정할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끔찍함을 느끼게끔 그걸 묘사하렴. “즐겁다”라고 말해 버릴 게 아니라 네가 쓴 묘사를 읽고 우리 입에서 “즐겁다”는 말이 터져 나오게 하라는 거지. 그러니까 무섭다든지 신기하다든지 흉하다든지 고상하다든지 하는 말은 다 독자에게 “부디 제 일을 당신이 대신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5. 주제에 비해 너무 거창한 단어를 쓰지 마라. 예를 들면 “매우”라는 뜻을 말하고 싶을 때 “무한히”라고 써서는 안 돼. 그러지 않으면 정말 무한한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는 정작 남아 있는 단어가 없거든. --- p.15 3. 눈으로 쓰지 말고 늘 귀로 써라.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네가 쓰는 모든 문장을 마치 낭독하거나 발표하듯이 귀로 들어야 해. 듣기에 좋지 않거든 고쳐 쓰렴. 8. 무슨 단어를 쓰든 꼭 뜻을 알고 써라. --- p.16~17 연습, 연습, 또 연습이 필요해. 꾸준히 최대한 잘 쓰기만 한다면 우리 나이에 무엇을 쓰는지는 (적어도 내 생각에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시든 산문이든 정말 공들여 한 페이지를 쓸 때마다 훌쩍 진보한 기분이 들어. 설령 그 원고를 잠시 뒤에 불 속에 던져 버린다 해도 말이야. --- p.27 요즘 시대 학부생들이 하는 비평에서 내 눈에 띄는 결점은 다음과 같다. 1. 부정적 비평일 때 그들의 어조에 악감정이 배어 있다. 독자에게 알리기보다 저자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마음이 앞선다. 원래 부정적 비평은 작품의 단점을 진단하고 설명하는 것이지 작품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2. 세상에 나와 이미 여러 세대를 거친 작품인데도 그들은 작품에 대한 과격한 재해석을 너무 성급히 주창하거나 수용한다. 분명히 그런 재해석에 대한 평가가 여태 없었을 리 없건만 그 부분은 무시된다. --- p.31 남의 것을 자신이 쓴 글처럼 제출한 제자를 나는 지금까지 한 명밖에 보지 못했네. 그 학생에게 말했지. 나는 형사가 아니고 하다못해 훈장도 보모도 아니니, 이런 유치한 수법을 감시할 생각일랑 털끝만큼도 없다고 말일세. 깨끗이 수습하라고 했더니 그가 다음 주에 자진해서 학교를 떠나는 바람에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네. 내 생각에 자네는 이와 관련된 기준을 대략 공지해야 할 걸세. ……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논문을 쓰려는 자유인의 수고보다 갤리선〔고대, 중세에 지중해에서 쓰던 배의 하나. 양쪽 뱃전에 아래위 두 줄로 노가 많이 달렸다-편집자〕의 노예처럼 베껴 쓰는 노역을 선호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참 어이가 없다네. --- p.33 내가 “어린이를 위해” 썼다는 말은 어린이가 좋아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요소를 뺐다는 의미에서만 그렇지, 일부러 어른 수준에 못 미치게 썼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 원칙대로 하면 적어도 가르치려 드는 자세만은 삼갈 수 있다. 나는 독자의 대상을 딱히 정해 놓고 쓰지 않았다. 어린이만 읽을 만한 책이라면 어려서도 아예 읽을 가치가 없다는 게 내 지론이며, 내 작품도 이 지론을 기준으로 유죄나 무죄일 수 있다. 나는 아이의 머릿속에 주입된 이런저런 억압이 내 이야기를 통해 극복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동일한 억압이 어른의 머릿속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어쩌면 동일한 방법으로써 극복될 수도 있다. 동화는 공상 세계를 담아내는 형식이며, 나이와 관계없이 사람에 따라 동화를 읽을 수도 있고 읽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가 동화의 특성을 잘 살려 내고 또 독자를 제대로 만난다면, 어느 나이에 읽든 동화의 위력은 동일하다. 즉 동화는 일반화하면서도 구체성을 잃지 않고, 추상 개념이나 개별 사건보다 폭넓은 경험을 생생히 제시하며, 관계없는 부분은 모두 쳐 낸다. 최고의 동화는 그 이상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생전 처음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다. “삶에 관해 논평하는” 게 아니라 삶을 넓혀 주는 것이다. --- p.44~45 이야기를 쓰는 과정이 내게는 말을 하거나 건물을 짓는 것보다는 새를 관찰하는 쪽에 훨씬 가깝다. 우선 여러 심상이 떠오른다. 그중 더러는 정취도 같고 냄새도 거의 같아서 함께 무리를 이룬다. 말없이 관찰하노라면 서서히 저절로 어우러진다. 운이 아주 좋으면(나는 그런 적이 없지만) 전체가 정연하게 하나로 들어맞아 작가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러나 대개는(내 경험상으로는 언제나) 빈틈이 있다. 그래서 결국은 작가가 어느 정도 지어내야 한다. 인물들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하게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를 작가가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이야기를 쓰는 최고의 방법인지는 고사하고 통상적 방법인지도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일 뿐이다. 언제나 심상이 먼저다. --- p.95-96 크리스 네빌의 She Knew He Was Coming(그가 올 것을 그녀는 알았다)은 최악의 경우입니다. 감상에 젖은 매음굴과 마음씨 고운 매춘부라는 상투적 주제까지는 신파조라도 그런 대로 봐 줄 만하지만, 장소가 굳이 화성일 이유가 있을까요? 어떤 예술 작품이든 작품 속의 모든 소재는 반드시 그 쓸모에 따라 쓰여야 합니다. 교향곡에 어떤 주제를 도입했으면 그 주제로 무언가를 이루어 내야 하고, 시를 특정한 운율로 쓸 거면 그 운율만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야 하며, 역사 소설을 쓰려면 그 시대가 취지에 반드시 부합해야 합니다. 어떤 요소든 작품에 이롭지 못하면 오히려 해롭습니다. 그런 식으로 낭비할 여유가 없어요(잘 그린 수묵화에서 여백은 선만큼이나 전체 구도에 꼭 필요하지요. 여백이 그냥 백지인 경우는 어린아이의 그림뿐입니다). “화성만의 특성”이 속속들이 사용될 게 아니라면 화성을 이야기의 무대로 삼을 구실이 없지 않습니까? --- p.109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분야를 비평할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질색하는 분야라면 아예 비평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비평가가 되려는 모든 이에게 감히 조언하거니와 당신도 똑같은 원칙을 정해 두라. 당신이 특정 부류의 모든 책이나 특정한 상황에 격하다 못해 혐오하는 반응을 보인다면, 이는 위험 신호다. 확신하건대 부정적 비평을 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어려운 일이다.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하라고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즉 작가가 하려는 말을 당신이 속속들이 알고 진심으로 좋아하는 데다가 그 작가의 좋은 작품을 다수 즐겨 읽은 상태에서 비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작가의 실수를 제대로 지적하고 어쩌면 실수한 이유까지도 밝힐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으악! 나는 이런 책은 질색이야”라고 반응한다면 책의 진짜 결점을 진단할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애쓸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분석일랑 제쳐 두고 “난잡하다”, “경박하다”, “사이비 같다”, “엉성하다”, “섣부르다” 따위의 감정적 상투어만 뒤죽박죽 늘어놓을 것이다. 뭐가 문제인지 제대로 알면 이런 단어가 하나도 필요치 않다. --- p.128~130 자신의 신학을 전부 일상어로 옮겨야 한다. 아주 번거로운 데다 30분 후면 할 말이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생각에도 더할 나위 없이 도움이 된다. 확신하건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당신의 생각을 옮길 수 없다면, 당신의 생각이 혼미해서 그런 것이다. 자신이 정말 알고서 하는 말인지 시험하려면, 그렇게 옮길 수 있어야 한다. --- p.135 전반적으로 보아 지금까지 내가 읽은 모든 시 가운데 단테의 시가 단연 최고다. 그런데 그의 시가 지닌 탁월함이 최고 정점에 이를 때면, 정작 단테가 하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 요컨대 시라는 예술 전반에서 최고 경지는 결국 일종의 물러남이다. 거기에 도달하려면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 전체가 그의 뇌리 깊숙이 들어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시인은 길을 비켜나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있으면 파도가 밀려오고, 산들이 살랑살랑 잎을 흔들고, 빛이 환히 비쳐 들며, 천체가 알아서 회전한다. 이 모두가 시를 짓는 데 필요한 소재이기보다 이미 그 자체로 시다. 감히 고백하자면 단테 이후로는 심지어 셰익스피어도 내게는 약간 인위적인 듯 보인다. 셰익스피어는 거의 “그냥 지어내는” 것 같은데, 단테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 단테의 시를 더는 읽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그럴 것이다. --- p.150~151 |
마음을 움직이는 섬세한 문장, 상상력과 논리의 절묘한 조화,
삶의 진실을 담아낸 아름다운 이야기에 관하여! SNS에서 일기, 편지, 서평, 보고서, 문학적 글쓰기까지 이제 당신의 죽은 문장을 깨우라! 이 책은 주로 문학적 글쓰기와 상상적 글쓰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전문적 글쓰기를 하는 이들, 작가를 꿈꾸는 예비 작가, 책을 즐겨 있는 애독자 모두 풍부한 영감을 받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의든 타의든, 글이 짧든 길든, 쓰는 도구가 무엇이든, 현대인이라면 생활 속에서 일평생 글쓰기와 함께한다. 이 책에 담긴 메시지는 우리의 모든 일상적 글쓰기에도 단연 유익하며 적용할 만하다. “삶에 진력이 날 때마다 글을 써 봐. 잉크는 인간의 만병을 통치하는 묘약이거든.” 절친인 아서 그리브즈에게 루이스가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몸과 마음이 지친 현대인들이 부디 이 책을 통해 나름의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기를, 또한 글쓰기의 진보가 있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책 속에서 루이스의 시선을 통해 스치듯 만난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 세계에 발을 내딛는 뜻밖의 즐거움까지 맛보게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