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3년 07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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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11쪽 | 427g | 132*224*30mm |
ISBN13 | 9788937460814 |
ISBN10 | 8937460815 |
발행일 | 2003년 07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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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11쪽 | 427g | 132*224*30mm |
ISBN13 | 9788937460814 |
ISBN10 | 8937460815 |
불행 중 다행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고
어디선가 톱질과 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 애정(이라고 쓰고 애증이라 읽어도 무방)한 이와의 영원한 작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아들 캐시가 몸져누운 어머니 애디의 '관(棺)'을 만들고 그 모습을 애디가 바라본다. 둘째 아들 달과 셋째 아들 주얼은 3달러를 벌기 위해 집을 나섰고, 넷째이자 집안의 유일한 딸 듀이 델은 어머니 곁에서 연신 부채질을 해댄다. 막내 아들 바더만도 가계 경제에 보탬이 되고자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데, 애디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 앤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모든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애디의 죽음 앞에서 번드런네 사람들의 수상한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날 온가족이 애디의 유언에 따라 고향 땅에 시신을 묻기 위해 영면한 애디의 관을 싣고 40마일이 넘는 길을 떠난 것이다.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이렇게 시작한다. 소설의 서사뿐 아니라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퍽 흥미롭다. 59개의 장(章)이 화자의 시점을 특정인으로 고정하지 않고, 번드런 가족과 더불어 그들과 관계를 맺은 이웃 부부, 의사, 목사, 청년들 등 총 15명의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처음에는 말하는 이가 많다 보니 마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책의 갈피를 잡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하나 애디 역시 그 누구보다 힘주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그렇지만 고삐를 당기듯 각 장에서 화자인 '나'를 찾아낸 다음에 그들이 전하는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좇아가다 보면 곧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려는 여러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먼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소설의 구성적 측면에서 볼 때 애디의 이야기는 단 한 장뿐이다. 그러나 각 장에서 남겨진 이들의 목소리로 애디의 삶이 어렵지 않게 재구성된다. 애디는 한평생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191쪽)"라는 아버지의 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다. 결혼 전까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일과 결혼 후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까지도 의무적으로 수행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출산한 뒤부터는 스스로를 죽은 존재로 인식하여 남은 삶을 말 그대로 '죽어 있을 준비'를 위한 나날들로 메꿔나가기에 이른다. 번드런네 가족이 죽어가는 애디를 대하는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 누워 있을 때까지도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는 본연의 나를 비롯하여 교사, 배우자, 어머니로서 1인 다역을 소화해야 하는 한 개인으로서,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과연 타자의 저울(시선)로 가늠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다음으로 앤스라는 인물을 통해 '신념(집념) 혹은 '욕망'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된다. 문득 청개구리 우화가 떠오른다. 자신의 무덤을 개울가에 만들어 달라는 엄마의 유언만큼은 꼭 따르고자 한 아들과 같이, 소설 속 앤스는 애디가 살아생전 남긴 말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는 집념을 보인다. 아울러 이보다 앞서 젊은 시절 땀 흘려 일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부터 땀을 흘리는 날이 곧 자신의 제삿날이라고 선언하며 나머지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나가는 걸 두 손 놓고 바라만 본다. 아이들이 차례대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얻어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속도에 맞춰 강행군하는 그를 보면서 그래도 아버지라고 불리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목적지에 다다라서 드러난 그의 민낯에서 집념이 아닌 집착의 눈빛을 발견하는 동시에, 인간의 욕망이 이토록 비루하고 잔인할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또한 목수일이든 어떤 것이든 매사 균형미를 중시하는 캐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미치광이로 보이지만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달, 따뜻한 말(言) 한 마디 주고 받기 어려운 가족보다 말은 못하더라도 교감할 수 있는 말(馬)을 더 애정하는 주얼, 원치 않았으나 죽음과 생명은 계속 교차됨을 몸소 보여주는 듀이 델, 불가해한 죽음마저도 동심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에) 하려는 바더만. 어머니의 부재 이후 각자가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는 번드런네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다. 그밖에 종교적 신념으로 번드런네 식구들을 평가하는 이웃 부부와 종교적 윤리를 벗어나 번민하다 애디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정신승리에 도취된 목사를 보면서 어쩌면 삶이란 부조리한 것투성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또다시 머릿속을 스친다.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매순간 옳고 그름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우리의 일임을 모르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저마다 크고 작은 차이를 그려낸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불행 중 다행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 같기도 하다. 이처럼 독자로 하여금 소설 안팎의 것들에 대하여 다채로운 해석을 시도하도록 만드는 작품이 바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갖가지 일을 저지른 후, 다시금 똑같은 공포와 놀라움으로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269쪽)"는 캐시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고 소설과 현실 속 그 누군가를 찾아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현대 미국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윌리엄 포크너의 초기작품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미국 남부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포크너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난 어릴 적, 죽음을 단순히 몸의 변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난 죽음을 마음의 변화로 이해한다. 즉 사별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53쪽)
이 책에는 모두 15명의 등장인물이 나오고 59개의 독백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각각의 독백은 화자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족의 구심점이 되는 어머니의 죽음이 임박한 무렵부터 어머니가 죽기 전부터 소망하던 고향 제퍼슨에 묻히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임박하자 목수인 큰 아들은 관을 짜기 시작하지만 임종 전에 마치지 못하는 바람에 마음에 꼭 드는 관을 마련하지 못하고 맙니다. 아버지 앤스는 아내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돈을 벌기 위한 일에 두 아들을 보내지만 제대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출발이 늦어지게 됩니다.
대도시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미국에서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작은 마을 어귀에서 묘지를 만나는 것은 익숙한 풍경입니다. 죽음을 맞을 때까지 살아온 마을 입구, 혹은 집 앞에 묘지를 마련하는 것이 일반인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에디는 자신이 죽으면 꼭 고향에 묻어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아버지 엔스는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족들을 몰아 세우는데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에디의 고향 제퍼슨은 이들 가족이 사는 곳에서 4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니 노새가 끄는 마차로 가더라도 한나절이면 충분할 터인데 마침 쏟아진 폭우로 다리가 떠내려가고 길이 끊기는 바람에 돌아 돌아서 가느라고 열흘이나 걸리게 됩니다. 한여름에 치루는 장례는 이틀만 지나도 어려움이 많은데 열흘이나 걸렸으니 마지막에 보안관으로부터 즉시 매장하라는 압력을 받은 것이 무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큰아들 캐쉬로부터 달, 주월, 듀이 델, 막내 바더만까지 4남 1녀가 마차와 말에 나누어 타고 에디의 관을 호송하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범람하는 다리를 피해서 여울을 건너는 과정에서 떠내려 온 통나무에 마차를 끄는 노새가 미끄러지면서 위기를 맞게 되지만, 노새만 잃고 마차는 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천행이라 하겠습니다. 마차를 캐쉬와 달 둘이서만 타고, 말을 탄 주월이 도와서 여울을 건너면서 아버지 앤스는 딸 듀이 델과 막내 바더만을 데리고 붕괴 위험이 있는 다리를 건너는 장면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결국은 앤스의 비겁한 면모를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면서도 돈을 쓰는 데는 인색한 면모도 엿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면모도 다양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캐쉬는 목수일을 하는데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면서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둘째 달은 모두 열여덟번의 화자로 등장할 만큼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에디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주월은 혼외정사를 통하여 얻은 탓인지 거칠고 겉도는 느낌을 받습니다. 듀이 델은 유일한 딸인데 임신한 것으로 보이는데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혹시 근친 간에 생긴 아이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 독백에서 앤스는 에디를 제퍼슨에 묻고서는 바로 듀이 델이 가지고 있는 10달러를 강탈하다시피 빼앗아가서는 의치를 해 넣고, 새여자를 맞아들여 자녀들에게 소개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보여줍니다. 둘째 아들은 어머니의 관을 보관하느라 머물던 남의 헛간에 불을 지른 혐의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있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작품해설에서는 “가족들의 여정을 자연의 힘에 대항하는 영웅적인 행위로 보는가 하면,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여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후자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사실 에디가 고향에 묻히고 싶다고 한 것은 남편과의 관계가 의미가 없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앤스가 굳이 죽은 아내의 뜻을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자녀들을 압박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혹시 아내의 그림자를 가족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함이었을까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어머니 생전에는 시키는 말마다 거꾸로 하는 아들이 걱정되어 '나 죽으면 물가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어머니 말씀을 지키는 바람에 비만 오면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갈까봐 애타게 운다는 청개구리가 생각난 까닭은 무엇일까요?
작품해설에서도 지적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존재인 어머니를 잃은 가족들의 태도는 다양하다. 그리고 그들의 상실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대체된다. 아버지는 새 의치와 후처를 얻음으로써, 캐쉬는 새어머니가 가져오는 축음기를 기뻐하면서, 듀이 델과 바더만은 바나나를 먹은 일상으로 복귀함으로써 그들 모두의 상실은 쉽게 잊혀질 듯하다. 주얼은 그 특유의 목석같은 성품 탓에, 상실이 그에게 그다지 큰 흔적을 남기기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상실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달은 홀로 정신병원으로 향하게 된다.” 정말 에디는 가족들에게 가장 친밀한 존재였던 것일까요? 그녀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요즘은 리뷰를 쓰면서 꼭 사족을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여울을 건너는 과정에서 떠내려 온 통나무와 충돌하여 떠내려가는 마차를 지키는 과정에서 캐쉬는 다리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앤스는 캐쉬를 바로 의사에게 데려가지 않고 시멘트를 사서 다리를 고정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러진 다리는 굳어진 시멘트 속에서 썩어 들어가는데 시멘트를 부수는 과정에서 피부가 손상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러진 다리는 잘 맞추어서 석고로 고정을 해야 하는데 피부를 감싸지 않고 시멘트를 부어버리는 바람에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여름철에 상처를 입은 피부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염증이 심해지고 다리를 절단하거나 심하면 패혈증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오호?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냐? 두세 장을 넘지 않게 짤막하게 토막 난 글들이 모여 책 한권을 이룬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을 우선 번드런 가의 사람들과 주변인들로 나눠야 하고, 번드런 가의 자식들을 서열 순으로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2/3 지점에 가서야 가능한 일이다. 이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덤벼든 탓에 처음 몇 토막에서는 화자를 찾으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했음도 고백한다. 하지만 이 책이 59개의 독백으로 구성된 소설이라는 기본지식만 알았더라면 쉽게 해결됐을 고민이었다. 아주 친절하게도 소제목들이 바로 말하고 있는 화자였던 것이다. 15명의 등장인물과 59개의 독백, 정말 실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소설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번드런 가의 안주인 애디가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애디의 방 창 앞에서는 장남 캐시가 어머니가 죽어 눕게 될 관을 짜느라 톱질 대패질을 하고 있다. 이 집안의 가장인 앤스는 통나무를 한짐 해서 3달러를 벌어오겠다고 마차를 가져가려는 두 아들 달, 주얼과 실랑이를 벌인다. 애디가 죽게 되면 마차가 필요한데 곧 닥칠 일이니 마차 사용을 선뜻 허락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집안의 외동딸 듀이 델은 죽어가는 어머니 곁에서 여러 날 째 부채질 중이다. 막내 바더만은 이 상황에서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자랑할 정도로 아직 어린 소년이다.
이 가족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우선 가장 앤스는 젊었을 때 큰 사고 이후로 땀을 흘리면 죽게 될 거라는 믿음에 우선해서 이웃의 노동력을 염치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셔츠가 젖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게으르고 권위적이고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인물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확실하게 그 진면목을 보여주신다. 장남 캐시는 연장도구를 소중히 여기는 목수이고, 주얼은 말(馬)을 목숨처럼 아끼는 다혈질의 거친 젊은이다. 듀이 델은 어머니의 임종을 앞에 두고 있지만 현재 임신 중인 이 상황이 더 고민거리다. 어쩌면 가족 중 유일하게 제대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달은 오히려 정신병자 몽상가 취급을 받는다. 죽음은 앞둔 애디는 남편과 다섯 아이들이 있지만 늘 고독하고 외로운 영혼이었고 남편에 대한 사랑 또한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여자다. 그리고 마을 목사와의 불륜으로 인해 태어난 주얼을 목숨처럼 아끼지만 끝내 그 비밀은 함구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는 친정아버지의 말이 그녀의 인생에 알게 모르게 간섭을 했음이 분명한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40마일이나 떨어진 친정이 있는 제퍼슨에 묻어달라고 오래 전부터 부탁을 해온 터였다. 그녀의 이 말과 그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우직함으로 무장한 듯한 남편 앤스의 결심이 이 고난의 행군과도 같은 이야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때는 무더운 여름, 때맞춰 내린 폭우로 강물이 불어 제퍼슨으로 가는 길의 다리들이 거의 다 유실되어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데다 무리하게 강을 건너려다 노새만 잃고 어머니가 누워있는 관마저 물속에서 겨우 건져 올릴 수 있는 상황까지 간다. 그 과정에서 끝까지 관을 지키려던 캐시는 예전에 사고로 부러졌던 다리를 또 다치게 되고, 가뜩이나 더운 날씨인데다 여드레도 넘게 시신을 마차 싣고 다닌데다 물에 빠졌던 애디의 시신은 그 지나는 곳마다 악취를 풍겨댄다. 온 가족이 장례에 참석해야한다는 원칙 아래 부러진 다리로 덜컹거리는 마차에 실려 가는 캐시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시멘트를 발라 고정시키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지시하는 앤스, 이 상황을 끝내려는 달은 가는 길에 신세를 지게 된 농가의 어머니의 관이 자리한 헛간에 불을 지르게 되고 그 일로 결국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된다. 물에 빠진 캐시의 옷을 뒤져 축음기를 사려고 모아둔 돈을 빼돌리고 아들이 목숨처럼 아끼는 말을 제멋대로 팔아치우고 딸의 애인이 낙태를 위해 약을 구입하라고 준 돈마저 빼앗는 아버지는 아내의 장례를 치룬 다음날 새 양복에 의치를 해 넣고 아이들 앞에 나타나 새엄마를 소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난 어릴 적, 죽음을 단순히 몸의 변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난 죽음을 마음의 변화로 이해한다. 즉 사별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53쪽)
온갖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시신을 운반하는 이 가족의 무모하게 우직하고 측은하기까지 한 이 행렬에서 죽음과 남겨진 자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강물에 떠내려가는 어머니의 관을 지키려다 다친 다리에 시멘트를 부어 고정시켰던 아버지 때문에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지경에 처했음에도 새어머니의 축음기를 보며 음악 감상을 할 수 있겠다는 새로운 기대를 품는 캐시처럼 삶이란 그렇게 얄팍한 신의와 맞바꿔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 묻고 싶다.
죽은 자의 생의 시계가 멈추고 남겨진 자의 시계는 무겁게 내리 누르는 슬픔의 무게에도 무심하게 째깍째깍 움직이는 죽음이라는 분기선. 죽은 자의 길은 따라가 볼 수도 없으니 어느 곳을 향해 달리는 지 알 길이 없고, 남겨진 자의 길은 결국 또 다른 죽음이라는 분기선을 향해 나 있다. 산 자의 행보는 죽음을 향해 가서 오랫동안 죽어있기 위함이라면 죽은 자의 행보는? 죽음 이후에 어디론가 연결 되어있을지 단지 소멸의 길을 걷고 있을지 그것은 찰나의 생을 사는 내가 알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자와 산 자는 서로 다른 길 어쩌면 반대 방향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불편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고 고통스러운 이 행보는 번드런 가족만의 죽은 자와 산 자의 이별 방식일 것이다. 목숨처럼 아끼는 말을 어이없이 빼앗겨서 분개하는 주얼도 다리가 부러져 뼈가 덜렁거리는 상황에서 마차에 실려 장지로 향해 가는 캐시도 낙태할 의사나 약사를 찾아야 할 절박한 듀이 델도 죽은 애디를 땅에 묻고 돌아서서 이제 각자의 길로 걸어갈 것이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독백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 가족의 행렬은 이 독백만으로 그 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독특한 서술 방식이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 소설을 두고 ‘이 소설은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거꾸러뜨릴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이 소설이 윌리엄 포크너를 거꾸러뜨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노벨상과 퓰리처상까지 받으며 그 자리를 굳건히 한 작가로 꼽히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초반부에 정신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관성을 이해하기 전, 그리고 이 가족의 고통스런 행렬에 함께 하면서 내가 거꾸러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