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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알렉산드리아
매화나무의 인과 쥘부채 패자의 관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 작품해설 (조남현) 작가연보 |
李炳注, 호: 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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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가 중앙문단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월간 『세대』지 1965년 6월호에 「소설·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그 이후 1992년 타계하기 까지의 27년동안 그는 거의 초인적인 집필활동으로 우리 문학사에 굵고 깊은 궤적을 남기고 갔다.
월간 『세대』지의 편집장으로 그의 첫 작품 「소설·알렉산드리아」를 중앙문단에 소개했던 인연으로, 그리고 7년 뒤인 1972년부터는 장편 「지리산」을 장기연재했던 인연 등등으로 20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참으로 오랫동안 깊은 교분을 쌓아왔다. 내게 작가 이병주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오래전에 타계한 신동문辛東門시인이었다. "내가 잘 아는 어느 전직 언론인이 5·16으로 잡혀가 한 3년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옥중기 비슷한 소설을 썼다는데 한번 보겠느냐"고 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신동문시인은 『새벽』잡지 편집장이던 시절부터 이병주와 교분이 있어왔던 처지였다. 4·19혁명 이후 5·16 이전까지 온 나라가 백가쟁명百家爭鳴식 언론자유가 넘쳐나던 시절 이병주는 『새벽』지에 그 유명한 "우리에겐 조국이 없다. 다만 산하가 있을 뿐이다"라는 문제의 구절이 든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이병주는 신동문에게 작가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의논했던 것이다. 이미 40대 중반의 나이에 비록 지방신문이긴 하지만 그 지역의 대표적인 신문의 편집국장과 주필까지 지낸 처지에 신춘문예에 응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월간 문예지의 추천을 기웃거릴 수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써놓은 「소설·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고 그것을 계기로 중앙문단에 소설가로 활동할 길이 없겠는가를 신동문시인과 상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은 신춘문예나 문학잡지의 추천을 거치지 않고도 소설가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길이 널리 열려 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소설가나 시인으로 작품활동을 하자면 반드시 권위 있는 등용문을 거쳐야 하던 시절이었다. 신동문시인이 「소설·알렉산드리아」를 내밀면서 아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것도 정식 등용문을 거치지 않은 사람의 작품을 그것도 2백자 원고지 5백장이 넘는 소설을 실어달라는 것이 너무 무리한 부탁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언제 시간날 때 한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원고를 받아놓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몇차례 재촉을 받고서야 겨우 원고를 손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생각과는 달리 원고뭉치를 손에 들자 한번도 쉬지않고 5백장이 넘는 소설을 독파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멍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화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가 있었던가 하는 감동에다 무엇보다 한번 독자의 시선을 잡으면 끝까지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놀라운 흡인력 때문이었다. 몇달에 걸쳐서 분재分載해도 괜찮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미리 준비했던 다른 소설들을 다음 달로 미루고 500장이 넘는 작품을 한꺼번에 싣기로 했다. 잡지래야 겨우 3백50여 페이지 안팎이었던 시절, 중편소설을 한꺼번에 싣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소설·알렉산드리아」가 발표되자 그 반응은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운운할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신문의 월평난은 온통 새로 등장한 작가 이병주의 얘기로 도배했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닐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신춘문예나 문학지의 추천을 거치지 않았다는 작가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소설·알렉산드리아」 한 편으로 깨끗이 해소되었다. - 작품해설 가운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