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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동양 고전에서 인생의 길을 묻다
북팜 201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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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팜 고전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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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_중국의 대철학자

01 죄인을 다스리다
02 노나라의 대신이 된 공자
03 다섯 등급의 인품에 대하여
04 유행(儒行) 이란 무엇인가?
05 왕의 말에 대하여
06 왕의 혼인에 대하여
07 예절을 물음
08 절개를 말하다
09 자로 처음으로 만나다
10 교(郊)에 대하여 묻다
11 최상집 개
12 정치에 대하여
13 여섯 가지 근분
14 갈기를 좋아함
15 주나라를 살피다
16 생각함에 대하여
17 세 가지 용서하는 법
18 정치하는 방법을 말하다
19 어진 왕
20 제자들을 마라다
21 벼슬을 하다
22 화액을 당하다
23 애공이 정치에 대하여 묻다
24 물건을 말하다
25 다섯 황제의 덕
26 다섯 황제
27 향사례를 보다
28 명(命)과 성(性)에 데하여
29 예를 논다하
30 묘(廟)의 제도에 대하여
31 다섯 가지 형벌데 대하여
32 형?과 정치
33 관례에 대하여
34 옥을 말하다
35 음악에 대하여 말하다
36 본성(本姓)을 풀이하다
37 공자의 예언
38 안회를 말하다
39 곡례에 대해서 단목사가 묻다
40 곡례에 대해서 복상이 묻다
41 곡례에 대해서 공서적이 묻다

저자 소개 2

孔子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아버지 숙양홀(叔梁紇)과 어머니 안씨(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움푹 들어가 둘레가 언덕처럼 솟아 있어 이름을 구(丘: 언 덕 구)라고 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씨(季氏) 가문의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48살 때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아버지 숙양홀(叔梁紇)과 어머니 안씨(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움푹 들어가 둘레가 언덕처럼 솟아 있어 이름을 구(丘: 언 덕 구)라고 했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19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20살 때부터 계씨(季氏) 가문의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48살 때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497년 이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다. 기원전 479년 73살 때 세상을 떠나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언덕)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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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

맹자의 이름은 가軻이다. 주나라 때(BC 372 ~ BC 289 추정) 사람이다. 맹자는 공자시대 이후 유가에서 가장 큰 학파를 이룬 사람으로, 제나라, 위나라, 등나라 등을 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분열 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의하고 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으로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공자의 뜻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 7편이다. 후한의 조기가 『맹자장구』를 지으면서 각 편을 상하로 나누어 현재의 14편이 된
맹자의 이름은 가軻이다. 주나라 때(BC 372 ~ BC 289 추정) 사람이다. 맹자는 공자시대 이후 유가에서 가장 큰 학파를 이룬 사람으로, 제나라, 위나라, 등나라 등을 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분열 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의하고 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으로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공자의 뜻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 7편이다. 후한의 조기가 『맹자장구』를 지으면서 각 편을 상하로 나누어 현재의 14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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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나준식
수천년간 동양사상을 지배해 온 유학을 동경하여 인과 의를 공부하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1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394쪽 | 590g | 155*224*30mm
ISBN13
9788997959020

책 속으로

공자는 예에 대해 말했다.
“백성들의 생활에 있어서 예절이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때문에 예절이 아니면 천지신명도 섬길 수가 없으며, 왕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어른과 d이를 구별할 수 없으며, 예절을 모르면 남녀와 부자와 형제와 혼인과 친족에 대하여 서먹서먹하게 되고 멀고 가까운 교제를 구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자는 먼저 이 예절부터 존경한 뒤에 백성들에게 예절을 자세히 가르쳐서 모이는 절차를 없애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 뒤에야 문장과 천자의 예복을 다스려서 귀하고 천함과 위아래를 나누어 구별합니다. 그리고 그 순서가 끝난 다음에 상례와 제례의 기강과 종묘의 질서를 말하게 되며, 제사 때 바치는 시석을 놓고 철에 따라서 공경하게 장사지내며, 멀고 가까움을 달리하고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차례로 모신 뒤에야 종족이 모여서 잔치도 벌이게 되며, 또 각각 위치에 따라서 자기의 마음이 편해져야 은혜와 덕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궁궐 안의 방은 낮게 하고 절조 있게 부리며, 구슬로 수레를 꾸미지 않고 그릇의 무늬는 금으로 세기지 않으며, 먹는 음식은 여러 가지 맛을 내지 않고 음탕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백성들과 함께 이익을 같이 누릴 수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옛날의 밝은 왕들이 행하던 예절입니다.”

---「예절을 물음」 중에서

미유인이유기친자야 이며, 미유의이후기군자야 이니
왕역왈인의이이의 인데 하필왈리 잇고.

왕이 어진 정치를 베풀면 백성들은 그를 본받아 분수에 맞게 살 것이고, 그가 걱정하는 것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해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나라를 오랫동안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맹자는 부국강병이라는 당시 전국 제후들의 정책은 오히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짧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왕이나 순왕을 성왕이라고 부르며 떠받드는 것은 그들이 도덕 정치를 베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왕도 그들처럼 오랜 세월 동안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이익만을 구하지 말고 모든 백성들이 그들의 분수를 충실히 지키면서 왕의 다스림을 잘 따르도록 도덕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한다.

---「어진 정치를 베풀고도 왕이 되지 못한 사람은 없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중국의 대 철학자- 유교의 시조

공자의 학파는 유가로 불리며 그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이어졌는데, 인을 이상의 도덕이라 하여 효제와 충서로써 이상을 이루는 근거로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공자가 그 무렵의 공경 사대부 및 제자들과 서로 묻고 대답한 내용을 여러 제자들이 보고 들은대로 기록한 글이다.

그런데 다 같은 성인의 글인데도 《논어》, 《효경》은 특별히 순수한 글이라고 하여 유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모두가 읽었으나 이 책만은 내용이 이것 저것이 뒤섞여서 순수하지 않다고 하여 외면당하고 심지어는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향까지 있었다. 그런 탓인지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온갖 시서를 불살라 버리는 이른바 ‘분서갱유’때 이 책 한 질은 공자의 옛 집에 보관되어 있어서 화액을 면했다고 한다.
동양의 위대한 철학자

맹자는 공자와 함께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 사이의 도덕을 바탕으로 했으나 적극적인 성선설, 즉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하다는 도덕설을 부르짖었는데, 이것은 뒷날에 유가의 정설이 되었다. 맹자는 왕도를 내세움에 있어 반드시 백성들의 뜻을 존중할 것이며, 포악한 왕은 이를 바꾸어도 좋다는 이른바 역성혁명을 받아들였다.

맹자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백여 년 만에 나타났으나 성인의 도를 보고 깨우치는 사람이 없으니 앞으로의 일도 아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탄식하였고 성인의 도를 되찾아 전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지고있으나 자신이 뜻을 펴지 못하니 앞으로도 성인의 도는 되찾지 못할 것이라고 한탄을 하였다. 이는 도의 계통을 이었으나 지위를 얻지 못해 도를 퍼뜨리지 못하는 시대를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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