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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수록 짙어지는
최탁 저
걷는사람 2026.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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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오를수록 짙어지는
잔상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
변명을 숨기다
런다운
내가 없는 곳의 우리
나비와 불로초

해설
유령과의 계약서
―박인성(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저자 소개 1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에이티엔지니어링에 재직 중인 엔지니어다. 2022년 「변명을 숨기다」가 근로자문 학제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무영신인문학상, 한국아동문학신인상을 수상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1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130*200*30mm
ISBN13
9791175011205

책 속으로

남자가 미연을 향해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미연이 놀라며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나이키 로고가 미연
의 얼굴 앞에서 위아래로 크게 몇 번 출렁였다. 미연이 남자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목을 조여 오는 밧줄에 매달려 마치 시계추처럼 느리게 좌우로 흔들렸다. 남자는 여전히 미연을 붉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미연은 목을 맨 남자가 내려온 길을 향해 달렸다. 개울의 남자가 가르쳐 준 길을 선택했다. 물론 그 선택의 결과는 자신이 감당해야만 했다. 나무에 매달린 남자의 눈에서 뻗어 나오는 붉은 빛줄기가 미연의 등을 따라왔다. 붉은빛은 미연의 좌우로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마치 탈옥수를 비추는 탐조등같이. (「잔상」, 55쪽)

이담이 객실 모니터 화면의 ‘인터뷰’를 터치했다. 이담의 목소리가 상황실 스피커를 통해 전달됐다.
“거기 지금 누구누구 있어요? 강박, 구박, 호박 그리고 도박?”
내 이름은 도필재였다. 따라서 이담이 나를 도박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도박이라는 말이 가슴으로 쑥 들어왔다. 나는 지금 내 인생과 인류의 미래를 걸고 사상 초유의 도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도박의 묘미는 상대방이 제 꾀에 스스로 넘어가게 만드는 막판 기술에 있다. 마치 이 실험의 목적이 이담의 튜링 테스트만은 아닌 것처럼.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 85-86쪽)

“내 이름은 김진수다.”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찢어진 누비옷에 붉은 딱지를 만들어 볼품없는 형상을 한 조선 청년의 목소리
는 여전히 맑고 단단했다.
“빼어날 수(秀) 자를 쓰는가?”
“나무 수(樹) 자를 쓴다.”
청년은 한자를 알고 있었다. 역시 양반이나 중인의 자제였다.
“이츠키(樹), 자네와 같은 이름이군.”
내가 잠시 통역을 머뭇거리자, 장군이 빠짐없이 그대로 통역하라고 말했다. 이런 말까지 통역하라고 하는 장군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장군은 술좌석에서조차 농담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나와 청년의 이름을 엮어 던지는 말장난은 아니었다. (「변명을 숨기다」, 147쪽)

“작가의 수입만으로 생활할 자신이 없어 안정된 직장이 필요했다는 선생님 수필을 읽었어요. 그런데 수필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컨베이어는 물건을 옮기는 기계다. 소설은 작가의 의식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매체다. 나의 의식을 독자에게 어느 정도나 전달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죽기 전에 단 한 편이라도 그런 소설을 쓰는 게 나의 꿈이다.’ 이 글을 읽고 얼마나 감동했던지.”
‘내가? 정말 그런 글을 썼다고?’ 오석은 잠자코 혜진의 말을 듣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오석이 창을 바라보니 창틀에 잠자리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잠자리도 혜진의 말에 집중하는 눈빛이었다. (「런다운」, 195쪽)

그런 낯섦이 여자가 사라진 상황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묻는다면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자가 나타난 이후 단지 일부가 아닌 전체에 알 수 없는 어떤 변화가 분명히 생겼고, 다시 여자가 사라지자 세상은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불완전한 낯선 세상으로 변했다. 마치 새로운 숫자 하나가 입력돼 전체가 바뀐 엑셀 파일이, 그 숫자가 빈칸이 되면서 기존 파일도 아닌, 바뀐 파일도 아닌 망가진 엑셀 파일로 변한 것처럼. 숫자 하나가 전체 파일을 바꾸듯 사람 하나가 세상을 바꾼 느낌. 바로 그 낯섦이 여자의 부재를 의미했다. (「내가 없는 곳의 우리」, 233-234쪽)

남자가 알려 준 비밀번호를 누르자 대문이 열렸다. 건물 외형과는 달리 정원은 잘 관리돼 있었다. 일본의 오래된 정원같이 단아했지만, 비 오는 날 저녁의 연못은 형사의 기분을 더욱 가라앉게 했고 연못 주위의 수목들은 마치 침입자를 몰래 관찰하듯이 형사를 곁눈질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려한 실내 장식과 수많은 나비 그림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벽과 천장의 벽지 문양 역시 나비였는데 격자 패턴으로 무수한 나비가 배열됐다. 노란색의 나비들은 실물처럼 정교해 실내가 거대한 나비 표본실 같은 느낌이었다. 나비가 날갯짓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실제로 문양 속의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했다. 형사가 놀란 눈으로 나비를 주시하자 나비의 날갯짓이 멈췄다. 현실이었는지 환영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비와 불로초」, 270-271쪽)

출판사 리뷰

작가의 말

가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 거냐고 자문합니다. 저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그런 작품을 평생 한 편도 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첫 문장을 시작할 때, 마지막 문장을 마칠 때 다시 묻곤 합니다. 대답은 늘 “멀었어.”입니다. 게다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답은 간격이 더 넓습니다. 조금씩 좁혀 나갈 수만 있다면 가닿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멈추지 않겠습니다.

추천평

최탁은 범죄와 추리, SF, 역사, 판타지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장르의 문법과 기법을 능란하게 구사하며 독자를 이야기의 미궁 속으로 끌어들인다. 치밀하게 쌓아 올린 사건과 팽팽한 긴장,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서늘한 반전이 순수한 서사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장르적 재미에 머물지 않는다. 익숙한 문법을 자유로이 변주하고 비틀며 새로운 서사의 길을 열고, 마침내 그 너머에 숨어 있는 인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은 독자가 믿고 있던 현실과 윤리의 경계를 끊임없이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현실과 환상, 기억과 망각,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인물들의 사투는 서사에 예측 불허의 동력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실에 도달했다고 믿는 순간, 서늘하게 내리꽂히는 반전으로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이야기는 압도적으로 재미있고, 장르는 다채로우며, 반전은 날카롭다. 그러나 책장이 넘어갈수록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간의 깊은 내면을 묻는 서늘한 사유다. 재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형식과 주제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는 작가의 역량이 이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만나는 경험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가장 익숙하면서도 끝내 이해하기 어려운 미궁을 탐사하는 일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쉬이 지워지지 않을 캐릭터들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들이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 것이다. 미궁에 들어선 독자는 예기치 않은 반전 너머에 남겨진 질문과 잔상을 되새기며, 기꺼이 그 서늘한 세계에 좀 더 머물고 싶어질 것이다. - 태기수 (소설가,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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