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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말 - 조선 사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성호사설!
|제1부| 《성호사설》을 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다섯 가지 1. 이익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이익은 어떤 세상에서 살았나? 3. 퇴계와 율곡 사이에서 4. 경세치용의 실학을 열다 5. 《성호사설》의 경위와 내용 |제2부| 실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1장 천지문 - 천문과 지리 이야기 2장 만물문 - 세상 만물 이야기 3장 인사문 - 사람과 사회에 이야기 4장 경사문 - 고전과 역사 이야기 5장 시문문 - 시와 문장 이야기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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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는 조상 때부터 재산으로 물려받은 논밭과 노비가 있었습니다. 먹고 사는 데 큰 걱정은 없었지요. 하지만 성호는 논밭을 큰집에 맡기고 필요한 양식만 구해다 먹었습니다. 노비는 종갓집으로 보내 버렸어요.
성호는 노동을 게을리하면서 양식을 축내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가난을 자초하여 힘겨운 생활을 꾸려 나갔습니다. 자신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이 몸에 배인 성호는 새 옷을 입으면 불편해하고, 고기보다는 나물 반찬을 즐겨 먹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가르침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성호의 타고난 천성이 그러했지요. 성호는 천한 노비에게도 나쁜 말을 쓰지 않았을뿐더러 큰소리를 지르지 않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성품을 본받아 바르게 말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호의 말년은 그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나이를 먹어 기력이 떨어진데다 외아들 맹휴마저 병이 있어 늘 시름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결국 맹휴는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 후 성호 역시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힘든 세월을 보내게 됐지요. 그의 나이 83세 되던 해, 조정에서는 노인을 우대하는 예를 베풀어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성호는 늦은 벼슬길에 올라 1년도 버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정에서는 그가 죽은 후, 그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 시대의 으뜸 벼슬인 이조 판서에 추서하였습니다. - 1부 <소박하고 검소한 성품> 중… 나라의 임금이 백성들을 보살피며 살고 계신 곳이 어디인가? 바로 조정이다. 임금께서는 조정 대신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여 중요한 소식을 전국에 내려보낸다. 그 명령은 달리는 말과 같아서 삽시간에 방방곡곡에 퍼져 나간다. 이처럼 임금이 나라의 중심에 서 있듯이 백두산도 나라의 우두머리 산이라 할 수 있다. 백두산 철령으로부터 뻗는 산맥들은 모두 동남쪽으로 뻗고,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 하늘 높이 치솟는다. 이 두 산의 등줄기는 다시 남서쪽을 향해 여러 줄기로 갈려 나가다 지리산에 이르러 웅대한 끝을 맺는다. 전부터 이 산맥을 통틀어 ‘백두대간’이라고 불렀는데, 과연 그 뜻을 헤아릴 수 있겠다. 백두대간 중에 지형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지방이 있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맥은 태백의 봉우리들을 타고 소백산의 줄기를 따라 영남 지방을 좌우로 싸고돈다. 그 형세는 버들가지가 늘어진 모양이다. 버들가지는 풍수가들이 말할 때 명당에 속한다. 풍수가들은 ‘오동나무 잎에는 반 쪽짜리 씨가 달리고, 버들가지 끝에는 열매가 달린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따라서 영남은 백두대간의 열매라 할 수 있고, 그 열매의 중심에 유교의 본 고장이 자리 잡은 것은 의미가 있다. 영남은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아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는 곳이다. 그 중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이 유명하다. 이황은 영남의 북쪽에서 ‘도’를 다스렸고, 조식은 남쪽에서 ‘의’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두 인물의 학풍을 이어받은 제자들 또한 고귀한 인품과 지조 높은 절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예와 겸손을 갖추고 학문을 닦는 데 열과 성의를 다한다. 달리 보면 임금님의 부르심에 대비하여 정진하는 모습이다. 그러니 조정에서는 그 지역 출신들을 멀리하고 다른 곳에서 인재를 구하려 했겠는가? 앞으로도 나라가 위태로운 국면을 당했을 때, 충절을 지키고 나라를 구할 인물들이 그 고장에서 나오리라. - 2부 천지문 <백두대간> 중… 병기는 모름지기 사용하기 편리하고 날카로움이 있어야 한다. 칼, 갑옷, 창, 활, 화살, 수레 할 것 없이 용도에 맞게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부족하게 되면 적에게 목숨을 내 놓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주례》에 병기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어 놓은 내용이 있다. 같은 병기라도 재료의 종류, 크기, 무게, 효율성 등을 따져 좋은 것을 가려 놓았다. 그럼에도 좋은 병기를 실제로 사용하는데, 혹시 단점이 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더 나은 병기를 만들어 낼 수 있기에 신중을 가한 것이다. 헌데, 지금 우리 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무기 창고에 쌓아 둔 병기들은 하나같이 쓸 만한 것들이 없다. 녹이 슨 것은 물론이고, 망가진 것조차 수리가 되어 있지 않다. 화살을 일례로 들어 보겠다. 활은 멀리 있는 적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는 훌륭한 병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살이 날카로워야 하는데, 우리 나라 화살은 그렇지 못하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각 고을 백성들에게 활쏘기 연습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촉이 없는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어 사용해서 좋은 대나무만 허비하고 있다. ‘유엽시’는 대나무 껍질을 벗겨 내고 만든 화살이다. 그래서 비나 이슬을 맞게 되면 상하게 되어 오래 쓰지 못한다. 군인들은 ‘호창’이라 불리는 화살을 사용하는데, 독수리 날개깃을 달아 꾸민 것이다. 호창은 보통 화살보다 10배나 더 비싸면서도 1백 보를 날아가지 못한다. 화살은 깃이 많이 달려 있을수록 더디게 날아가고, 적을수록 빠르게 날아가는 법이다. 어쩌자고 제 기능도 못하는 화살을 만들어 귀한 돈을 허비하는지 모르겠다. 화살을 만들 때에는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가리어 보급시켜야 한다. 또한 병기 만드는 법을 표준화시켜서 쓸모 없는 병기는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켜야 할 것이다. - 2부 만물문 <무기> 중… 무릇 과거 시험이란 나라에서 인재를 등용시키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그런데 최근의 모습을 보면 과거가 인재를 뽑기 위한 제도인지 의심스럽다. 나라에는 내직과 외직은 한정되어 있는데, 과거 때마다 뽑는 인원은 그 수를 훨씬 초과한다. 식년시마다 문과에서 뽑는 인원만 33명이다. 거기다 비정시로 치러지는 과거까지 합하면 무려 1백 명이 넘는 문과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벼슬길에 올랐다가 물러나는 기간을 30년으로 잡으면, 30년 동안 무려 2천 330명이나 배출되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모두 등용시킬 만한 자리가 없다. 생원과 진사과에는 각각 1백 명씩 무더기로 뽑는다. 그래서 생원과 진사로 늙어 죽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은 당장에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관직이 아니지만, 너무 많은 합격자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폐해가 생겨났다. 동네마다 선비입네 하고 뒷짐지고 다니는 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평소 때 같으면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었어야 할 자들이다. 재력이 있는 진사들은 요직을 제외하고 난 나머지 벼슬이라도 얻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든 뇌물을 주어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 방법은 잘 먹혀서 진사 딱지를 뗀 사람들이 제법 많다. 그러니 올바른 인재가 골고루 등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가? 그들은 기본적으로 선비로서의 본분을 잃은 자들이다. 그렇다고 그들만을 탓할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합격자들은 부득이 경쟁을 통하여 살아남아야 하는데, 여기서 붕당으로 갈라져 난장판이 되고 만다. 힘이 비슷하면 다투게 되고, 지위가 위태로워지면 뺏으려고 하는 법이다. 좁은 구멍 하나를 놓고 대여섯 마리의 뱀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려는 꼴이니 어쩌겠는가? 파벌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무과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예부터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의 젊은이들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집집마다 무과에 합격한 장정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라에서는 그들을 등용시키지 않아 무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대부분 원통해하며 분개하다가 일생을 마치기 일쑤이다. 사람을 뽑아 놓고 발탁하지 않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나라에서 인재를 구할 때는 처음부터 꼭 필요한 인원만 뽑았어야 옳았다. 그것이 물 건너 간 일이라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개인의 능력을 검증하여 차례차례 임용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발탁자들의 원망을 다소나마 줄여 줄 수 있을 것이다. - 2부 인사문 <인재등용> 중…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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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의 위대한 책, 《성호사설》
《성호 사설》은 이익의 실학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학문을 현실에 이용하려는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선비답게 조용히 입을 다물고 학문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해서 당당히 비판할 줄 아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 기술이 앞서 있음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한 점도 당시로서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책으로 펴내고자 쓴 것이 아니므로 다소 체계적이지 못하고, 화폐를 폐지해야 한다는 등 시대적 흐름을 잘못 읽은 주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 시대의 실학적 성과를 집대성하여 후배들에게 전파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호사설》은 큰 물을 담고 있는 하나의 호수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즉 유형원 이후 발전되어 온 실학이 그의 《성호사설》에 이르러 모두 통합되었다가, 그 뒤 각 분야의 전문 학자들에 의해 더욱 분화되어 깊이 연구된 것이랍니다. * 경세치용학파의 큰 나무, 성호 이익 이익은 아버지 이하진의 유배지였던 운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허약하여 어머니는 이익에게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서당에 다닐 때 이익은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지요. 어린 이익은 맑은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를 관찰하기도 하고, 바닷가 갯벌로 나가 조개와 게를 잡기도 하면서 놀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산과 강과 바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해 하나하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익은 열 살 무렵부터 글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즈음 함께 놀던 친구가 글을 줄줄 읽을 뿐 아니라 오언시까지 짓는 것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익은 둘째 형인 이잠에게 글을 배웠습니다. 이익과 이잠은 나이 차이가 무려 20살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이잠은 남인들이 실권을 잃은 후 벼슬을 포기하고, 집안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익은 일단 글을 깨우치게 되자 스스로 분발하여 하루 종일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습니다. 성품도 온화하여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을 쳐도 묵묵히 글에만 전념했습니다. 비록 뒤늦게 글공부를 시작했지만, 남달리 총명한데다 책을 좋아하는 까닭에 다른 아이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빨랐습니다. 이익은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수많은 책들을 부지런히 읽고 옛 성현들의 글을 줄줄 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시들도 많이 지어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지요. 학업에 열중하던 이익은 25세 되던 1705년에 조정에서 열리는 과거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조의 이름을 쓰는 것이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다가 이익의 집안에 또다시 불행한 일이 겹쳤습니다. 이듬해인 1706년, 둘째형 이잠이 조정에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이잠은 곤장을 맞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익은 이 때부터 아예 벼슬에 오르겠다는 꿈을 접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셋째형 이서나 사촌형 이진과 더불어 조용히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는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사회 제도를 개선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나름대로 정리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성호사설》은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증적인 그의 학문은 당대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이익이 정치적으로 불운한 운명에 놓여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의 실증적인 학문은 훗날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 실학자의 눈으로 본 조선 사회 이야기, 《성호사설》 《성호사설》은 이익이 처음부터 책으로 펴내기 위해 집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익은 평소에 책을 읽거나 어떤 현상을 보고 들은 것들, 그리고 제자들과 대화한 내용 등을 그때 그때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기록이 40년 정도 쌓이다 보니 어느덧 그 양이 방대해져, 80세 무렵이 되었을 때부터 조카들로 하여금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제자 안정복이 간추려 30권 30책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성호사설》에서 ‘사설’이라는 말은 이익이 스스로 붙인 제목으로, 자신의 글을 겸손하게 낮추어 ‘자질구레한 글’, ‘변변치 못한 글’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백과사전과도 같이 3천 가지가 넘는 항목이 천지문,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 등 다섯 가지 주제별로 담겨 있습니다. 천지문은 모두 223항으로 대부분 천문과 지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성호 이익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동양의 천문학은 물론 서양의 천문학에 대해서도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지문에는 지리에 관한 내용이 더 많은데, 그는 특히 우리 나라의 영토에 큰 관심을 가져 울릉도와 안시성·대마도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밖에도 천지문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 지구의 아래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태양의 궤도, 춘분, 일식을 비롯하여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역법 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386항목에 이르는 만물문에는 인간의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옷·음식·농사·가축·화초 및 화폐와 도량형, 병기 등에 관한 글들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갖가지 곤충과 동물·식물을 관찰하고 기록한 것도 담겨 있으며, 망원경·조총·자명종 등 당시 수입된 물품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악어와 가야금에 관한 기록, ‘남초’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담배 이야기도 관심을 끌며, 윷놀이와 장기·줄타기 등 민속놀이에 관한 것들도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주로 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들이 많이 있지요. 인사문에는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 학문과 사상, 인물과 사건 등을 폭넓게 서술한 990항목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노비 제도와 서얼 차별 제도를 없앨 것, 과거 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꿀 것, 고리대의 근원이 되는 화폐 제도를 폐지할 것 등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개혁적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경사문은 모두 1,048항으로 되어 있으며, 성호 이익의 경전과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탁월한 식견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사서 육경과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를 읽으면서 잘못 해석된 구체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붙여 놓았습니다. 특히 이 글들에서 그는 역사책이라는 것이 훗날 권력을 얻은 자들의 입장에서 씌어지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두 378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 시문문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대 문인들이 남긴 시문들에 대한 비평을 싣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보다는 중국 문인들의 시문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비평의 글들에서는 당시의 백성을 걱정하고 시대를 근심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