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1년 0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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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59쪽 | 290g | 132*225*20mm |
ISBN13 | 9788937460050 |
ISBN10 | 893746005X |
발행일 | 2001년 02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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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59쪽 | 290g | 132*225*20mm |
ISBN13 | 9788937460050 |
ISBN10 | 893746005X |
동물농장 7 자유와 행복 125 나는 왜 쓰는가 133 작품 해설 145 작가 연보 159 |
오엘의 본명은 에릭 블레어Eric Blair이다. 1903년 식민지 인도의 벵골에서 태어났으나 유년기에 영국으로 돌아와 이튼Eton 학교를 다녔고,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있었지만 출신 신분에 맞는 직업을 얻기 위해 진학을 포기, 1922년부터 5년 간 버마에서 대영제국 경찰로 근무한다. 버마에서의 경찰관 경험을 통해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패덕성에 눈뜨게 되고, 이 <개안>이 작가 조지 오엘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파리와 런던에서 접시 닦이, 빈곤 노동자, 거지 등의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고 잠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영국 노동자들의 삶에 관한 조사활동에 참여한다. 1933년 첫 소설 『파리와 런던 안팎에서』를, 35년 『버마 시절』을 출간한다. 1936년 스페인 내전 참가를 전후해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자신의 신념이자 목표로 선택하고 <전체주의>를 적으로 규정한 뒤 많은 평문, 에세이, 소설들을 쓰기 시작한다. 1941년 2차 대전에 나가기 위해 졸병으로 지원했다가 신체 허약으로 거절당하고 대신 영국방송 인도 - 동남아 방송요원으로 일하게 된다. 1947년 『동물 농장』의 성공으로 재정적 안정을 얻고 이듬해 『1984』를 발표한 데 이어 새로운 작품 구상에 들어가지만, 젊어서부터 앓아온 폐병이 악화되어 병원을 들락거리다 1950년 병원에서 갑작스런 각혈 후 사망, 4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한다.(p.158)
그는 앞서 열거한 그의 생애가 보여주다시피, 밑에서부터 활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지식인들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말하자면 살아 있는 교과서였다.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어들게 했던 것은 순전히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알마. 2008)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조지 오엘을 가리켜,
"나는 예전에 조지 오엘에 관한 책을 쓴 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영웅으로 우러러 본 사람이 있었다면 오엘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p.26)
"돼지 공포증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현대의 가장 매력적이고 유용한 우화중 하나인 조지 오엘의 《동물 농장》이 이슬람권에서 여전히 금서로 묶여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p.64)
"세월이 흘러 신이 절대적인 권력을 주었다는 독재자들의 주장이 현대적인 권력 이론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천국의 이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모델로 지상에 유토피아 국가를 건설한다는 사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이상을 명분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에덴동산 같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가 처음 현실로 나타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파라과이에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을 때였다. 이 나라는 최대한의 평등주의와 최대한의 부자유가 결합된 형태였으며, 이 나라를 유지 할 수 있는 수단은 최대한의 공포밖에 없었다. 인류를 완벽하게 다듬고자 했던 사람들이 이 나라의 사례를 경고로 받아들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사실 인류를 완벽히 다듬겠다는 목적(이것은 전체주의적 충동의 뿌리이자 원천이기도 하다)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색체를 띠고 있다.
소설을 통해 전체주의 국가 국민들의 삶을 우리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킨 금욕적인 불신자 조지 오엘은 이 점에 관해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p.336) 라고 써 놓았다. 그러자 필자는 두 가지 질문을 갖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위인일까? 와 "근본적으로 종교적 색체를 띠고 있다."는 말은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자신의 논리를 확고하기 위해 좀 더 확장해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오엘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도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소설은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죽기 전에 남긴 꿈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꿈의 내용인즉, "인간이 사라지고 난 다음의 이 지상에 대한 꿈이었소."이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는 여타의 동물들에게 「잉글랜드 짐승들」이라는 노래를 가르쳐 준다. 이것은 마치 애국가처럼 그들의 노래가 된다. 메이저가 죽고 나서 동물들 중에서는 돼지가 제일 똑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동물들을 가르치고 조직하는 일은 자연스레 돼지들의 몫이 되었다. 메이저의 가르침은 이들 돼지(스노볼, 나폴레옹, 스퀄러)에 의해서 <동물주의>라는 사상체계로 발전된다. 메이저가 예언한 반란은 생각보다 일찍 왔고, 존슨 일가는 동물들에 의해 물러났다. 그리고 곧 그들은 일곱 계명을 발표함으로써 동물들이 준수해야 할 불가변의 법률을 만들었다. 보면, "첫째가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둘째가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셋째,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넷째,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다섯째,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여섯째,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일곱째,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였다. 존슨 일가가 물러나고 잉여물의 착취에 해당되는 노동이 아닌, 노동자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행하는 참다운 노동을 하게 된다. 일요일에는 모두 쉬었고, 일요일 아침 식사는 다른 때보다 한 시간 늦추어 먹기로 했고, 식사후에는 매주 빠짐없이 거행되는 의식이 있었다. 이것은 <동물 공화국>의 체계로 이행되었다. 그리고 총회는 <회의>라는 명칭으로 게재되었고 결의안 제출과 토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때쯤에 그들은 지금껏 메이저 농장이라고 불렸던 이름을 철폐하고 동물농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또한 이때 존슨 일가의 반격이 시행되나, 동물들은 그들을 물리친다. 이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이것을 외양간 전투라 칭했다.
번번히 의견대립이 심했던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문제가 붉어진 것은 스노볼이 발표한 풍차계획으로 인해 도화선이 되었다. 스노볼은 자신이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개를 키웠는데, 그것들을 이용해 스노볼을 무리에서 퇴출시킨다. 그때부터 스노볼은 하나씩 계명의 해석을 달리하며 자식의 권자를 지켜나가는데, 그들 무리에서 스퀼러는 무리의 단점인 무식함을 이용해 나폴레옹의 정치를 합리화 시킨다. 나폴레옹의 입장은 동지에서 지도자로 바뀌고, 그는 어느 순간 모든 것에 신적인 위치까지 이룬다. 일이 실패할 때는 사라진 스노볼을 탓하고 존슨 시대의 회귀에 대한 불안감을 무리들에게 전파시키는 등 악질적인 정치 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인간들과의 거래도 트게 된다. 이유는 모두의 안녕을 위해서라는 거시적인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동물들의 눈에 비친 나폴레옹을 비롯한 돼지 무리들은 전에 있었던 존슨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방관자로 활동하다가 무리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을 때 딱 한번 나서는 당나귀 벤자민이라는 캐릭터가 있다. 그는 회의론자를 대표하는 캐릭터이며, 지금보다 더 나아 질것은 없고 더 나빠질 것이다는 결론을 내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한번도 행동하지 않는다. 어쩌면 무리속에서 일도 하지 않고 불평 불만만 하는 잉여 존재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돼지들이 권력을 상징한다면 벤자민은 무리의 지식인, 철학자로 상징되어도 좋다.
소설을 읽으면서,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말대로 천국의 이상은 허실이며,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대중들은 오히려 독재 체제를 완벽히 동조하는 꼴이 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회의라는 것이 있었지만 스노볼이 권력을 잡고 나서는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았고, 한때 메이저의 무덤에 인사를 하던 풍습도 사라졌다. 이것은 마치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져 내림을 먼저 알고 있었던 조지 오엘의 안목과도 흡사하다. 이상을 향하던 권력이 그 실에 존폐유무가 달릴 때 쯤에 과거로서의 공포를 자극하게 되고, 사람들은 현실의 고통보다 과거의 각인된 공포에 매료되게 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잘 살고 있다는 이상한 논리에 쌓이게 되는데. 지금 어떠한가?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p.123) 어쩌면 이글은 혁명을 부정할 수 도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는 이중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작가가 우려하는 것은 전체주의이다. 어느 쪽으로든 좋은 방향으로 가면 되겠지만, 문제는 좋은 방향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 있다. 얼핏 이런 생각도 든다. 작가가 원했던 것은 무정부주의가 아닐까? 국가주의에 빠져 들며 어쩔 수 없이 전체주의적 사고에 젖어 들게 된다. 젖어든다는 말은 무의식적인 세뇌에 따른 고통을 수반한다.
정리하자면 동물농장은 결론이 없다. 대안 없는 현실을 우화라는 형식을 빌려 보여주고 있는 것 뿐이다. 그렇다. 요즘 유행하는 개그처럼 ~~뿐이고 이다.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고전이 주는 울림이 있다. 끊임없는 자아 탐구의 영역과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경우에 이 울림은 배가된다.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오래 읽히는 책은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다. 특히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두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테다. 1945년 출간된 이래 고전이라는 카테고리 속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일 뿐 아니라 재미 또한 있다. 가끔 고전을 읽을 때 체화하기 어려운 것은 정서의 괴리가 큰 몫을 한다. 『동물농장』은 넓게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소련의 정치, 시대적 상황을 절묘하게 포착해낸 작품이다. 그런데 이 상황이 비단 70년 전 그날로 한정돼있지 않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재, 권력, 자본주의, 평등, 자유, 혁명 등등의 키워드로 읽히는 이 풍자 우화 소설은 반복되는 역사 안에서 인간에게 영원한 과업으로 남아있다. 이 단어들로 규정된 사회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동물농장』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읽히게 될 이유 또한 같지 않을까 한다.
한 번 읽으면 그저 신선하고 재밌다. 하지만 거듭 읽으면 사회, 나아가 시대가 보인다. 아마 세계 곳곳 어디에 있는 사람이라도 같은 심정일 거라고 본다. 정치판을 겨냥해서 읽어도, 국제 정세를 두고 읽어도 한치의 거슬림 없이 읽히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반복, 재생산된다.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한국의 7~80년대와 현재를 비교해보면 된다. 시대는 발전하는데 사상은 전복되고 규제는 강화되며 혁명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이다. 재미는 있었지만 한편으로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이유 또한 그러했다. 책은 독재 체제의 실상을 명징하게 파헤친다. 그에 따른 동물들의 안일한 대처는 역설적이게도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추구해야 할 답안이 된다.
"우리는 왜 계속 이 비참한 조건 속에 살아야 하는 겁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노동해서 생산한 것을 인간들이 몽땅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동무들, 우리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거기 있소. 한마디로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오. 인간은 우리의 진정한 적이자 유일한 적입니다. 인간을 몰아내기만 하면 우리의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근본 원인은 영원히 제거될 것이오."-11쪽
소설의 줄거리는 무척 단순하다. 제목 그대로 동물들이 주가 되어 인간의 독재를 향한 반란을 일으키고 평등을 부르짖는다. 꿈처럼 달콤했던 동물 중심의 사회도 잠시, 인간을 배척했던 그들이 오히려 인간을 답습하며 똑같은 수순을 밟아가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절묘하게 묘사돼있다. 중심에 독재가 있다. 어느 사회든지 기득권 세력의 폭압은 존재한다. 조지 오웰은 이 사실을 동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 사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풍자한 것이다. 반란이자 혁명의 꿈은 조용한 물결로 시작해 거센 파도가 된다. 혁명을 이루었다는 성취감도 잠시, 만인의 평등이어야 할 전유물은 일부 권력으로 집결되고 두 발 동물 인간보다 하등 나을 것 없는 삶으로 회귀하는 아이러니는 인간의 그것과 퍽 닮아있다.
한 체제가 태동하고 전복되기까지 과정의 핵심은 권력에 있다. 이는 때로(거의) 독재라는 수순을 밟고 우리는 반란이자 혁명을 꿈꾼다. 조지 오웰은 이런 인간의 심리를 『동물 동장』을 통해 똑똑히 보여준다. 그리고 혁명의 성공은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대중이자 시민의 태도에 있다고 질타한다. 동물들의 대표이자 기득권 세력 돼지, 반란을 선동했던 메이저가 죽고 혁명의 성공을 거둔 후 스노볼과 나폴레옹이 대립각을 이룰 때 여타 동물이 취한 행동은 우리의 부끄러운 일면이다. 질타와 비판보다 방관과 맹신으로 점철된 권력을 향한 충성은 오히려 악이 되어 우리 자신을 나아가 사회체제, 구조 자체를 붕괴하고 만다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의 방식에 대한 여러분의 적개심을 버리지 마시오.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입니다.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모두 우리의 친구입니다. 인간에 맞서 싸우는 데엔 우리 동물들이 결코 인간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점도 기억하시오. 여러분이 그를 정복하더라도 절대로 그의 악한 짓거리들을 모방해선 안 됩니다. (중략) 무엇보다 동물은 동족을 폭압해서는 안 됩니다. 힘이 세건 약하건, 똑똑하건 않건 간에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동물은 어느 누구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됩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합니다." -14쪽
어느 시대에 읽어도 우리의 이야기이자 현실이 되는 소설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시대의 정세를 날카롭게 묘사해낸 수작은 더욱 그렇다. 이는 조지 오웰의 글쓰기 방식,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인 글쓰기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물려서만은 아니다. 또한 세태를 꼬집는 날카로운 주제의식 때문만도 아니다. 이 모든 게 저너리즘이 아닌 감화하기 쉬운 풍자와 해학이 맞물려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 장을 넘긴 후 늙은 돼지 메이저의 유언과도 같았던 연설에 다시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폭압과 부조리를 참을 수 없어 시도됐던 혁명. 평등을 최우선으로 꼽았던 동물들도 결국 권력의 욕망 앞에서는 허물어지고 계급을 형성하며 인간의 삶을 답습할 뿐이었다.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 한 사회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투쟁하지 않는 한 사회 구조의 폐단은 악습을 반복할 뿐이다. 자유와 평등,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이 과제는 신분과 계급을 중요시하는 인간의 본성에 영원히 반기를 드는 욕망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