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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다, 이전에 뻘쭘하다. 뭐라고 써야 하나. 정확히 말하자면 두렵다. 쓰는 내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 이거 왜 썼니?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점점 자신 없어진다. 아, 내가 이걸 왜 썼더라.
예전에 누군가가 나의 전생이 일본군과 항일군 사이를 오가던 이중 스파이--그것도 여성이란다--라더라. 역추적을 해서 정말 그런 인물이 있으면 장편을 써보리라 했었다. 이 책 저 책을 읽다 보니 이중 스파이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소설이 될 만한 일명 ‘꺼리’가 많지 않더라. 그러다가 발견했다. 중일전쟁 때 일본군에게 삼광당한 중국인 시체,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학살당한 양민들의 시체, 1980년 광주에서 죽어간 시민들의 시체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보니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구태의연한 사실인 것을, 나는 서른세 살이 되던 해 봄에, 그것도 도서관에서 겨우 알았다. 꼭 여자들의 시체더라. 강간하면 꼭 죽인다. 죽였으면 그만인데 샅에 칼을 박거나 가슴을 잘라내거나 임신부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낸다. 50년 동안, 전혀 다른 곳, 전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된 살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몇몇 시체들을 골라내어 시체검시관에게 보이면 단박에, “이건…… 연쇄 살인범의 소행인데요” 할 것만 같았다. 이 소설은, 이런 다소 엉뚱한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빨치산 어쩌고저쩌고 했지만 좌파도 아니다. 그런데 언젠가 누가 뭘 쓰고 싶냐기에 이데올로기에 대해 쓰고 싶다 했더니 비웃더라. 시대가 어떤 시댄데…… 이런 다양성의 시대에 이데올로기가 될 말이냐, 문학은 이념이 아니라 삶이다, 하더라. 누구는 겨우 책 몇 권 읽어놓고서 그 시대 항일군은 사실상 거의 다 토비(?;)였단 말이 있다, 그리고 민족이란 상상적 공동체에 불과한 게 아니냐, 하더라. 정말 다양성의 시대라면 왜 이데올로기만 안 된단 말인가? 민족이 정말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이미저리하게 죽었단 말인가? 다양성의 시대라는 말만큼 무서운 이데올로기가 없듯이, 환상과 상상은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는 가공할 만한 현실이다. 몰역사적인 관념주의가 위험한 폭력이라면, 목적 없는 미학주의는 공허한 재난이다. 이런 식으로 소설을 계획하면 관념이나 구호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것에, 독자들에게 차갑게 외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저어하면서도, 쓰고 싶어서 썼다.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고, 나 같은 게 이런 거 써도 되나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소설과 함께했던 1년 반 동안의 나는 행복했다. --- 당선 소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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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문예중앙소설상 수상작
역사와 사회에 복수하는 연쇄살인범 '킬러리스트' 제2회 문예중앙소설상 수상작 노희준 장편소설『킬러리스트』가 출간되었다. 『킬러리스트』는 연쇄살인범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항일빨지산에 관련된 소설이다. 전혀 별개일 것 같은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면서 『킬러리스트』는 추리소설에서 역사소설로 변모하게 된다. 살인범과 피해자, 치료 의사의 정체성을 중첩시켜 개인의 폭력을 역사의 폭력으로 다시 인류 보편의 비극으로 확장하는 마지막 반전은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지게 한다. 바로 이점이 『킬러리스트』의 강점이자 매혹이다. 그의 임무는 세상의 '합법적 가해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왜 죽이는가? 누구를 죽이는가? 연쇄살인의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이 두 가지 물음일 것이다. 『킬러리스트』는 ‘누구를 죽이는가?’를 피해 ‘왜 죽이는가?’에 천착하고 있다. 소설의 시작은 ‘왜 죽이는가?’에 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범죄심리 전문가 서린은 연쇄살인범 ‘김종희’의 여동생 ‘김주희’를 면담한다. 면담이 거듭될수록 ‘김종희’가 기획한 연쇄살인의 계기와 의문들이 서서히 풀려나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여동생 ‘김주희’를 면담하면 할수록 사건은 더욱 미로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연쇄살인에 결부된 갖가지 원인들을 규명하고, 항일빨지산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연쇄살인범의 자의식을 발견하게 되면서 사건은 점점 흥미로워진다. 김종희와 김주희 남매간에 사건의 실마리가 연관되어지고 연쇄살인범 ‘킬러리스트’에 관한 수사는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점점 여동생 ‘김주희’를 통해 오빠 ‘김종희’의 과거가 드러나는 데……. 과연 ‘킬러리스트’는 왜 살인을 하는 것일까? 역사적 사건이 연쇄살인과 뭉뚱그려져 하나의 커다란 수수께끼를 만들어가는 모습. 『킬러리스트』는 추리적 요소와 역사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살인자 명부(killer-list) 또는 킬러(killer)와 테러리스트(terrorist)의 합성어 이 소설에서 작품 제목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킬러인 ‘김종희’는 한편으로 항일빨지산의 유업을 계승한 ‘테러리스트’이기도 하며 그 두 가지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 ‘킬러리스트’라는 신조어이다. 킬러이자 테러리스트인 자. 따라서 연쇄살인범 ‘김종희’는 자신이 킬러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정한 살인명부가 아닌 살인자명부(killer-list)대로 연쇄살인을 범하는 것이다. 즉, ‘킬러’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리스트’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리스트’는 이 소설이 향하는 마지막 교착점이 된다. 제목처럼 이중적 의미로서 ‘킬러리스트’로 시선이 옮겨오면서 소설은 미궁을 벗어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연쇄살인범과 역사적 사건의 미묘한 접점은 제목 ‘킬러리스트’로 인해 풀어지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