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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신학이라는 꼭두각시
제1장 동이 서를 만날 때 제2장 정통파의 가슴 설레는 로맨스 제3장 실재계의 만곡 제4장 법에서 사랑으로... 다시 사랑에서 법으로 제5장 유대교의 뺄셈과 기독교의 뺄셈 부록 - 오늘날의 이데올로기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
Slavoj Ziz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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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구권이 낳은 세계적 철학자 지젝 ― 철학, 사회, 국제문제를 넘어 신학(기독교)의 문제까지 거론하다
비서구권 철학자로는 드물게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고, 매년 3~4권의 신간을 발표하여 왕성한 집필활동도 하고 있는 슬라보이 지젝이 이번에는 기독교 문제를 정면으로 들고 나왔다. 국내에도 이미 그의 저서가 15종 넘게 번역ㆍ출판된 것을 보면 그의 사유와 철학체계가 갖는 동시대성이 입증되었다고 보여질 수 있다. 헤겔 철학을 바탕으로 하면서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을 차용, 현대적 글쓰기의 새로운 차원을 구축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는 그는 철학이론 뿐만 아니라 현실문제에 대한 적극적 발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0년 모국인 슬로베니아가 최초로 자유선거를 실시했을 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번에 출간된 『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는 2003년 영미권과 독일어권에서 동시출간된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원제 : 난쟁이와 꼭두각시)을 번역ㆍ출간한 것이다. 현행 (도착적, perverse) 기독교는 불안 없는 쾌락을 향유할 가능성을 제공 지젝은 책 첫머리부터 도발적인 문구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제1번을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발터 벤야민이 유물론을 꼭두각시, 신학을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난쟁이에 비유했다면, 지젝은 이 테제를 뒤짚어 유물론을 난쟁이, 신학을 꼭두각시의 자리에 놓는다.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진 후 역사적 유물론이 파산한 이념으로 간주되지만, 여전히 우리 사유의 토대는 유물론이고 유물론이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의 또는 이념은 이제 종교적 신념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이 유력한 이념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기본 생각이다. 신이 죽은 사회, 즉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어쩌면 모든 것을 허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듯 모든 유형의 대의를 부정하며 소소한 일상적 삶의 쾌락을 누리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사회는 오히려 삶 자체를 상실한다. 즉 탈형이상학적 생존지상주의의 종착역은 먹기 위해 사는 삶, 죽음과 다름없는 삶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곧 “지배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섹스를 즐길 것, 죄의식을 느끼지 말 것을 명한다. 이때 우리가 죄의식의 부재에 대하여 치르는 대가는 불안이다.” 즉 불안은 우리의 실존적 체험의 근간을 이루고 이러한 불안을 해소할 이데올로기로서 ‘현행 기독교’는 우리에게 기만적인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불안 없는 쾌락을 향유할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것을 법과 죄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규범은 위반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지젝이 현행 기독교를 ‘도착적’(perverse) 기독교, 혹은 기독교를 가장한 쾌락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젝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 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가 처벌받지 않고 삶을 즐기게 해주는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라는 점은 무수히 많은 한국사회의 교회 피뢰침과 대도시 밤거리의 향락문화가 동시에 공존하는 모습에서도 역설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독교적 경험은? ―현실이 초래하는 왜곡의 수치와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 그렇다면 이러한 ‘현행 기독교’의 기만적 쾌락에 대비되는 진정한 기독교적 경험은 무엇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 속에서의 기독교가 도착적 금제(禁制)를 제공하는 쾌락주의라면, 진정한 기독교적 경험은 어떠한 의미에서 그에 대한 대안일 수 있을까? 지젝은 라캉의 실재계 개념을 통해 이런 점을 밝힌다. 그것은 곧 실재계는 위선적인 상징 공간과 구분되는 진정한 핵심으로 ‘신성한 것’과도 통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실재계란 직접 대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직접적 현존, 일상적 현실이 은폐하는 가공할 그 무엇, 상징화에 저항하는 단단한 그 무엇, 격렬한 위반의 행위가 아니고는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엇, 요컨대 규정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라캉의 실재계는 이러한 의미보다는 상징 공간 자체의 간극과 모순의 효과만을 상정한다. 다시 지젝의 말로 돌아가보면 실재계는 객관적 현실보다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가깝다는 것이다. 즉 실재계는 왜곡의 현상이 표표히 드러나는 공간이며, 이 왜곡이 초래하는 수치와 고통이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기독교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현실의 왜곡 자체가 진리이지, 진리가 왜곡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 이념에 근거하는 윤리적 주체의 재정립 시도 지젝은 이 책에서 다양한 서구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한다. 사도 바울의 문제, 유대교와 기독교의 문제 등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의 서구 기독교 비판이 여타의 철학자나 종교학자들과는 달리 신선한 담론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의 일련의 비판적 성찰이 기독교 이념에 근거하는 윤리적 주체의 재정립에 있기 때문이다. 즉 기존 학자들의 탈근대 철학은 주체를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해체론적 경향이나 실재계를 열망하는 이른바 탈세속적 선회로서만 시도했던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마르크스주의 문화 속의 랍비였던 것처럼, 지젝은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 기독교적 경험을 되살려야 한다”라는 주장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