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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카이브 지금 007
2장 움직여! 061 3장 두두 187 발문 284 작가의 말 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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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은 삶에 단순하고 가뿐한 태도로 임하고자 했다. 그럼 몰아치는 삶의 파도 위에서도 마치 잔잔한 강 위 나룻배에 앉은 듯, 때때로 생활은 궁핍할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그리 지낼 수 있었다.
---p.21 삶을 하루하루 살아나간다는 것은 이런저런 기색의 입자들을 와구와구 먹어버리거나, 피해 가거나, 손가락 끝으로 퐁 터트리고 말거나, 한 알 한 알 조심히 모아 주머니에 넣어두거나, 다른 기색의 입자들과 알맞게 섞어 칵테일을 만들거나. 그 결정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겠다. ---p.68 기정은 그가 몇 년 전 직접 재배한 바나나를 트럭에 가득 싣고 유유히 경매장에 등장했듯이 이번엔 그것이 이 검붉고 맛없는 과일이 되기를 자연스레 바라게 되었다. 이것은 환풍기를 쪼여 억지로 불러낸 인공 마음이 아니라 어디선가 푹 하고 솟아난 자연 마음이었다. ---p.103 이야기는 늘 흐르는 법이다. 비어버린 자리를 다른 이야기가 메꾸면서 계속. 이야기끼리 엉키고 뒤섞이고 잡아먹고 잡아먹히기도 하지만 결국 흐른다는 점에서 모든 이야기는 같다. ---p.104~105 각오란 발휘되기 전까지는 그 힘의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발휘될 순간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당신의 각오였다네! 나의 몸은 이만큼이나 커다랗다네! 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었다. ---p.110 문종일의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치달았다. 남은 생 동안 문종일은 이번 여름을 수없이 되새기며 미소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엔 김장숙 씨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이야기의 끝에 서서 아득히 멀어진 초입 방향을 바라보노라면 이것은 가발 없인 시작되지 않았을, 그리하여 끝나지도 못했을 스토리였다. ---p.2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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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키고 뒤섞이고 잡아먹고 잡아먹혀도
계속해서 빈자리를 메꾸며 흘러가는…… 향주의 한 세무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기정은 언제나 “삶에 단순하고 가뿐한 태도로 임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의 주 업무는 세무사 ‘문종일’을 위해 세무사무소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를 스크랩하여 모아두는 것. 대형 사건 사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작지만 묵직한, 밀도 높은 기사”를 스크랩하는 기정은 신문 위 글자가 말하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렇게 “감정사가 된 기분”으로 기사를 살피던 기정의 눈에 한 가지 기사가 들어온다. 두 농장의 살구나무 80여 그루가 밑동만 남긴 채 말끔히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거의 감겨가던 기정의 눈길을 문득 사로잡는 기사가 있었다. 살구나무 도둑에 관한 기사였다. 기사는 문장마다 물음표를 남겼는데, 이전 문단에서 생긴 물음표는 다음 문단에서 바로 소거됨과 동시에 또 다른 물음표가 뒤이어 얼굴을 내밀었다. 좋은 기사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52쪽) 기정은 이 기사-이야기를 자신의 친구 선열에게 들려주기로 결심한다. 우연한 몇 번의 마주침 끝에 친구가 된 부자 할머니인 선열은 기정과 만날 때마다 손에 용돈 봉투를 쥐여준다. 평생 쓰고도 남을 만한 돈을 가진 그가 무슨 이유로 이곳 향주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일까. 한편, 살구나무 도난 사건의 당사자인 ‘박정김’ 역시 이름만큼이나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향주에서 한차례 열풍이 지나간 접합과일을 고집스레 키우고 있는 과수원 주인. 그 역시 “재밌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들과 가까워질수록, 사건의 진상을 파헤칠수록 기정의 호기심은 커져만 간다. 과수원에 들어서자마자 본래 캐물으려던 이야기는 빼곡한 나무 사이로 숨어버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무와 나무의 접합에 관한 이야기가. 아리송한 맛의 열매에 대한 이야기가. (104쪽) 향주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일들의 실체는 술래잡기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기정의 삶 속으로 계속 틈입하는 다른 이들의 삶-이야기. 선열이 향주로 숨어들어야만 했던 이유와 그 후의 결심, 박정김이 접합과일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키우게 된 원인, 호주에 사는 단 하나뿐인 친구 ‘재영’이 말해주는 낯선 사람의 이야기를 기정은 계속해서 먹어 치운다. 기정이 보고 듣고 겪고 소화한 그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어디로 향하게 되는 것일까. 기정이 아아, 내게도 긴긴 이야기의 첫 장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깨닫자 신문에서 읽던 장면, 눈앞에서 목격한 장면, 매일 반복되어 이제는 지루해진 장면, 당신에게는 특별하겠으나 다른 이들에겐 그저 단신 기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면들이 작은 봉분 아래 엎드려 절했다. (240~241쪽)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겹쳐지며 탄생하는 단 하나의 초접합-이야기 『살구 농원 술래잡기』에서 이야기를 소비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자주 식욕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기정이 “장수일보”에서 “고구마 요리 효능 기사”를 읽는 것은 곧 그가 고구마맛탕을 먹으러 가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문종일과 선열과의 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것은 가마솥밥과 살구나무 도난과 관련된 기사이다. 박정김을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은 그의 이름 없는 접합과일을 맛보면서부터 시작되며, 심지어는 그의 초접합과일 ‘두두’를 먹고 뒤이어 사람의 일부를 베어 물면 그 사람의 마음을 곧장 획득할 수 있다. 이처럼 두 가지 욕구가 끊임없이 등치되며 소설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어쩌면 사람의 삼대 욕구 이외에 중요한 또 한 가지 욕구는 이야기하기/되기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보면 (……) 무언가 이야기 비슷한 것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세계는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곳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들은 한데 모였다 흩어지고 재생성되는 식으로 순환한다. 그렇게 뭉친 한 이야기의 결말을 꼭꼭 씹어 소화하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음 이야기를 향해 한 발짝 내디딜 수 있게 된다. 문종일이 어느 순간 푹 빠져 그 밖의 것은 모두 놓아버리다시피 한 나무 도둑 이야기는 이렇게 한 땀 더 길어졌다. 기정이 새로 떠낸 코를 이어받은 문종일과 김장숙은 한동안 또 새로운 갈래의 뜨개질을 이어나갈 것이다. (18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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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주어지는 특권 가운데 하나는 캐릭터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캐릭터 자신에게는―그리고 우리 독자들에게도―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능력. 드물게도 그런 능력이 캐릭터에게 허락되는 이야기가 있다. (……) 《살구 농원 술래잡기》는 어떻게 보면 바로 그런 드문 이야기 중 하나이다. 정기현의 작품은, 이야기가 허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속하는 한에서, 세상을 달리 보게 해주었다. - 이성민 (철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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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이유를 붙이고자 한다면 붙일 수도 있겠지만, 알맞다고 생각한 이유를 붙이자마자 이야기는 한 발 뒤로 물러나 나를 빤히 쏘아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이건 내 거 아니야, 너 가져. 《살구 농원 술래잡기》를 읽을 때도 그랬다. 기정은 세무사무소에 드리운 햇볕을 따뜻한 천처럼 덮을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이의 사정을 헤아려보려고 하다가도, 그것은 다른 이의 사정이므로 자신이 헤아릴 수 없음을 인정할 줄 아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쫄깃한 몸을 한입 베어먹어 그 속에 연루되어보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런 기정이 선열과 문종일과 두두 그리고 박정김과의 시간을 있는 힘껏 통과하고 “그제야 울고 싶어졌다”라고 느낄 때, 나는 처음으로 되돌아가 미용실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 기정을 떠올리며 어쩐지 무척 그리운 마음이었다. 쌓인 돈과 남겨진 발목, 향주의 살구나무 냄새. 이제 이야기에서 벌어진 일들과 삶에서 벌어질 일들 사이를 오가며 스스로 몸을 움직여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하여?” 당신을 살게 하기 위하여. - 김채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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