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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금성천 pippilotta langstrumpf 달 12월을 꿈꾸는 jun의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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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총으로 조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려움에 서둘러 뛰어갔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는 무작정 뛰기만 하였다. 잠시 장면이 바뀌었다. 회사의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창문에서 누군가가 밖을 향해 총을 조준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부장이었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알 수 없는 곳으로 뛰는 그 자신이 등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멀리 바다가 보이는 낭떠러지였다. 부장은 여전히 자신을 조준하고 있을 것이었다. 만약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사살되고 마는데, 그렇다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질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은? 파도 속으로의 추락이었다. 왜냐면 만약 절벽 위에 그대로 있다면 총알에 관통당해 죽게 됨이 분명하지만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면 그가 알 수 없는 어떤 경우에 의해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은 더 있기 때문이었다.
‘제기랄. 다른 선택은 없단 말인가.’ 그는 꿈속이지만 아주 분명하게 그런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곤 아래로 몸을 던졌다. 큰 바도가 성큼 눈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곧장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오랫동안 추락을 하였다. 그것은 기회였다. --- <12월 꿈꾸는 jun의 이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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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젊은 작가 양유정의 두 번째 소설집 『12월을 꿈꾸는 jun의 이야기』를 펴낸다.
문학평론가 복도훈은 그를 두고 ‘도저한 삶의 필멸과 싸우는’ 작가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유정 소설 속에 인물들은, 익숙한 사물과 반복되는 시간, 수많은 관계들과의 공방전 속에서 회의를 느끼며 과연 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유영한다는 차원 말고 어떤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공방전 속에서 죽음을 위협하는 공포의 순간이 올 때에는 필사적으로 불안에 몸을 맡기는 인물, 그것이 우리들의 초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양유정이 얘기하는 우리들의 초상이란 죽음의 기를 들고 출발선에 서있는 모순을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일 테다. 양유정은 말한다. 착란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는 것이 아닌 시간과 시간 사이 윗집과 아랫집 사이, 구멍 안과 밖의 사이에서 온다는 것을. 착란의 끝에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는 병을 얻기도 하며 몸을 절단하고 도려냄으로서 자아와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해체로 확장 시킬 만큼 , 그 사이, 즉 그 간극은 결코 가벼운 언어와 시간이 아님을 그는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첫 소설집 『마녀가 된 엘레나』에서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간의 이면성, 그 양면의 시간 속에 들끓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무한의 상상이었다면 두 번째 소설에서 양유정은 양면이 아닌 하나의 시간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시간의 동시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양유정의 소설은 부메랑에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삶에 대해 던진 물음표인 부메랑은 타인과 사물이 개입하여 ‘공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여기서 공존은 함께 산다는 것 보다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동시성을 얘기함에 있어서 양유정 소설이 가진 발화의 특징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2월을 꿈꾸는 jun의 이야기〉는 3인칭 시점의 서술인 듯하지만, 소설 속 인물이 현실을 바라보는 서술자의 개입은 일반적인 3인칭 시점의 소설들이 가진 발화의 영역을 뛰어 넘는다. 그는 이 세상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의 착란은 내면의 세계 속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자신의 천성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었다. 그를 감싸고 있는 사물과 시간들은 그의 내면이 아닌 외부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 외부의 것과 움직임을 달리하는 내면의 세상은 그 자체의 체계대로 움직여 결국 외부와 내면의 세계가 함께 있지 못하고 어긋나버려 서로를 동일한 시간의 순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 〈12월을 꿈꾸는 jun의 이야기〉 중에서 양유정이 가지고 있는 부메랑은 그 속도에 의해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 가는 곳곳마다 그의 시선이 모든 사물들과 사람들을 포옹하고 돌아와, 사이를 사이를 파고드는, 그리하여 모든 간극들의 소통을 돕는 것이 그의 소설의 힘이자 우리가 그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일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