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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빗살 무늬 창문 글루미 선데이 오후의 신청곡 난민의 밤 도심 속 공터 목로주점 무덤을 걷다 문화센터 깃발의 고흐 백 개의 어둠 심야 버스에 내리는 비 심야 영화 유니콘 바텐더 은행나무와 무덤 사이 파파야 잎 하얀 나비 제2부 부둣가에 앉아 거리의 예술 기념품 가게 마술사 장 만남의 광장 베란다 식물원 산복도로 옥탑방 일기 우울한 팔월에 만나요 재개발지역 적산가옥 철로 변 여인숙 호포역 삽화 제3부 비의 배후 벽화 목련 그늘 작은 새 화분 속 제비꽃 피사체의 날들 시인, H 봄 졸음 봄날의 신기루 여름의 암호 가을 별자리 겨울 그림자 제4부 에스컬레이터 마루에 걸려있는 현판 모래언덕 요양병동 빈 둥지 오로라 우물이 있는 옛집 읽지 못한 편지 폐차장 텃밭 잔광 출입금지 해설-기억, 그리움, 애잔한 풍경을 위한 스케치 -정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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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신청곡
가로수 잎들이 총총히 발걸음을 적신다 줄곧 발밑을 헤치며 따라 오는 소리 걸음이 엉킨다 지난여름 아름드리 잎을 달았던 은행나무 굴곡 많은 날들을 감당할 수 없는 듯 잎들을 떨구고 있다 바로크식 음악이 넘쳐나는 낡은 카페 따끈한 차 한 잔을 주문한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 속으로 노랗게 떨어지는 가을 가느다란 현의 흐느낌이 옹이 진 고목의 가슴을 파고든다 나는 잠시 다른 세계에 갇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중세의 거리로 휩쓸려간다 어느새 악보 속 음표들이 흔들리고 구멍 난 잎들이 온통 거리를 구른다 처음 본 폐허의 도시에서 멈춰 선 일순간의 고요 혼신을 다한 연미복의 남자 액자 속 지휘봉을 내 던진다 --------------------------------------------- 난민의 밤 자신을 잊고 산 날들 앞에서 나는 가끔씩 발을 헛딛는다 근육량이 부족한 허리를 들고 소파에 기대어 본 TV 속의 화면 포화 속 우크라이나 난민들 어린 주검이 떠돌아다닌다 내 유년의 다섯 살 길 잃은 울음이 꿈속을 파고든다 파란 눈의 외국인 선교사 낯선 손길에 아이는 기겁하듯 자지러진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 울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고 한참을 칭얼대다 잦아드는 졸음이 끼무룩하다 목젖을 누르는 아이의 울음 화면 속 아이 눈이 그렁그렁하다 혼자 울다 넘어진 머리 위로 푸른 믈결이 일렁인다 아이는 간데없고 물살이 떠밀려 온다 창밖 그치지 않는 빗속 가로수에 매달린 불빛들이 도시의 멱살을 끌고 간다 빌딩 사이 흩어진 구름이 건물들을 지우고 거리를 지우고 사람들을 지운다 삐끗한 허리와 골반의 컴컴한 적막으로 나를 구겨 넣는 밤 서릿발 같은 통증에 누워 낡은 신음을 깨문다 --------------------------------------------- 도심 속 공터 신도시 무수한 빌딩들 사이 짧은 해가 기운다 어둠이 찾아드는 작은 공터 구원의 저녁으로 걸려있는 붉은 십자가 이제 막 단장을 마친 커피 하우스 화려한 불빛이 꼭대기 십자가로 숨어든다 예배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 공터에 하느님을 불러 앉혀 커피를 마신다 차가워지는 날씨에 은하들의 속삭임이 지척인 듯 귓전을 스치는 밤의 공터 고개를 떨군 남과 여 주머니 속 체온을 나누어 가졌던 생각들이 채 식기도 전 흔들리는 나뭇잎의 갈등을 바라본다 으스스 부는 찬바람의 작별이 어깨를 흔드는 그곳 언제부턴가 초점을 잃고 우두커니 유모차에 기댄 선 그녀 앳된 미혼모의 어두운 고요가 멈춰져 있다 빈 의자, 누군가 놓고 간 시집 노랗게 흩어지는 낙엽이 책갈피를 넘긴다 사람들이 온갖 비밀들을 나눠 가진 공터 가슴 바닥에 지닌 꿈이 깊어 서러움이 맴도는 그곳 떨어져 내린 몇 편의 시들이 그들의 발자국 아래로 휩쓸려 간다 ------------------------------------------------------------ 무덤을 걷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심의 공원묘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야기가 빗물처럼 흘러내리고 경계를 무너뜨린 나무들의 침묵이 어깨를 짓누른다 아무런 미동 없이 누워 잠들고 있겠지요 큰일을 당하고도 울지 못했던 당신 새삼 왜 비수처럼 파고드는지 지금에서야 당신의 헐린 가슴을 끌어안는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암울한 기억의 강물이 폐부를 파고들 듯 당신의 운구가 좁은 길을 돌아나갈 때 저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내뱉지 못한 신음을 삼켰다 시리도록 아팠던 내 몫의 날들이 무덤에서 걸어 나온다 느릿느릿 전생을 알리는 비의 냄새 --------------------------------------------------------------- 백 개의 어둠 막차가 떠나자 겨울이 왔다 한사람이 떠나고 남겨진 한 사람이 견뎌야 하는 시간 우리는 저녁이 붉게 가라앉는 도시를 걸으며 오래된 밥집에 이르러 서로의 허기를 달랜다 한동안 설레었고 한동안 울렁이는 날들이었다 노릇노릇 구워진 생선 앞에서 우리는 가슴을 다독인다 조금의 수다를 섞어 밥을 먹는 동안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골목 입을 헹구며 어둑한 골목을 나올 때 골목의 끝자락에서 사람들은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그곳을 나오며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바라본다 조금씩 흔들리는 길 위 서로가 내민 손의 예감이 무거워진다 애틋할수록 잊어야 할 것들이 많은 날들 앞에 고도를 낮춘 구름이 멀리 지나가는 주말을 지운다 눈 그친 사이 겨울이 완성되었고 불 꺼진 가로등 아래 나는 가끔 어둠의 깊이를 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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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해 다가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불면의 날들 만만치 않은 저 강물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2026. 10. 감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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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말 시인의 시집 『여름의 암호』(작가마을)가 발간됐다. 이번 시집 『여름의 암호』는 2014년 등단한 감정말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기연민과 부정 사이에 혼돈하는 화자를 그대로 투영시킨다. 지극히 개인사적인 서사이긴 하나 씻김굿을 하듯 과거를 통해 앞날을 예시하고자 하는 시인의 자의식이 담겨있다. 이러한 자의식은 지난날(삶)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심상이다. 또한 시인의 자의식에는 봄날의 신기루 같은 풍경과 우물이 있는 옛집이나 요양병동처럼 보다 구체적인 현실주의의 생활을 인지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감정말 시인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고자 하는 작품들을 이번 시집에 담고 있다. - 정훈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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