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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육식 섬 때론 아내의 방에 나와 닮은 도둑이 든다 하늘에 떠 있는 저 사내를 보라 거미 인간 움직이는 모래 세 편의 자기소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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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일이면 백일 휴가를 나갈 초병의 눈에 또 한번 나비를 먹는 여자가 보였다. 긴 꼬챙이를 들고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풀숲으로 걸어가는 여자. 그녀는 뽕나무에 매달린 오디를 따먹듯 풀숲에서 나비들을 주워 먹었다. 저항도 없이, 그저 손으로 입으로 배로 들어가버리는 나비였다. 하마터면 그는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여자를 향해서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꿈을 꾸고 있을 나비를 향해서였다.
--- p.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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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호의 소설은 익숙한 듯하나 낯설다. 이게 무슨 역설인가, 하겠지만 이는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반쯤 잠든 상태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에 머무르는 몽유병자의 형상을 띠고 있는 것과도 그 맥락이 닿아 있는 듯하다. 아내와 불륜을 벌인 남자를 동시에 살해하여 매장한 프라이드 자동차 밑에서 담쟁이가 자라난다거나(「때론 아내의 방에 나와 닮은 도둑이 든다」), 나비를 먹는 여자를 보았다고 말하며 휴가를 나와 나비를 먹고 죽어버린 초병의 강렬한 환각을 묘사하는(「나비」) 장면 등, 이 소설집 전체를 두고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또 어디까지가 거짓인가를 애매하게 만들어버리는 묘사들 찾으라면 아마도 책장은 여러 겹의 밑줄로 붉게 번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성호의 소설에서 ‘환각’은 ‘고백’보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냄새를 풍긴다. 오히려 ‘고백’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묘하고 낯설며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고백으로 고백의 반(反)고백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아이러니를 목도케 한다. 거기에는 악취, 육식과 같은 동물적 감각을 통한 인간의 위선과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의 화살이 가득 준비되어 있다. 조각조각 절단되어 피 흘리며 죽어가는 젖소를 묘사한 「육식」에서 금욕적 채식주의자들이 그토록 감시하고 금지하면서도, 눈두덩의 주름진 그늘 아래 적나라한 욕망의 실체를 감추고 있듯, 그 숨겨진 ‘냄새’들을 끌어다 맘껏 방목할 수 있는 힘, 이는 바로 ‘환각’의 힘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집의 가장 큰 특징은 ‘詩說’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차분한 문체에 있다. 심지어 살해를 저지르는 장면에 있어서도 그는 평상심을 잃지 않은 채 최대한 곱게, 그리고 무슨 큰일이라도 났냐는 듯 되묻는 듯 덤덤한 어조로 서술한다. 다음의 예를 한번 살짝만 보더라도. “저는 교수님 곁으로 걸어갔습니다. 검정 비닐에서 부엌칼을 꺼내 교수님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습니다. 교수님은 내 얼굴을 보며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여 죄송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작별 인사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교수님은 의자에 앉은 채 내 쪽으로 방향만 바꾼 상태에서 그대로 머리를 책상에 내려놓았습니다. …”(「나비」중에서) 또한 그의 상상력은 놀랄 만큼 그 진폭이 크고 넓으며 탄력이 있다. 현실과 꿈을 오가는 동안 한껏 오감을 펼쳐놓은 탓인지 그의 전복적 상상력은 수면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점점 확산된다. 그리하여 그의 데이터 안에 걸려든 인간들은 아무리 진한 향수를 뿌리거나 짙은 화장을 했어도 들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욕망의 퀴퀴한 썩은 냄새. 그러나 안성호 소설 특유의 미적 형상화와 우화적 현실 인식은 깨어나 보니 그것은 꿈에 불과했다는 꿈/현실의 견고한 이원론의 재확인이나 허무주의적 탄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소설들은 깨어나도 깨어나지 않은 것만 같아 개운치 못한 느낌을 주는 낮꿈의 잔재들을 텍스트의 원재료로 삼으며, 꿈과 현실이 마치 비에 젖은 두 가닥의 전선처럼 급작스럽게 맞붙어 단전을 일으키는 찰나에 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작가가 부조리한 꿈같은 소설 속에 펼쳐놓은 애매한 삶의 경계들, 결정과 선택의 순간들, 좌절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은 소망들, 의도하지 않았지만 발생한 부산물들, 이것들이야말로 당신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아 지나쳐버리지만, 또한 언젠가는 대면해야 할 팍팍한 삶의 진실이 아닐까. (복도훈, 해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