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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샌드 드로잉 - 11 손을 새기다 - 13 우드버닝 - 15 개미지옥 - 17 큐브 인간 - 19 굿즈의 조각들 - 21 감천마을 - 23 줍깅 - 25 재부팅 - 27 갓생 아닌 바깥생 - 29 블랙카페 - 31 플라스틱 감정 - 33 내가 아니면서 네가 - 35 Enter - 37 제2부 거문개똥거미 - 41 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 43 샘플 - 45 물류센터 - 47 모빌 - 49 캐리어 - 51 넝쿨이 되어 - 53 이어폰 룸서비스 - 55 파티션 놀이 - 57 페인팅의 기술 - 59 차단기 - 61 마우스 - 63 편측무시증후군 - 65 당근마켓 - 67 제3부 카트의 물집들 - 71 교차로 - 72 화분 - 74 결핍의 습성 - 76 실크 벽지 - 78 양파 - 80 도서관 - 82 규화목 - 84 모든 웃음에는 끈이 달려 있다 - 86 스몸비 - 88 행궁동 후레쉬 - 90 버려진 상자 - 92 점핑 - 94 기억의 혈거시대 - 96 제4부 경계를 지우다 - 101 검정과 감정 사이 - 103 도어락 - 105 아날로그의 선고 - 107 콜포비아 - 109 멀티탭처럼 - 111 소금 놀이터 - 113 369증후군 - 115 리폼 도시 - 117 낙서와 망각이 서식하는 골목 - 119 딥페이크 - 121 클레이 - 123 마스크의 복화술 - 125 바위의 발 - 127 해설 권성훈 인류세의 문법과 포스트 증언록 -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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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 드로잉
한 아이가 모자를 눌러쓴 채 그림을 그린다 레고 계단이 놓여지고 미끄럼틀 사이로 회색 구름이 걸쳐진다 다른 아이들은 없고 아이 하나 남아 모래 위의 뭉개진 얼굴을 다시 그리고 또 그린다 귀가 유난히 큰 얼굴 그림 속 아이는 아이 얼굴을 닮지 않았다 너는 토끼를 좋아하는구나 내가 물으면 이건 블랙홀이야 불안한 눈빛, 하지 못했던 말들이 내 입안에서 맴돈다 여섯 살이 가진 블랙홀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아이가 우주를 짊어지고 빠져나올 수 있을까? 놀이터에는 아이 하나만 있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안현미의 「실내악(室內樂)」. ■ 우드버닝 밑그림을 그린다 버닝 펜이 바닥에 닿는 순간 타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직선과 곡선에 의해 결을 따라 미세한 도안이 도드라지고 윤곽도 진해진다 리듬을 타는 힘점 움직이면 가늘어지고 멈추면 굵게 번지는 음양의 모서리 그 위에 숨결을 덧입힌다 나무가 일으켜 세운 대상은 지금 이 순간 나의 기분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서 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기다림에 설렘과 깊이를 처음으로 알던 그날 나는 열 시간 동안 한 자세였다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빗방울을 더 많이 추가한다 흔적이 겹쳐지듯 흐려질수록 또렷하게 보이는 눈동자에 서린 깊은 안쪽을 들여다본다 엇갈린 틈 사이로 스며든 겹겹의 시간들 여전히 한 방향뿐인 나를 흔들어 깨운다 ■ 큐브 인간 사각의 면을 돌린다 그림자가 접혀 있다 기울어진 모서리 문을 밀고 들어간 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빌딩 속에 갇힌다 누군가 입구를 만들어 줘야 빠져나올 수 있다 서로 회전하듯 빌딩 속 빌딩이 겹쳐지고 퍼즐 속 퍼즐들이 시간을 밀고 당긴다 444 큐브 공식은 쉽지만 칸칸마다 미궁 속이라서 나는 나를 잊은 채 한 달 내내 빌딩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 허공을 민다 여백으로 민다 기하학적 무늬들이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온다 모서리 근육이 되살아난다 빌딩 속 얼굴들이 서로 밀고 당긴 엇갈린 조각들로 조각 속에 갇혀 있다 규격화된 얼굴들이 낯설다 직선에서 직선으로 곡선에서 직선으로 앞만 바라보며 달려간다 달리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머릿속 수많은 공식들이 뒤죽박죽이다 너무 많은 내 안의 내가 열리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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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자두나무 잎들이 올해는 유난히 붉다 기웃거리던 하루가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사월 그리고 폭우가 지나가는 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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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은 시인의 첫 시집을 읽는 내내 심미안이 꿈틀댔다. 언술로부터 번져 나오는 미학적 울림이 오래오래 머물렀다. 대다수 시에서 감지된 전달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예민하고 따뜻한 시선 + 화자가 참여한(관찰한) 정황’ → ‘시상의 확장 + 낯설게 하기’ → ‘본질성 암시 + 미학적 여운’ 이렇게 세 단계의 체계를 갖게 됨으로써 최경은은 대상에 대한 성급한 규정이나 관습적 태도를 지양하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존재의 내적 의미를 포착하여 현존을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손을 새기다」에서 화자는 “점토에 손바닥을 대고 힘껏” 누르는 정황을 통해 “흔들리지 않으려 무리하게 잡았다” 놓았던 “수많은 손들”을 떠올리며 시상을 확장한다. 그리하여 손과 손이 만났을 때의 관계적 맥락과 본질적 의미를 도출한다. “악수란 부서질 수도/빚을 수도 있는 경계 어디쯤”이 되는데, “한쪽이 악력을 가하면/부푼 마음도 잠시/아무도 모르게” 관계의 균열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손의 관계란 삶의 관계를 함축한 표상이다. “바깥이 바깥을 만나는 일”이지만 곧바로 “안쪽의 일”로 귀결됨을 시인은 간파한다. 그런데 최경은은 형상화를 할 때 대상에 대한 예리한 시선과 더불어 항상 따뜻한 시선을 동반시킨다. ‘균열’을 결코 부정적인 요인으로만 언술하지 않고, 그것마저도 현존을 구성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안쪽으로 들어온 손의 ‘결들’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간다. 최경은 시의 또 다른 매력은 스펀지와 같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티브로 잡히는 순간, 철저하게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 호흡하고 감각하면서 서정시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동일화를 빼어나게 이루어 낸다. 「우드버닝」 「개미지옥」 「큐브 인간」 「재부팅」 「플라스틱 감정」 「모빌」 「캐리어」 「넝쿨이 되어」 등 시집 속의 수많은 시들이 그러한 매력을 품고 있는데, 읽는 내내 독자들은 실감과 공감이 동반된 심상의 파노라마를 흡족하게 만나게 될 것이다. - 하린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