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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견? 이것이 진정 발견인가?
2. 정열을 불사른 발견자들 3. 앙코르 탐험 4. 마지막 탐험가들 5. 복원된 앙코르 6. 앙코르, 국가의 영광 7. 기록과 증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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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자료에는 후대의 캄보디아 왕이 이 도시를 '발견' 하여 잠시 이곳으로 궁정을 옮겼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앙코르와트 지역' 에 앙칸왕이 부임했다는 내용은 있다. 이는 이 지역의 중심부가 성벽도시 앙코르톰에서 성벽 외곽의 앙코르와트로 옮겨 갔음을 증명한다. 기명에도 앙코르톰 이야기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기명에 언급된 행사들 또한 앙코르톰에서 개최된 것이 아니다. 이제 조상이세워지고 봉헌물이 바쳐지는 곳은, '완전히' 복원된 앙코르와트였고, 캄보디아, 타이, 일본 등지에서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곳도 앙코르와트였다. 이 도시는 더 이상 왕국의 수도가 아니었지만 도시 부근의 앙코르와트 사원은 정신적 중심지가 되었다.
17~18세기에 드문드문 이곳을 찾아왔던 서방의 방문객들도 이 사실을 주목했다. 프랑스 선교사 셰브뢰유 신부는 그의 편지에 "로마가 기독교도의 중심지였다면 앙코르와트는 대여섯 왕국에 사는 이교도의 중심지이다." 라고 썼다. 인근 국가의 왕들은 전쟁중에도 앙코르와트를 순례했으며 타이 왕은 해마다 사절을 보냈다. 1783년경에 앙코르를 방문했던 또 다른 프랑스 선교사는 이곳을 가리켜 '미신의 본거지, 인도인의 바벨탑' 이라고 편지에 썼다. --- pp.2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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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형조사 작업에 힘입어 그로슬리에는 여러 단계를 거치며 발전해온 앙코르의 수로체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사원의 전체모습을 수정하고 그와 관련된 작업을 해나가면서 건물의 연대를 확인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20세기초부터 발굴된 조각,청동,도자기 등은 잘 보존되었고 이들을 사진으로 찍어 연구한 결과 사원의 전체실상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 p.118,---pp.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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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 탐험여행>의 저자들은 '특정 세부양식에 나타나는 완벽한 마감질과 성벽을 조각품으로 장식한 것으로 보아, 한때 이곳에 원숙한 예술이 개화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고 찬사를 늘어놓으며, 캄보디아인이 '세계 건축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역동적인 건축양식'을 만들어 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이렇다. '그리스와 고딕 건축이 지닌 영감이 엿보인다 해도, 캄보디아 건축을 이 두 건축과 나란히 비교할 수는 없다. 아마도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양식 바로 다음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유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 평가로 그들이 신봉해 온 예술의 위계질서가 지켜진 것이다. 식민지로 편입된 새 영토에도 위대한 예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서구의 예술과 어깨를 겨룰 정도는 아니니까 말이다. --- p.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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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 탐험여행>의 저자들은 '특정 세부양식에 나타나는 완벽한 마감질과 성벽을 조각품으로 장식한 것으로 보아, 한때 이곳에 원숙한 예술이 개화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고 찬사를 늘어놓으며, 캄보디아인이 '세계 건축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역동적인 건축양식'을 만들어 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론은 이렇다. '그리스와 고딕 건축이 지닌 영감이 엿보인다 해도, 캄보디아 건축을 이 두 건축과 나란히 비교할 수는 없다. 아마도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양식 바로 다음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유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 평가로 그들이 신봉해 온 예술의 위계질서가 지켜진 것이다. 식민지로 편입된 새 영토에도 위대한 예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서구의 예술과 어깨를 겨룰 정도는 아니니까 말이다. --- p.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