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11월 01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56쪽 | 312g | 137*218*12mm |
ISBN13 | 9788958207443 |
ISBN10 | 8958207442 |
발행일 | 2021년 11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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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56쪽 | 312g | 137*218*12mm |
ISBN13 | 9788958207443 |
ISBN10 | 8958207442 |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 헬렌 한프, 1969년 4월 11일 편지에서
미국 뉴욕에 사는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와 영국 런던의 중고서점(마크스 서점)을 운영하는 주인과 직원은 1949년부터 거래를 시작한다. 작가는 책을 요청하고, 서점에선 요청한 책과 관심가질 만한 책을 보내준다. 20년 간 거래는 이어지고, 편지도 이어진다. 아무리 거래라고 하지만, 20년 간 편지를 주고받다보면 감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작가는 원하는 책을 구해달라고 하면서, 전후 사정이 좋지 못한 영국에다 식료품도 보내주고, 필요한 것들을 함께 보내준다(이를테면, 성탄절 선물로 햄과 달걀을 보낸다). 서점에선 그녀가 원하는 책과 좋아할 만한 책을 찾아내고 보내주면서 감사의 인사와 함께 꼭 런던에 들르기를 소망한다(손수 수를 놓은 식탁보를 선물하기도 한다). 성공하지 못한 작가였던 헬렌 한프였기에 꼭 읽고 싶은 책을 그렇게 중고서점을 통해서 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궁핍한 삶이었지만, 서점 역시 풍족하지 못하고 겨우 운영하는 처지였지만, 말하자면 거래를 넘어선 인간적인 교류를 하게 된 것이다.
뭐랄까, 감동이라고 하기에는 극적인 장면은 없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지는 관계에는 깊은 느낌이 있기 마련이고, 이 책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책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는.
예전에 본 영화 때문에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 책 제목 그대로 나온 영화는 아니고, <북 오브 러브>라는 탕웨이가 나오는 영화였다(https://blog.naver.com/kwansooko/221247440028). 아버지를 여의고 카지노 도우미로 힘겹게 살아가는 여인과 미국으로 이민 가서 공인중개사로 살아가는 남자가 책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그 책이 마로 이 책, 『채링크로스 84번지』였다. 거기서도 여자와 남자는 편지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결국은 채링크로스 84번지에서 만난다. 그리고 잊었었다.
그러다 이레네 바예호의 『갈대 속의 영원』에서 이 책을 다시 접했다(http://blog.yes24.com/document/17910474). 그 전후의 이야기와 함께. 그리고 또 비슷한 시기에 박균호 선생의 독서 칼럼에서 이 책 얘기를 읽었다(https://www.hangyo.com/news/article.html?no=98747). 어쩌면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었던 책을 꺼내는 느낌으로 읽었다. 따뜻한 책이었다.
* 헬렌 한프는 마지막 편지에서 마크스 서점이 그대로 있다고 했지만, 헬렌이 나중에 방문했을 때는 서점은 문을 닫았고, 푯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친애하는 헬렌에게
당신이 이 편지를 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25년 전 세상을 떠났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꼭 당신을 향해 글을 남기고 싶었답니다. 아무래도 당신의 책 때문이겠지요. <채링크로스 84번지> 속 당신과 프랭크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며 당신이 몹시도 부러웠습니다. 책의 가치를 아는 시대를 살았고, 가난해도 책 한 권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하는 당신의 모습이 저를 설레게 했답니다. 당신은 대단한 장서가도 아니고, 우아한 책 수집가도 아니었지만 당신이 원했던 책들에 진심이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아마 프랭크도 당신의 그런 마음을 이해했기에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당신이 원하는 책들을 찾아 다녔겠지요.
저도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책을 좋아한답니다. 새로 나온 책, 누군가 추천한 책, 지금 필요한 책, 나만 재밌어 보이는 책, 금방 절판되어 버릴 것만 같은 책, 지금 당장 읽지 않을 걸 알면서도 사서 쌓아두면 한 번은 훑어볼 책 …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책장에 차곡차곡 쟁여둡니다. 아직도 제 책장엔 읽을 책이 가득한데도 또 사고 또 사게 됩니다. 이건 마치 종말을 대비하여 생필품을 비축하는 프레퍼족(Prepper, 준비족)과 같은 심정입니다. 책의 종말을 대비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만약 제가 당신이었다면 프랭크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제 편지를 보자마자 불살라버리지 않았을까요?
사실 당신 덕분에 좋은 작가와 작품들을 많이 알게 되었답니다. 새비지 랜더, 존 던, 새뮤얼 페피스, 리 헌트, 애디슨과 스틸, 델러필드, 아이작 월턴, 스턴, 토크빌 등등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영미문학의 대가들을 제가 어떻게 접할 수 있겠어요? 아직 그들의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번역조차 안 된 작품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들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지적 수준이 한 단계 상승한 느낌입니다. 언젠가 그들의 책을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고 제 수입 목록에 잘 기입해 두었답니다.
헬렌, 당신의 책을 읽으며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책에는 싣지 못한 편지가 더 있을 것 같다고요. 분명 더 많은 편지들을 주고받았을 텐데 군데군데 비워진 듯 했어요. 너무 개인적인 내용이라 책에서 밝힐 수 없었을까? 아니면 이사를 다니면서 소중한 편지들을 안타깝게 분실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싫지만 권위적인 편집자가 자기 입맛대로 빼버렸다면… 이렇게 멋대로 상상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프랭크와 마크스 상회 직원들, 그들과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바람 때문일 겁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식량과 자원이 부족하여 영국에서 한동안 배급제를 실시했다는 것을 당신의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된 사실입니다. 당시 당신의 나라 미국은 전쟁으로 호황이었는데 유럽은 전쟁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생이 많았겠지요. 당신이 프랭크와 마크스 상회 직원들을 위해 식료품을 사서 보냈을 때 그걸 받아든 그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고마웠을지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었답니다. 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70년이 지난 지금도 코로나 팬데믹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 유럽이 휘청거립니다. 러시아의 정신 나간 지도자 때문에 러시아산 가스공급이 막혀 올겨울을 아주아주 혹독하게 보내야 한대요. 당신의 나라 미국은 중국과 신 냉전주의로 가고 있고요.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헬렌, 당신 덕분에 가보지도 않은 영국 런던 어느 번화가의 주소를 외우게 되었네요. 물론 베이커가 221B 다음으로 말입니다. 이젠 당신의 부탁대로 대신 입맞춤을 보낼 그 곳은 동판만 남은 채 사라지고 없지만, 언젠가 영국에 가게 된다면 나의 무의식이 그곳으로 이끌 것만 같아요. 누군가가 그 멋진 고서점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 프랭크가 당신만큼 살았다면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적어도 마크스 상회에 대한 책 한 권은 쓰지 않았을까요?
당신과 프랭크의 극적인 만남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결말이었는데, 결국 이 책을 내고 나서 <마침내, 런던>을 가게 되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당신의 두 번째 책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지 정말 궁금하네요.
헬렌, 왠지 하늘나라에서도 프랭크를 괴롭히고 있을 듯합니다. 두 분의 우정이 저 세상에도 아름답게 이어지길 바라며. 두서없는 글 이제 마칠게요.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