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2020, 개정판을 내며
1부 2부 역자노트 『이방인』 깊이 읽기 역자후기 : 카뮈 죽음의 진실과 번역가의 길 알베르 카뮈 연보 |
Albert Camus
알베르 까뮈의 다른 상품
이정서의 다른 상품
|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켜지며, 밤하늘에 가장 먼저 떠오른 별들이 흐릿해졌다. 그처럼 온갖 사람들과 빛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눈이 피로해졌다. 젖은 보도블록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차들이 들어올 때 비치는 빛이 머리칼이나 웃음 띤 얼굴, 은팔찌 위에서 바스러졌다. 이윽고 전차들이 뜸해지고 깜깜한 어둠이 어느새 나무들과 가로등 위로 내려앉으면서 거리엔 차츰 인적이 끊기고 첫 번째 고양이가 천천히 다시 한적해진 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 p.41 시뻘건 폭발은 그대로였다. 모래 위로, 바다는 아주 빠르게 부딪치며 헐떡였고 잔파도들이 숨 가쁘게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바위를 향해 걸었는데 햇볕에 이마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열기 전체가 나를 짓누르며 내 걸음을 막아서는 것 같았다. 얼굴을 때리는 뜨거운 숨결을 느낄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바지 주머니 속의 주먹을 움켜쥐며, 태양과 태양이 쏟아붓는 그 영문 모를 취기를 이겨 내느라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흰 조개껍데기나 깨진 유리 조각, 모래에서 발하는 모든 빛의 칼날로 내 뺨은 긴장했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 pp.84-85 기본적으로 번역은 출발어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를 위해 도착어의 언어로 바꾸어 주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원래 단어의 의미를 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의역이다. 그런 가운데 원작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건 어떠한 논리라도 불필요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 테다. 예컨대 원작의 99%는 제대로 옮겼고 나머지 1%는 잘못 옮겨도 되는 게 번역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1%가 99%의 의미보다 작다는 평가는 누가 내릴 수 있는 것일까? 평론가가? 철학가가? 다른 예술가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100% 정확히 옮겨지지 않은 번역문을 두고 뭐가 좋다, 나쁘다라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실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건 다만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공통된 생각으로 굳어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이 고착된 것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번역자는 번역자대로 비평가는 비평가대로, 원작 그대로를 옮긴다는 게 언어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번역이 불가능한 문장이 존재하는 걸까? 나는 실제 번역을 해보기 전까지는 그런 건 없다고 보았었다. 그런 게 있다면 찾아내 해결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상 그것이 무엇이든, 언어학이든, 통사론이든 비교문화든 아무튼 그 단어나 문장이 뜻하는 바가 뭔지를 찾아내면 되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어느 한쪽에서 사용하지 않는, 사멸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 사실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게 바로 번역자의 역할이고, ‘번역’의 정당한 의미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pp.260-261 |
|
6년 만에 다시 선보인 카뮈의 『이방인』
번역가 이정서가 6년 전에 자신의 첫 번역서로 고른 책이 『이방인』이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었다!”는 다분히 도발적인 카피를 앞세운 이 책은 번역계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합세한 치열한 논쟁에 휘말렸고, 이 논쟁은 신문에까지 대서특필되는 이례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이제 시간이 지나 논쟁의 열기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논점이 해소되거나 논쟁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다. “진짜 번역은 의역이 아니라 직역이어야 한다”는 번역가 이정서의 주장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표방하거나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논쟁은 사실 6년 전 출간된 『이방인』에서 처음 시작된 것도 아니고,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해묵은 논쟁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6년 전 출간된 이정서의 『이방인』이 큰 관심과 주목을 끈 것은 “실제로” 직역을 통해 기존의 『이방인』과는 다른 『이방인』, 일반 독자들이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이방인』의 또 다른 면모들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인공 뫼르소가 작열하는 햇살 때문에 다분히 충동적이고 우연하게 아랍인 사내를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라고 믿고 있던 기존의 독자들에게 이 부분의 기존 번역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이정서의 『이방인』은 꼼꼼하게 짚어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독자들은 주인공 뫼르소를 비롯해 『이방인』에 등장하는 다수의 인물이 사실은 카뮈가 창조한 인물이 아니라 번역자들에 의해 추가로 가공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소설 전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분위기와 주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고, 결국 카뮈가 천착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부조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이정서의 『이방인』 새 번역은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6년 만에 다시 새로운 번역본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번역은 직역이어야 하고, 문장의 길이는 물론 구두점까지 원문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그의 번역관이 바뀌거나 6년 전의 번역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일까? 번역은 자기와의 싸움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 이정서는 개정판 서문에서 “멋모르는 가운데 완벽하다는 생각으로 냈던 책이 지금 보니 숱한 오류도 함께 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오류란 기실 “잘못된” 번역이 아니라 “고민이 부족했던” 번역을 말하는 것임을 이번 책을 통해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소설의 첫 문장을 이정서는 6년 전 기존의 번역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고 했다가 이번에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라고 수정했다. 번역자가 생각하는 이전 번역본의 대표적인 “오류”인 셈인데, 이때의 오류란 문장 자체의 의미상 오역이 아니라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언어관습까지를 고려했을 때의 오류에 가깝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번역자의 지나치게 세심하고 깐깐한 기준에 맞춘 새 번역인 셈이다. “번역은 자기와의 끝없는 싸움”이라고 되풀이 강조하던 이정서의 기준과 눈높이에 맞춘 새로운 『이방인』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이 탄생한 셈이다. 실제로 지난 6년 동안 계속되고 되풀이된 논쟁과 이어지는 천착을 통해 이전의 『이방인』보다 한층 명확해지고 부드러워진 새로운 『이방인』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독자들에게는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단어 하나, 구두점 하나를 놓고도 끝없이 고뇌를 되풀이했을 역자의 수고가 행간 곳곳에서 읽힌다. *』이방인』 2020년 개정판(양장)에서는 전면 보강된 [역자노트]와 「‘이방인’ 깊이 읽기」, 「카뮈 죽음의 진실과 번역의 길」 등이 새로 수록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