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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재회 7
2부 겨울 45 3부 봄 85 4부 여름 157 에필로그 189 작가의 말 200 추천의 글_ 은모든(소설가) 202 추천의 글_ 성현아(문학평론가) 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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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나진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당황했지만 과거의 자신이 했을 법한 말이라 대놓고 의심할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진은 한결같은 평을 듣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맡은 일을 남에게 미루는 법이 없고 융통성이 있는 사람. 나진의 사회생활은 그런 평들과 함께 무난하게 흘러왔다. 나진의 표정을 살피던 다혜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고치셨어요?” 나진은 벙찐 표정으로 다혜를 쳐다보았다. --- p.12 다혜가 나진의 집에서 머무르는 기간이 하루에서 이틀, 이틀에서 나흘로 길어지자 나진은 차츰 자기 합리화에 빠져들었다. 너도 나한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한 적이 있어. 나는 아이가 한 말이니까 그냥 이해하고 넘어간 거야. 너도 그럴 수는 없었어? 그때 내가 얼마나 어렸는지 너도 이제 알잖아.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나진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다혜는 나진이 눈치를 주어도 집안일을 꿋꿋하게 도맡아 했다. 너는 손님이라고 선을 그어도 소용없었다. 퇴근 후 귀가하면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빨래며 청소도 나진이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끔히 해결되어 있었다. 살림에서는 다혜에게 불만을 갖기가 어려웠다. 손끝이 야물고 빨랐다. 나진보다 실력이 나았다. 문제는 다혜에게 살림을 맡긴 적이 없다는 것이지. --- p.51 다혜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진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 부담스러운 아이였다. 가까워질수록 그 사실을 더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진을 곤란하게 한 많은 것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다혜의 거짓말은 대충 맞장구 쳐 넘기기도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 다혜는 거짓말을 잘했다. 그러나 그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다. 나진은 이해한다. 그 시절의 나진과 다혜를 이해한다. 이해하려 최선을 다했다. --- p.70 그게, 그런 모습이, 어떻게 사기꾼이야. 나진이 상상했던 빈틈 없는 사기꾼의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울먹이며 이어 가는 나진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난 뒤에 다혜가 입을 열었다. “언니는 여전히 착하구나.” 바닥만 보고 있던 나진은 고개를 쳐들었다. 이게 착하다고 말할 일이야? 나진은 온 마음이 뒤틀렸다. 폭발시키지 못한 분노가 다혜에 대한 적의와 뒤엉켰다. 눈물로 젖어 가는 나진의 눈에 다혜의 얼굴이 들어왔다. 기묘하게도 다혜는 생기가 흘러넘쳐 보였다. “불쌍한 언니,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 --- p.84 “언니, 도망칠 게 아니라 복수를 해야죠.” 나진은 ‘복수’라는 단어에 놀라 잔불처럼 남아 있던 울음을 뚝 그쳤다. 복수라고? 영화도 아니고 그런 게 인생에서 가능할까. 무엇보다 김나진의 인생에 복수라는 키워드가 등장할 수 있을까? 나진이는 착해. 우리 착한 나진이. 나진이는 멍청해. 우리 멍청한 나진이. 환청처럼 들리는 돌림노래가 나진을 괴롭혔다.- --- p.92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복수를 하지, 다혜야? 나진은 마음속으로 물으며 다혜가 밥 위에 얹어 준 계란말이를 순순히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냉이를 듬뿍 넣은 된장국도 떠먹었다. 이사를 와서 가장 크게 변한 점이 있다면 매끼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다는 거였다. 귀가하는 다혜의 손에는 항상 찬거리가 들려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시장이 있다고 했다. 동굴 밖에 잘 차려진 밥상을 놓아두고서 기다리는 다혜가 나진은 신기하면서도 곧잘 두려워졌다. 다혜가 무슨 이유로 나진과 함께 사는지를 여전히 몰랐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다혜가 등장한 타이밍은 절묘했다. --- p.9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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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사람’의 속내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고치셨어요?” 15년 만에 등장한 다혜가 나진과의 첫 만남에서 건넨 말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다혜를 얼결에 집 안에 들이고 출근한 나진은 회사에서도 내내 해도 소용없을 고민에 빠져 있다. 다혜를 내쫓지 않고 집에 들인 게 정말 잘한 결정인지 아닌지. 그로부터 나진은 까마득히 잊었던 다혜와의 과거를 떠올린다. 기억이 하나둘 선명히 떠오를 때마다 분노가 차오른다. 그때 내가 너에게 베푼 호의가 적지 않았는데. 아무도 너에게 베풀지 않은 호의였는데. 나진은 다혜가 고마운 줄도 모르고 더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려 찾아온 것만 같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는 속담처럼. 그렇게 분노하는 한편 나진은 마음 한쪽에서 점차 선명해지는 죄책감을 느낀다. 다혜에게 저질렀던 크고 작은 잘못들 그리고 이별의 순간이 선명히 떠올라 버린 나진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 그만 떠나 달라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룬다. · 이 시대의 이별 방식 ‘손절’ 나진이 거듭 돌아보는 과거에는 두 사람이 헤어진 마지막 순간, 이별의 장면이 있다. 그 이별은 양방의 설득과 기다림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성숙한 ‘완결’이 아닌 일방의 의지로 가차 없이 행해진 단호한 ‘손절’의 방식이었다. ‘손절’이 주식에서 유래한 신조어인 것처럼 관계의 ‘손절’에도 그런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 투자한 것, 되찾을 수 없는 것, 더는 잃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손익 계산과 판단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서수는 『우리 착한 나진』을 통해 이별을 결심하는 마음속 분주히 떠올랐다 사라지는 이해타산의 공식들을 가감 없이 꺼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별로 끝나지 않는 기억과 의지대로 바꿀 수 없는 감정을 섬세하게 그리며 손익의 공식을 벗어난 관계의 새로운 면면을 찾아 우리 앞에 펼쳐 보여 준다. · 호의를 베푸는 위치 나진에게 호의는 관계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나진은 그 힘을 잃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해 왔다. 받은 만큼 돌려주고, 손해를 볼 것 같을 땐 작은 호의를 내어 주고 조용히 떠나기. 누구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도록 골고루 친절하기. 그랬던 나진의 처지가 한순간에 달라진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며 일상의 기반이 무너진 것이다. 전 재산을 현금으로 넣은 전세 계약은 사기로 밝혀지고, 직장에서는 해명할 수도 없는 괴소문에 휘말린다. 잘못도 없이 추궁당하고 벌을 받는 듯한 상황의 연속. 한계에 내몰린 나진은 꼭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놓아 버린다. 그렇게 집도, 직장도 허무하리만큼 쉽게 사라진 나진은 혼자가 된다. 누군가의 대가 없는 호의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그 순간 다혜가 손을 내민다. 속내를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이상한, 기댈 수 없을 만큼 불안한, 그래서 내내 위태롭고 위험하게만 느껴졌던 사람, 다혜가. · 대가 없는 돌봄이 가능할까? 다혜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나날. 나진은 다혜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때때로 마음 한구석에 선득한 경계심도 인다. 왜 이렇게 잘해 주지? 나한테 대체 뭘 바라는 거지? 이 돌봄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선의라고 쉽게 믿을 수가 없었던 나진은 다혜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관점으로 과거를 돌아본다. 그때 내가 다혜에게 베풀었다고 믿었던 선의는 뭐였지? 대가가 있었나? 그 선의가 진짜였는지, 과연 일방적인 것이었는지 되묻는다. 그렇게 나진은 자신의 처지와 관계를 한꺼번에 돌아보게 된다. 돌봄을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기를 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짐을 떠넘기는 사람과 짊어지는 사람. 그런 이분법적 구분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워져 갈 때 마침내 다혜의 진짜 속내가 드러난다. · 그 이름처럼 선명한 ‘이서수 월드’ ‘젊은 근희의 행진’, ‘마은의 가게’, ‘미조의 시대’에 이어 ‘우리 착한 나진’까지. 인물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제목들처럼 이서수의 소설은 그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여 줄 듯한 인물들, 그들과 실제로 함께 발 딛고 서 있는 듯한 현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느끼고 경험하지 않으면 소설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한 이서수 소설가의 말처럼 이번 소설 『우리 착한 나진』에도 우리를 속절없이 몰입하게 하는 구체적인 실감으로 가득하다. 나진의 처지에 따라 변화하는 동네와 방, 그 속에서 시시각각 변해 가는 인물들의 내면은 물론, 크고 작은 중대 범죄 현장까지도 지금 목격하는 듯 생생히 전개된다. 이서수만의 섬세함과 세밀함, 그리고 치밀함으로 완성한 입체적인 세계 속에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온도와 무게, 공기에 밴 날카로움과 텁텁함까지 전해지는 구체적 생활감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삶을 조금 달리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자세히 거듭 돌아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던 미묘함과 복잡함을, 그 신비로움을. · ‘추천의 글’에서 복수심과 죄책감을 매개로 이어지는 진실 게임. 혹은 선의와 악의가 혼재된 기묘한 여성 연대. 『우리 착한 나진』은 지금껏 만나 왔던 이서수의 소설 중 가장 높은 가독성을 선사한다. (……) 이서수는 불운과 악연의 협공으로 파인 동굴 속 어둠을 묵직한 질문들로 그려 내는 한편 겁 많은 강아지의 눈을 들여다보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떠도는 식탁 앞에 마주 앉는 생활감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 여정 끝에서 어느새 나진의 손끝에 와 닿는 빛줄기를 우리는 함께 느낄 수 있다. 삶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빛의 형태와 질감까지 고스란히. - 은모든(소설가) 이서수의 소설은 선을 베풀 수 있는 위치 역시 누군가에겐 노력해도 누릴 수 없는 꿈같은 자리임을 직시하게 한다. 따분하다 싶게 익숙한 악행과 자잘하게 서로를 죽이는 거짓이 이어지는 지리멸렬한 세계를 송곳으로 아프게 새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수가 각인하려는 것은 살아 내는 이야기인 듯하다. 가까스로 착하게 되는, 착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의 생존기 말이다. 이서수는 혼란 속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절망 섞인 고요함을 쓰다듬으며, 옅은 숨으로 빌어 준다. 잔혹한 복수(復讐)를 꿈꾸기보다 구덩이로 내쳐진 우리가 복수(複數)임을 알아보기를. 애써 지켜 낸 선의가 세계의 민낯보다 언제나 덜 추하다는 진실을 간직하기를. 구멍을 메울 수는 없어도 빈틈없는 포옹엔 주저함이 없기를. - 성현아(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