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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호신 크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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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28쪽 | 326g | 140*205*20mm
ISBN13 9788954447539
ISBN10 8954447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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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혼자 알아서 살 테니까 넌 그냥 원래대로, 네가 살던 곳으로 가.”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는지 크리커가 내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나는 그 손을 야멸차게 뿌리쳤다.
“난 수호신 따위 필요 없어.”
크리커는 더 이상 날 붙잡지 않고 벤치로 가서 앉았다. 벤치에 웅크려 앉은 모습에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어둠이 스민 나무 그늘 아래에 서서 크리커를 관찰했다.
“다시 들어가려고 해도 못 들어가. 그래서 돌아갈 수 없어. 가고 싶어도.”
“그게 무슨 소리야?”
크리커는 작은 목소리로 “미안해”라고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벤치로 다가가 크리커 옆에 앉았다.
“십대의 수호신은 그 보호 대상이 아끼는 사물에 깃들어 있어. 그런데 한번 세상에 나오면 퍼즐을 채울 때까지 돌아갈 수가 없어. 내가 퍼즐을 다 채워야만, 그러니까 내 그림자가 온전히 드러나야만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크리커 말에 따르면 그 애의 퍼즐은 내가 성장할 때마다 하나씩 채워진다고 한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뭐, 이런 소설 같은 일이. 크리커가 말하는 퍼즐인지 뭔지를 전부 채워야만 다시 내 목걸이의 크리커로 돌아간다는 소리였다. 엄마가 남겨 준 크리커를 되찾으려면 좋든 싫든 이 여자애가 하루빨리 퍼즐을 찾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분통이 터졌다. 내가 도와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왜 멋대로 나타나서 엄마의 손길이 묻어 있는 물건을 사라지게 했단 말인가!
--- p.36

뭘 알고 싶냐는 듯한 눈빛을 내는 여자애에게 나는 차마 ‘너에게 어쩌면 수호신이 생길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만나러 가 보지 않겠니?’라든가 ‘지난 주말에 혹시 응급실에 의식 잃은 채 실려 오지 않았나요?’라고 물어볼 배짱이 없었다. 사실 그건 용기나 배짱의 문제가 아니라 배려였다. 다짜고짜 크리커를 떠넘길 예정인데 적어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뭘 물어보고 싶은데요?”
“혹시, 양궁 좀 가르쳐 줄 수 있나 해서요.”
“아.”
부정적인 느낌의 감탄사였다. 실패할 수는 없었다. 십대라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크리커는 퍼즐을 채워야만 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한 사람을 제자리로 돌려보낸다는 것, 제 인생을 살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은 어차피 쉽지 않은 일! 어느 세계에서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그래서 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양궁 선수였어요. 그런데 돌아가셔서 이제 양궁을 배울 기회가……. 미안합니다.”
타인의 마음을 공략해서 내 잇속을 챙기는 방법 같아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지만 내가 가진 수는 여기까지였다.
“아, 그래요. 그럼.”
포니테일, 아니 양해윤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결에 그 손을 잡았다.
“하이파이브 하자는 거였는데.”
“앗, 죄송.”
--- p.75

방문이 열리고 보현 스님이 들어섰다. 승복은 바지만 입은 채, 위에는 쫄쫄이 운동복 차림이었다. 괴상망측한 스님의 차림새에 일순간 지승현과 권승재가 얼음 상태가 되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스님의 저 차림새가 의도하는 바를 나는 똑똑히 알았기 때문이다.
스님이 저 차림을 하는 순간, 일각암은 부처님의 집이 아니라 그저 훈련소가 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옷 갈아입었으니 지금부터 시작한다.”
“뭐를요?”
“정정당당 수행!”
보지도 듣지도 못한 수행법이었다. 세상에 그런 수행법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크리커가 생끗 웃더니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하겠단다. 복습하라고 찍어 두는 거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니들이 투견도 아닌데 개싸움을 할 수는 없는 법! 어른 뒀다 어디 쓸래? 이럴 때 도움 청하라고 어른이 있는 거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공정하게 제대로 싸우는 법을 배우고 싸워라.”
“그래서 여기에 부른 거예요?”
“당연하지.”
보현 스님의 말에 우리 셋 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스님은 제 할 말을 끝내고 진지한 얼굴로 합장을 하더니만 사나운 파이터의 모습으로 돌변했다. 만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우리가 만화 속 캐릭터가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 열일곱 고등학생이라는 데 있었다.
--- p.126

관심 밖이었던, 깊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권승재, 지승현과 주말마다 산을 올라 일각암으로 향하고 땀을 흘렸다. 일상의 그저 그런 평범한 움직임인데 이상하게 모든 풍경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의 중심에, 귀퉁이에 크리커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해맑게 웃으면서. 기절했다가 공원 벤치에서 처음 눈 떴을 때 마주한 그 작은 얼굴이 내 주위의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크리커가 연주 무리와 하이 톤 음색으로 웃으며 장난치고 있었다. 평범한, 딱 고1 여자애의 모습으로 수다를 떨면서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모습에 나는 수호신의 이미지에 대해 다시 곱씹었다. 전지전능한 능력도 없고 함수 문제 앞에서도 쩔쩔매는 크리커. 자신의 능력 부족을 숨기거나 속이려 하지 않고 도와 달라고 당당하게 부탁하는 크리커. 누군가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하는 크리커. 그리고 그 옆에서 물들어 가는 나.
“이한조! 우리가 도와주면 안 될까?”
그럴 때마다 나는 온몸으로 크리커의 목소리를 받아들였던 거다. 크리커의 외침이 내 팔과 다리를 움직였고 마음 안으로 스며들었다.
--- p.173

어제 우리는 김윤기를 그렇게 만든 녀석에게 경고했다. 직접 만나서 한 것은 아니고 인스타그램으로 메세지를 보냈다.
“그놈이 읽은 건 확실하지?”
지승현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잠자코 카레를 떠먹던 크리커가 입을 열었다.
“확인했는데도 무시했다는 거네. 학폭위에서 김윤기가 먼저 시비를 걸고 잘못한 거라 했다고?”
지승현이 휴대폰으로 캡처한 사진 하나를 보여 줬다. 김윤기를 폭행한 녀석들이 병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잠든 김윤기를 배경으로 브이를 그리며 포즈를 취한 모습이었다. 사진을 올린 날짜가 학폭위가 있던 날이었다. 사진 아래 적힌 글이 가관이었다.
‘어쩌냐?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데.’
“와, 이 새끼들! 지옥에 보내 줘야겠네. 나도 안 가 본 지옥, 먼저 보내 준다!”
권승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바람에 숟가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흠칫 놀라 뒷걸음쳤다. 내가 봐도 권승재는 양아치들을 한 트럭 정도는 지옥으로 보내고도 남을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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