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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소란스럽지 않게 작은 이정표를
바다에 잠긴 세월 갑순이, 갑돌이 만나다 하얀꽃 끈 살라마, 니 피티아바쿠(Salama, ny fitiavako) 복통 개팔자, 상팔자라구요? 고래 그 산에서 만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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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담배 끊었어?”
“잉, 담배를 참어본지가 보름은 되얐다.” “우와, 웬일이야, 할머니가 금연을? 어쩐지 요즘 해가 서쪽에서 뜨더라니.” 할머니의 말씀에 가족 모두의 시선이 할머니에게 향했고 나의 얄궂은 놀림에 할머니는 겸연쩍어 맥주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우리 엄마가 금연을 하시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경희 아빠도 어머님처럼 금연해야지 별 수 있나요?” 부모님은 서로 마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당신의 삶을 지탱해주었다는 담배를 끊었다는 것은 결코 쉽게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에게 무언가 특별한 계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 가족은 전혀 모르고 지나쳤다. 연세를 드시면서 건강을 생각해서, 혹은 지긋지긋한 농사일에서 해방되면서 심신이 편안해져 담배를 끊었다고 짐작했을 뿐이다. 물론 금연을 시작한지 이제 보름 정도가 지났을 뿐이지만 40여 년을 피워온 담배가 아니었던가. --- p.69 「갑순이, 갑돌이 만나다」 중에서 “실례합니다.” “누, 누구시단가?” 뼈마디가 굵고 듬직한 오십 대 중반의 사내가 낯선 청년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 이었다. “알아볼 게 있어서요.” “그래라이. 좀 앉으쇼. 내가 이장인디 뭣땜시 그라요?” 차일 안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다 궁둥이를 게으르게 움직여 빼꼼이 자리를 만들었다. “그러세요. 혹시 황대만씨라고….” “뭣이여, 대만이라 했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술잔을 내미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알고 있는데 왜 그러시죠?” “대만이 아부지가 죽어서 오늘 초상을 치는디.” 이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그분의 아버지가….”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존칭에 스스로 놀랐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 p.127 「끈」 중에서 몇 년 전 느닷없이 어머니는 복통을 호소하며 안방을 뒹굴었다. 검진을 마친 의사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며 안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배앓이는 낫지 않았다. 좋다는 약도 소용없었고 어머니는 항상 소다 가루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어머니는 쑥이나 익모초를 비롯한 민간요법과 병원에서 일러준 식이요법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건산댁은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를 모시고 종합병원에 갔다. “나이가 많아 기운이 쇠하고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하면 간혹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영양가 좋은 음식을 드시도록 하세요. 에, 혹시 집안 식구 중에 예전에 위장병으로 고생한 분이 있었나요?” “그것도 유전이 된다요?” “아닙니다. 다만 특정한 일에 심리적인 강박관념이 심하면 그 병이 자신의 것으로 인식되어 유사한 증세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 아버지가 신장병으로 죽자 같은 병을 앓았다는 임상 기록 이 있거든요.” 포승줄에 묶여 있던 기억이 일순 피돌기를 시작하며 맥박을 뛰었다. --- p.185 「복통」 중에서 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승용차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병원을 향하고 있지만 석삼년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심정이다. 평소의 외출 같으면 농악판의 상쇠처럼 흥겹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운전대를 잡은 박 여사가 짬짬이 보내는 눈길조차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오늘도 변함없이 깨끗하고 푹신한 융단이 깔린 나의 왕궁에서 아침을 맞았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뽀글뽀글 끓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무거운 추를 매달아 놓은 듯한 눈꺼풀에 남아 있는 겉잠을 떨치고 눈을 떴다. 그 순간 안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오늘도 한바탕의 전쟁이 진행 중인 것을 직감했다. --- p.201 「개팔자, 상팔자라구요?」 중에서 “그만 진정하시고 위쪽으로 올라가 볼까요?” 어정쩡한 상태의 이경식이 살며시 몸을 빼면서 제안했다. 문학비가 끝나는 곳에는 웅장한 탑 하나가 버티 고 있었다. “이 탑이 타임캡슐이 들어있는 탑입니다. 높이가 15미터이고 둘레는 9미터에요.” “아! 문학인들의 친필원고를 넣었다는, 언제 개봉할 예정인가요?” “탑이 무너지면 그때 개봉할겁니다.” “기한을 정하지 않고 기다리는 여유가 산을 닮았네요. 제 생각엔 세월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당장 올해든 내년이든 천재지변이 일어나 탑이 무너져서 타임캡슐을 개봉하는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까 천관산 높이에 맞춰서 아예 723년 뒤에 개봉하라고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어요.” 경식이 빙긋 웃었다. 술판을 끝낸 천사모 회원들이 작업도구를 들고 넉넉한 걸음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술판이 끝났나보네요. 할머니를 도우러 가야겠어요.” 이미 치다꺼리를 끝낸 노인은 집으로 향하고 없었다. 말끔하게 치워진 주차장에서 한동규 선생은 문화부 기자들에게 강연을 펼치고 있었다. 열심히 메모하고 사진을 찍느라 기자들은 분주한 모습이었다. --- p.344 「그 산에서 만나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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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지만 화려하게, 조용하게 휘몰아치는 단편소설집
김형종 작가의 『그 산에서 만나다』는 마치 옴니버스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한 편 한 편 흥미롭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파일럿의 이야기부터 38년 만에 순정을 되찾은 할머니 이야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어느 애완견 이야기, 불안정한 가족관계를 뒤로하고 산을 찾은 여자의 이야기까지 9개의 이야기가 모두 자신의 매력을 뽐낸다. 책을 읽다 보면 소설임에도 에세이처럼 진솔하게 다가오고, 결말이 주는 여운은 한 편의 잘 만든 영화를 본 것처럼 길게 남는다. 때로는 소박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몰아치는 저자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살펴보자. 그리고 결말이 주는 여운을 자유롭게 만끽하자. 스토리 인 시리즈 소소하지만 열정적인 당신의 일상을 공감과 위안, 힐링을 담아 응원합니다. 어떤 말들보다 큰 힘이 되어주고 당신만의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당신의 스토리와 함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