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운동, 혁명의 혁명, 사고의 사고, 비판의 비판, 희망의 희망. / 변화와 관련된 소중한 것들은 한 번 더 거듭되어야 진정 소중해진다. / 그리고 물음의 물음. / 그렇다. 결국 쓰려던 것은 물음이다. // 당신의 물음을 위한 나의 물음이다. / 우리가 묻고 되물으며 옮긴 걸음만큼 세계는 이동할 것이다.
--- 「프롤로그 : 물음을 위한 물음」 중에서
“내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다. 이 무력감을 나만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무력감을 제대로 파고들 수만 있다면, 그 분석의 수취인이 자신만은 아닐 것이다. 불행한 시대에는 개체가 자신의 불행을 분석해 타인과의 소통을 기도하는 길이 열리는 게 아닐까. 거기서 공동의 무기를 벼려낼 수 있지 않을까.”
--- 「1. 이 시대의 정신승리법」 중에서
“나는 떠나가는 관심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비록 사건의 현장에 있지 않지만 뭔가 해야 했다. 사건의 현장에 있지 않은 채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이란 일본이 치른 막대한 희생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그 희생의 하중을 이식하는 것, 아울러 그 희생을 사상의 차원에서 의미화해서 일본을 대하는 기성의 인식 패턴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는 것이었다.”
--- 「2. 후쿠시마 사태 그리고 스침의 시간」 중에서
“그런데 곱씹어보면 ‘사회 분열 세력’은 그다지 틀린 표현이 아닌 듯하다. 유족들에게는 지금 현실이 현실 같지 않고 말이 말 같지 않고 정치가 정치적이지 않고 사회가 사회적이지 않다. 불가능한 요구가 아닌데도 유족들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라고 매도당했다. 이 사회가, 이 현실이 유족들의 존재를 사회 분열적이라고 내몰고, 유족들의 요구를 비현실적이라고 낙인찍었다. 따라서 그러한 유족들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한 사회는 균열이 나고 현실은 찢겨야 한다.”
--- 「3. 세월호와 역사를 사는 자들」 중에서
“재난은, 확실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 피해와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하며, 그건 재난으로 드러난 사회의 병폐를 직시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사회의 병폐 이면에 있는 구조적 모순은 표면이 조금 벗겨졌다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잡아 뜯고 뚫고 들어가 닿아야 한다. 그로써 재난은 탈구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사회관이 흔들려야 한다.”
--- 「4. 재난 이후」 중에서
“지금은 가산하는 시간이 아니라 도약하는 시간이다. 미래로 다가가는 시간이 아니라 미래를 품어내는 시간이다. 달라질 미래를 위해 과거를 새롭게 불러들이는 시간이다. 과거와 재회해 미래를 선취하는 시간이다. 내게 그 과거란 힘이고 사건이고 희생이며, 침전된 가능성이고 실천의 참조점이고 못 이룬 약속이다. 지금은 그 과거들을 여기저기서 불러내고 기워내 미래를 산출할 인식론적 지도를 작성할 때다. 그렇게 지금은 도약하는 시간이 된다.”
--- 「5. 촛불과 지금에 대한 발제문」 중에서
“논의가 내부의 숙덕임에 불과해지고 말 때 지(知)는 치(痴)로 변질된다. 세계가 게토화될 때 경험의 소재는 늘어나더라도 경험의 영역은 비좁아진다. 거기서 지는 쌓여 치가 된다. 반지성주의는 (집단지성이 아닌) 집단치성의 징후다. 증오와 혐오의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걸 공익을 지키는 불가피한 말로 착각할 수 있는 곳에 반지성주의는 있다.”
--- 「6. 반지성주의와 말기의 시간」 중에서
“그 장면을 제대로 장면으로 만들려면, 즉 면으로 펼치고 장으로 일으키려면 숱한 단편들을 이어 붙이고 쌓아야 한다. 그러면서 타인에 앞서 자신이 그 장면을 이해하게 된다. 타인에게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를 파고들게 된다. 그건 어떤 기억의 형성 과정이지 않을까. 기억들이 쌓여 생겨나는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은 가득 충전된다. 그런 기억은 그 기억을 접하는 타인에게도 손을 뻗는다. 그에 앞서 자신을 움직인다.”
--- 「7. 4·3과 기억의 모습」 중에서
“책은 ‘(저자가) 사고하다-쓰다-(독자가) 읽다-논하다’라는 동사들과 결부되어 있다. 한 권의 책은 이 동사들을 거쳐 간다. 그런데 한 번의 거쳐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책이 다시 ‘사고하다-쓰다-읽다-논하다’를 겪게 할 수는 없을까. 답하지 못한 저 물음들이 더해지고, 답하지 못한 저 물음들을 사고해 다시 작성하고, 책이 만난 목소리들이 보태지고, 그 목소리들을 사고해 다시 작성하고, 그렇게 재형성된 책이 다시 읽히고 또 새로운 물음과 목소리를 만나고 …. 그렇게 타인의 고민을 타인이 이어받으며 시간이 쌓이고 문장이 늘어나는 책.”
--- 「8. 책의 펼침, 장의 펼침」 중에서
“그가 말했듯 함께 살아가기가 아닌 홀로 살아남기를 요구받는 사회, 내가 느끼듯 존재가 거처와 관계를 잃고 홀로 배회하는 시대에서 대피소는 징후적인 것이다. 앞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다. 대피소는 이곳저곳에서 필요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사고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대피소가 구해진 사람들을 맞이할 뿐 아니라 구해야 할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어떠한 대피소의 정치철학이 필요할 것인가.”
--- 「9. 대피소의 문학, 곡의 동학」 중에서
“코로나 시대, 코로나 팬데믹으로 불리는 지금의 위기는 갑자기 닥쳐온 것이나 언젠가 어떤 형태인가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위기는 지난 일상에서의 탈선처럼 보이나 지난 일상이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의 비상 상황은 기존의 정상이 비정상적이었음을 폭로한다. 그렇다면 기존의 정상이 금 간 틈 사이로 우리는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인가. 그로써 위기가 드리운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 아닌 미래의 기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10. 코로나19, 2020년대는 이렇게 다가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