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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벌새의 습격 적당히 수상쩍은 신입사원 파투산 대충 존재하는 남자 나비와 궤도 엘리베이터 인간 미끼 사용법 첫 번째 점검 초록 마녀와 데이트 “당신은 늘 그랬지. 내가 아니라고 그래도 늘 그랬어.” 유령의 흐릿한 발자국 사라진 나비 그림이 있는 곳 수호천사의 방문 (아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앞으로 해야 할 일 요정의 날개 밑 투명한 짐승들의 전쟁 너무 늦게 기억난 이름 내가 죽인 사람들 실종 다른 사람의 죄 두 번째 점검 파투산으로 돌아가다 ‘뜻밖의 범인’ 깨워야 할 사람 누군가는 밑에서 할 일이 있다 평형추 대체로 그럴싸한 거짓말 그러면 우리도 땅 위에 남아 있으리라 에필로그 |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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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엄마는 별이 될 거란다.”
회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남자가 내민 나무 상자를 바라보았다. 하얀 뼛가루가 든 푸른 유리병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아이는 바지 주머니에서 왼손을 꺼내 검지 끝으로 병을 쓰다듬다가 상자를 고쳐 잡은 남자의 손목이 손을 스치자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엄마가 아니에요.” 남자는 당황하며 병의 라벨을 확인했다. 아이의 엄마가 맞았다. 하지만 누가 알겠어. 가족마다 각자의 사연이 있는 법이다. 아이에겐 아까 자기를 데려온 다른 여자만 진짜 엄마인지도 모른다. 남자의 표정을 읽은 아이는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아니에요. 그냥 재예요.” 아, 꼬마 철학자로군. 아이 말이 맞다. 병 안에 든 건 그냥 몇몇 원소의 가루에 불과하다. 초신성에서 태어난 뒤 거친 몇십 억년의 역사에서 잠시 인간 몸의 일부였다는 게 어떤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오늘 폭죽에 섞여 하늘로 쏘아 올려져 몇 초 동안 하늘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는 불꽃이 되고 공기 속에서 흩어져 다시 각자의 길을 가겠지. ---「프롤로그」중에서 브라이얼리 제도 끝에 솟아 있는 십자가 모양의 작은 섬나라. 그럭저럭 빽빽하지만, 생물학적 다양성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열대림, 섬 중심에 있는 쓸데없이 높은 사화산, 아까운 줄 모르고 지하수를 뽑아 쓰다 지반이 무너져 진흙탕 속에 잠겨버린 마을과 도시들. 그리고 아름다운, 정말로 아름다운 나비들. LK가 정복하기 전, 파투산은 그런 곳이었다. 15년 전 LK가 파투산에 궤도 엘리베이터를 세운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LK는 이미 궤도를 도는 스카이후크로 매일 서너 대씩 우주선을 궤도와 궤도 바깥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진정한 우주 시대가 왔다고 믿기에 충분했다. 스카이후크는 상대적으로 만들기 쉽고 가볍고 재미있고 빠르다. 그에 비하면 거대하고 둔하고 느린 궤도 엘리베이터는 비행선 같은 과거의 몽상처럼 보였다. 아름답고 장엄하지만 굳이 만들 필요는 없는 ---「파투산」중에서 마을 어딘가에 있는 스피커에서 찰랑거리는 하프시코드 선율이 흘러나온다. 파투산에 있는 중요한 모든 것들에는 파티마 벨라스코가 작곡한 짧은 주제곡이 붙어 있다. 이들은 AI에 의해 끊임없이 변주되고 발전되면서 섬과 섬 주변을 파도처럼 쓸고 지나간다. 익숙해지면 웜과 주변 스피커에서 들리는 음악만으로도 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숙련된 음악 애호가라면 독일어를 몰라도 바그너 악극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들리는 음악은 섬에 처음 온 사람들도 익숙하다. 스파이더의 주제곡이다. 닷새 전 안드레이 코스토마료프의 우주개발회사 알리사에서 만든 목성행 우주선 홀스트호의 승객 네 명을 태우고 궤도로 기어 올라갔던 엘리베이터가 소행성 샘플을 싣고 돌아오고 있다. 산꼭대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두 개의 레이저 줄기 사이에서 반짝이는 오렌지빛 별이 하강하고 있다. ---「“당신은 늘 그랬지. 내가 아니라고 그래도 늘 그랬어.”」중에서 꼭 10년 전 일이었다. 웜을 통해 배운 한국어는 아직 덜컹거렸다. 한국어를 말할 때마다 나는 표면의 인격이 얇게 분리되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이건 다른 경로로 배운 다른 언어를 쓸 때도 가끔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초창기 웜으로 언어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유달리 이런 부작용이 심했다. 웜의 언어교육 기능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귀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시야 바깥에 나타나 엉거주춤 서서 여러 언어의 경계선을 오가며 이상한 주문을 중얼거리는 존재. 장례식이 끝난 뒤로 그 귀신은 한 회장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유령의 흐릿한 발자국」중에서 세 겹의 휘파람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십 대 중반의 남자아이 셋이 내 뒤를 따라오며 휘파람으로 LK의 테마곡들을 부르고 있다. 궤도 엘리베이터와 파투산과 LK의 테마다. 이것들을 동시에 부르면 오묘하게 화음이 맞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재미를 붙인 모양이다. 아이들의 얼굴엔 희미한 적의와 혐오가 느껴지지만 배만 볼록 나온 가느다란 육체는 그리 위협적이지 못하다. 왜 여기서 이러고 사는 거니. LK에게 매일 다섯 시간만 너희 뇌와 몸을 빌려준다면 강간범과 강도들이 들끓는 이 시궁창에서 벗어나 더 나은 음식과 약물을 제공 받으며 모두에게 안전한 존재로 살 수 있을 텐데. ---「다른 사람의 죄」중에서 최강우와 나는 타모에와 파투산을 잇는 셔틀선 갑판 위에 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몇 분 전에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 파투산 섬 하늘 위엔 느릿느릿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보라색 별이 보인다. 화성 왕복선 데자토리스 3호의 부품을 실은 스파이더다. 완성된다면 인류가 만든 가장 큰 유인 우주선이 될 것이다. 파투산의 궤도 엘리베이터가 운영을 시작하면서 전에는 상상만 했던 것들이 우주 공간에 생겨났다. 우주선과 스테이션은 이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스케일과 사치를 누린다. 소행성 사냥 우주선의 숫자는 작년에 천 개를 넘어섰다. 내년이면 천오백 개의 초소형 우주선 무리가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를 향한 45년의 여정을 떠날 것이고 5년 안에 첫 오닐 실린더 식민지가 공사에 들어갈 것이다. 우주는 인간 친화적인 곳으로 변해가고 있고 그 속도는 어지러울 지경이다 ---「파투산으로 돌아가다」중에서 “그때가 되면 인간은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못하는, 한 무더기의 욕망 덩어리로 남겠지. 안드레이 코스토마료프는 저 깡통들을 만들어 태양계를 백 조의 인간으로 채우겠다고 하는데, 과연 그 많은 인간을 어디다 쓸까? 우리의 욕망은 단조롭고 지루하잖아. 비슷비슷한 우주 원숭이 백 조 마리가 사는 동물원을 만드는 게 과연 우리의 최종 목표여야 할까?” ---「파투산으로 돌아가다」중에서 신이 되는 게 그렇게 끔찍한 일일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인류는 처음으로 돌도끼를 만들면서, 처음으로 불을 일으키면서부터 자신을 초월하려 했으니까요. 돌도끼를 가진 자는 도구가 없는 자에 비교하면 신입니다. 한 회장이 하려고 한 건 작게 보면 그냥 늘 하던 작업의 연장이었고, 크게 보면 빈약하고 초라한 육체를 극복하려는 인류 여정의 당연한 일부였습니다. ---「‘뜻밖의 범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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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우주 시대를 맞이하는 인류사의 변곡점
경이로운 시대에 펼쳐지는 치밀한 추리 싸움, 격전의 순간들! 대기권 밖까지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생긴다는 건 우주로 가는 물류비용이 좀 싸진다거나, 관광하기 좋아진다는 것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평형추』의 거대 다국적 기업 LK가 궤도 엘리베이터를 세우고 난 후, 인류는 본격적으로 우주 시대를 실현하게 된다. 대기권 밖에 대규모 원통형 식민지를 만들어 사람들이 그 안으로 이주하고, 목성과 토성 사이 궤도에 수백 개의 망원경을 띄워 몇 광년은 떨어진 별무리를 눈앞에서 보듯 거대한 눈을 갖게 되고, 성간 우주로 수천 대의 탐사선 군집을 내보내는 일이 현실이 된다. 궤도 엘리베이터의 건설은 그만큼 인류사의 돌이킬 수 없는 분기점이 되는 시기를 뜻하며 『평형추』는 바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적도 근방에 솟아 있는 빽빽한 열대림의 섬 파투산. LK는 이 섬에 궤도 엘리베이터를 세우고, 섬은 지구의 관문이 된다. 정지위성에서 위아래로 늘어뜨린 ‘거미줄’은 한쪽으로 파투산에 닿고, 다른 한쪽은 평형추로 향하며 가늘고 긴 궤도 엘리베이터를 구성한다. 여기서 평형추의 역할은 원심력으로 줄을 잡아당겨 그 장력으로 엘리베이터의 구조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 거대한 구조물이 시작되는 섬은 원래 거의 폐허가 된 휴양지였지만, 건설이 시작되자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며 국제도시로 다시 태어난다. LK의 고 한정혁 회장은 수많은 에스컬레이터가 도시 전체를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완벽한 시스템의 도시 ‘아콜로지’를 건설하고, 궤도 엘리베이터의 ‘거미줄’은 두께를 더해가며 우주로 향하는 길을 끝없이 넓힌다. 그러나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는 법. 파투산 정부는 껍데기만 남았고, LK가 아무리 돈을 뿌려도 원주민들은 여전히 불만이다. 결국 파투산과 주변의 두 개의 섬 어딘가에서 ‘파투산 해방전선’이 탄생한다. 『평형추』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해방전선과 그 주변을 맴돌며 한몫 챙기려는 무리를 추적하고 다루는 사람, 바로 LK 대외업무부의 수장 맥의 이야기로부터. 하늘 위 평형추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 신의 영역으로 향하는 자들의 장엄한 쾌락이 아닌가 맥은 파투산 인근 섬의 빈민촌을 습격해 암살사건 용의자의 체포 작전을 수행하던 중 수상한 한국인 남자를 발견한다. 모두들 제모를 하는 시대에 얼굴 수염을 안 지운 이십 대 후반의 남자. 그럭저럭 잘생긴 편이지만 어딘가 꾀죄죄한 이 사람은 LK 신입사원 최강우다. LK 직원을 포섭하려는 해방전선은 파투산의 나비에 푹 빠진 최강우가 환경주의자일 테고, 그러니 반기업주의자일 거라 멋대로 생각해 먹잇감으로 삼는다. 해방전선 측 인물인 것으로 짐작되는 Z. S.는 우연을 가장해 최강우에게 접근하고, 둘의 만남을 알게 된 맥은 최강우에게 도청 장치를 달아 접선 장소로 향한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맥은 자신의 정보력을 활용해 최강우를 둘러싼 일들이 거대한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이상하게도 궤도 엘리베이터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조금 다른 사람이 되는 최강우. 이 남자는 엘리베이터 이야기만 나오면 나비를 좋아하는 멍한 청년이 아니라 유창한 지식을 쏟아내며 열변을 토하는 다른 인간이 된다. 맥은 그럴 때마다 은근한 익숙함을 느낀다. 그는 누구일까? 이 익숙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알 수 없는 존재 최강우에게 파투산을 주시하는 세력들이 피 냄새를 맡은 파리 떼처럼 몰려들고 그들의 앞날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맥과 최강우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들은 거대 다국적 기업 LK와 궤도 엘리베이터, 그리고 저 하늘 위 평형추를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며 위태로운 모험을 감행한다. 생존을 위해, 그리고 뜯어먹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다 뜯어먹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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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시작하는 마음으로 듀나의 소설을 펼친다. 튜토리얼은 생략되고, 충격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없이 곧바로 이야기 속으로 내던져진다. 명확한 지시나 준비된 지도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모든 것을 직접 파악해내야 한다. 어지러운 정보들과 점멸하는 이미지들 사이를 탐색하며 걷는 일은 고도로 능동적인 경험이다. 묘하게 중독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의미와 무의미가, 아름다움과 추함이, 익숙함과 낯섦이 무심하게 교차하는 이질적인 세계에 언제까지고 머물고 싶어진다. 그 세계가 전혀 부드럽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부서지고 삼켜지고 잠시 존재했다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도 말이다. 듀나의 소설이 주는 독특한 쾌감은 대체 불가능하다. 작가를 AI로 만들어서 영원히 쓰게 하고 싶다면 위험한 고백일까? - 정세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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