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차별은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고유하게 부딪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은 사라져야 할 것이지만, 그/녀들에게서 사라져야 할 것이 된다. 나나 너는 차별을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그/녀들이 겪는 어떤 피해가 차별이 된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므로 ‘우리’는 차별을 없앨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그/녀들이 말한다. 나, 나야, 네가 부른 그/녀가 아니라 너를 부르는 나, 나라고.--- 「책을 내며」
이 책은 민족지학적 허구(ethnographic fiction)로서의 글쓰기가 이야기꾼의 말하기를 만났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독특한 몸체를 지니고 있다. (…) 책에 실린 글은 차별을 겪은 사람들이 ‘들려준’ 삶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글쓴이들은 반차별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오래오래 고민한다. 선언적 명제가 아닌 감수성의 차원에서 반차별 운동을 펼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차별을 겪는 사람의 느낌을, 몸에 새겨진 그 경험을 그/녀의 삶의 맥락에서 도려내지 않은 채 통합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그/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작은 지진처럼 그들을 흔들고 ‘먹먹하게’ 만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의 숨결을 살려내는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삶을 들려주는 이들의 목소리와 글쓴이들의 손이 함께하는 글. 오랜 고민과 여러 번의 실험 끝에 이 책에 실린 글들이 탄생했다.--- 「추천사」
제가 어떻게 미혼모가 됐는지 궁금하겠죠? 미혼모가 된다? 이 말도 좀 이상하군요. 저는 임신 사실을 알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고, 아이의 아빠 되는 남자와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이후로 4년째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을 뿐입니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고민하게 될 선택의 순간들을 거쳐 온 것이죠. 여러분들이라면 제가 놓였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p.23
그래도 누군가 미혼모라서 뭐가 제일 힘드냐고 굳이 물어보면 제 대답은 분명해요.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보는 게 싫다. 다른 건 제가 무시해버리니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왜 유독 미혼모나 미혼모의 자녀는 아주 큰 결핍을 안고 있는 사람들인 양 볼까요? 남들이 정상가족이라고 흔히 부르는, 엄마도 아빠도 있는 가족에게는 결핍이 없나요? 무관심, 방치, 폭력, 이런 문제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여러 가지 결핍 중에 하나일 뿐인데,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면, 좀 웃겨요. 저랑 나이가 똑같은 아가씨가 장학금을 받고 졸업했다고 하면, 그건 별 뉴스도 아니죠. 그런데 제가 그랬다고 하면, 정말 장하다고 얘기하겠죠. 세상 모든 엄마들이 공부할 수 있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냥 엄마가 아니라 미혼모니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죠. 그것도 편견 어린 시선이 아닐까요?--- p.30
저는 병원에서 얘기하는 ‘성별주체성장애’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주체성을 상실한 적이 없거든요. 저는 항상 저의 주체성만은 잃지 않아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면 살아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여성이라는 저의 주체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에서도 이걸 인정해서 저의 법적인 성별을 여성으로 바꿔주기를 요청합니다.--- p.52
그런데 그녀가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사는 이유가 그녀가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일까요? 그녀가 일찍 집을 나가야 했고 안정적인 직업을 구하지도, 가족을 꾸리지도 못한 채 여러 차례 수감 생활을 보낸 후 40대 후반의 나이인 현재까지도 빈궁하게 지내는 이유가 그녀의 성별 정체성이 남달랐기 때문만 일까요? 그것이 소위 그녀가 겪는 차별의 ‘근본적 원인이자 단일한 원인’인 게 과연 맞을까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그녀가 가난하기 때문에 아직 수술과 성별변경을 못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수술을 못하고 법률 상 여자로 공인되지 못한 몸이라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p.63
새 아빠는 어머니 고향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버지 고향이 미국 캘리포니아인 사람이야. 오히려 자기가 흑인인데 괜찮겠냐고 물었지. 엄마는 전혀 상관이 없었어. 한국 사람이든, 나이지리아 사람이든, 베트남 사람이든지 간에 나라가 아니라 그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엄마는 첫 번째 결혼을 통해서 알게 됐거든. 그리고 생김새 때문에 무시하는 건 엄마도 많이 당해봤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지. 엄마는 새 아빠가 한국 사람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한다고 느꼈던 것 같아.--- p.79
정현은 필자에게 자신의 커밍아웃에 대해서 어떤 순서로, 말하자면 어떤 계기와 인과성으로 들려주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정현이 성정체성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생애주기에 따른 ‘키스’라는 성애적 경험으로 들려주었다. 또한 필자는 정현의 경험들이 게이가 된 계기 혹은 게이로서의 자기 확신으로‘만’ 해석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성애적 경험은 중요한 경험이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p.112
지금도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가면 나와 같은 치료를 받는 중고등학생 또래 애들이 보인다. 그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왜 병원에서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구는지 알 수 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장애가 잘못인 마냥 여기게 될까 괜히 걱정된다. 걱정하지 마. 너는 예뻐. 너는 건강해. 너는 그냥 다를 뿐이야. 내가 예쁘다는 말을 기다렸던 그때처럼 그 아이에게 반가운 말을 건네고 싶다.--- p.155
단지 민우가 ‘감염인’이기 때문에 상대를 더 많이 이해해야 한다거나 억울한 부분도 세세히 따져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감염인이 ‘특별한 사람’이 아닌 ‘주변의 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스스로 필사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감염 여부를 드러내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여기는 민우의 생각에는 ‘별 문제가 없어야’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획득하고, 차별에 대한 발언권을 얻거나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감염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혹은 자주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p.191
변두리스토리의 주인공들이 ‘차별’이라고 이름 붙여 기억하는 경험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그 경험들을 조각 맞추듯 이어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보인다. 변두리스토리의 주인공들이 각자 ‘차별’로 지목하는 것과 변두리스토리를 읽는 독자들이 ‘차별’로 읽어내는 것이 다를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차별이 우리 모두의 삶에 일관되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차별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나 막막하고 광대한 세상이지만 거기에서 불현듯 솟아오르는 어떤 사건들은 우리에게 실마리를 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사건을 경험할 뿐이다. ‘사건’으로 기억할 만큼 소화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저마다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배경이 된다.--- p.264
비가시화 된 존재를 드러내고 마주침의 장소에서 서로를 억압하거나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 그 곳의 판을 흔들고,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하는 것. 닥쳐오는 불운이나 억울한 일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자 했을 때 그것을 목격한 이가 증언자가 되고 그 옆에 자리하는 것. 그리고 그 차별을 정성을 다해 설명하고자 계속 애쓰는 것. 그리고 차별에 대한 법적인 구제의 과정을 사인간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법적인 구제 의미가 사회 관행과 권력을 바꾸어나가는 것을 지향하도록 견인하는 것. 이것이 문제를 보편화하는 방향이 아닐까.
--- p.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