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랑을 처음 본 건 내가 열다섯이 되던 해였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넘어가던 어느 오후. 학원 수업이 끝난 후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이 있는 길목으로 들어섰다. 집 앞에 이삿짐 트럭이 한 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집 이 아니라 앞집 앞에 주차된 트럭에서 인부들이 짐을 내리 고 있었다. 학교 갈 땐 없었는데 그 사이에 이사를 온 모양 이었다. 짐은 얼추 다 내리고 슬슬 마무리하는 분위기였지 만 집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사할 때 식구 한두 명은 인부들 옆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거 아닌가? 식구가 단출한 모양이었다. 무심히 자전거를 끌고 가는데 근처에 서서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의 이야기가 얼핏 들렸다.
“어머, 여기 오늘 이사 왔나 봐.”
“응. 아까 보니까 트럭 한 대가 와서 짐을 내리더라고. 집이 이렇게 큰데 달랑 작은 트럭 한 대인 거 보니까 짐이 별로 없나 봐. 보니까 주로 아기 짐이더라고.”
“아기 짐?”
“아, 왜 있잖아. 아기 침대랑 유모차랑 뭐 그런 거. 원래 아이들 어릴 땐 그런 짐이 많잖아.”
“이사 온 사람들은 봤어?”
“응. 근데 그게 좀 이상하더라. 이삿짐 트럭이 오고 바로 택시 한 대가 와서 섰는데 젊은 새댁 하나가 갓난아기를 안고 내리는 거야. 그게 다야.”
“에이, 누가 또 왔겠지. 아니면 신랑 퇴근이 늦어서 여자만 먼저 왔거나.”
“그럴지도 모르지. 아까 시장 가는 길에 얼핏 본 거니까. 그런데 어쩐지 그 새댁 느낌이 쓸쓸하더라고. 좀 청승맞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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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과 갓난아기 둘이라. 남이야 둘이 살건 열이 살건 관심 없지만 쓸쓸해 보인다는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자전거를 끌고 우리 집 앞에 멈춰 섰을 때 앞집 대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나왔다. 아까 들은 문제의 새댁인 모양이었다. 희고 긴 면바지에 데님 셔츠를 입고 흰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긴 머리는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고, 높고 흰 이마 아래로 보이는 눈이 크고 맑았다. 무심코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싱긋 웃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귀까지 벌게지는 걸 느끼면서 허겁지겁 자전거를 들고 대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그 사람이 내게 말을 걸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사 왔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그런 뻔한 말이었을까? 나를 무례한 아이라고 생각했을까? 무척 젊어 보이던데 나이는 몇 살일까? 그런데 왜 이런 게 궁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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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부는 시시하다. 아니, 학교가 시시하다. 아니, 세상 모든 게 다 시시하다. 하지만 네 밥값은 하고 다니라는 아비의 말을 무시할 순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는 내가 지난 학기에 반에서 40등까지 내려가자 걱정한 담임이 아비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날 아비는 서재로 날 불러서 다짜고짜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싸대기를 날리면서 말했다. “내 집에서 내 밥 먹으면서 이딴 성적을 받아 와? 머리가 미련한 놈도 아니고. 반항이냐? 그런 알량한 반항을 하 거든 내 집에서 썩 나가. 사춘기? 설마 그딴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호강에 밥 말아 먹을 새끼. 내가 네 나이 때는 혼자서 신문 돌리고, 중국집 배달 다니면서 학교 다녔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볼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 물론 그 질문에 솔직하게 공부가, 학교가, 세상이 시시해서 그랬다고 대답하면 싸다구를 후려치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실 한쪽 구석에 세워 둔 야구방망이를 들고 왔겠지. 그래도 어쩌면 한 번은 물어봐 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15년간 살아왔으면 이제 포기할 때도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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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안은 여자는 행복하면서도 사나워 보였다. 누구든 저 아기를 건드리면 맹수로 변할 것 같은 독기가 비쳤다.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나면서 심장이 밑으로 쑥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쩐지 저 얼굴이 자꾸 보고 싶어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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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 가려고 가방을 메고 나왔지만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 하는 발걸음이 제멋대로 앞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무슨 일일까? 대문 잠그는 걸 깜박한 걸까? 빠끔히 열린 틈으로 들여다보니 마침 아랑이 1층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갈색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긴 흰색 카디건을 입은 그녀는 탁자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내려놓고 탁자 위에 놓인 뭔가를 들었다.
저게 뭐지? 나는 기린처럼 고개를 길게 뻗어서 바라봤다. 아랑은 거기서 길고 하얀 뭔가를 꺼내 손에 쥐더니 다시 테이블에 있는 네모난 물건을 들어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튕기자 화르르 불길이 올라왔다. 라이터였다! 아랑은 그 라이터로 손가락에 쥐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가 타들어 가는 걸 보다 한 모금을 길게 빨았다. 한참 후에 연기를 멋들어지게 내뱉으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켰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아랑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생긋 웃으면서 희고 가는 손가락 하나를 자신의 입술에 댔다. 입술 모양으로 봐서 “쉿!”이라고 한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이대로 정지 화면을 누른 것처럼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순간, 아랑이 일어서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마음 같아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다시는 아랑을 마주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발에 힘을 주고 간신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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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서너 시까지 뒤척뒤척하다가 설핏 잠이 들었는데 그토록 그리워하는 아랑이 꿈에 나왔다. 갈색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흰색 카디건을 입고 1층 테라스에 앉아 있는 아랑을 보며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꿈이지만 신기했다. 평소에는 주로 아랑이 말하고 내가 듣는 쪽이었는데. 그러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아랑이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일어서더니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부끄러워서 뒤로 뺐지만 아랑이 내 손목을 꼭 잡고 끌어당겨서 나의 한손은 자신의 어깨에, 다른 손은 허리를 잡게 하고 리드했다. 아랑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 둘, 하 나 둘, 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아랑의 발을 밟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애를 쓰다 보니 진땀이 흘렀다. 그런데 내 손을 잡은 아랑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더니 나중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뭐야. 왜 이렇게 힘이 세?”
그러다 혼비백산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건 아랑이 아니라 갈색 원피스를 입은 해골이었다. 나는 해골을 안고 되지도 않은 스텝을 밟고 있었다. 허겁지겁 손을 빼려 했지만 해골은 악마처럼 무시무시한 힘으로 날 붙들고 쇳소리가 나는 소리로 웃어 댔다.
“하하하하하. 선우야, 어딜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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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마치 예고도 없이 나를 향해 질주해 오는 1톤 열차를 보며 멍하니 서 있는 느낌이랄까.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또 속이 메슥거려?”
핸드폰을 통해 엄마가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랑이 없어졌다. 한국에서 연락이 왔어. 실종된 지 일주일 정도 된 모양이야. 경찰이 우리 연락처를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대. 아랑은 없어지고 연우만 혼자 있단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도 없이…. 당장 한국에 가 봐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내 몸이 이래서…. 네가 대신 가 봐야겠다.”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와르르 산사태처럼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간 셀 수 없는 질문들과 함께 아랑에 대한 버거운 감정, 나도 어쩌지 못하는 내 마음까지 쏟아져 버릴 것 같았다. 한번 입 밖으로 내뱉으면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그 총천연 색의 감정들.
--- p.164
연우는 몹시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데다 세수도 안 했는지 꼬질꼬질한 몰골로 다가와 딱 한마디 했다.
“엄마가 안 와요.”
그 말에 아주머니가 놀라서 카운터에서 일어서는 순간 연우가 쓰러졌다. 아주머니는 얼른 연우를 안고 일단 119 앰뷸런스를 불렀다고 한다. 주위가 시끄러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가게로 몰려들 때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누가 신고했는지 아직은 확인이 안 됐지만 동네 주민 중 하나인 건 확실하다고 했다. 연우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고,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해서 아랑의 집에 들어갔을 때 아랑의 흔적은 없었다. 집에는 아이 혼자 며칠 동안 있었던 흔적으로 바닥에 바나나 우유병만 여러 개 굴러다녔다고 했다. 그 외에 달리 이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집 안을 수색한 결과 아랑의 지갑과 핸드폰, 그리고 트렁크 하나와 옷가지 몇 개가 사라졌다고 했다. 가끔 아랑이 외출하거나 아르바이트 나갈 때 와서 연우를 돌봐 주던 베이비시터를 경찰이 찾아내서 알아낸 정보였다. 아랑이 정확히 언제 집을 나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우의 상태를 보면 대략 혼자 사나흘 정도 있었던 것 같다고 형사가 설명했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왠지 좀 싸늘하게 느껴졌다.
--- p.176
내게 팔을 잡힌 선우가 날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면 언제나 그렇듯 어마어마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 바람에 선우에게 몸이 기울어지자 엉겁결에 나를 받쳐 주려던 그가 내 목을 봤다. 순간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뭐라고 한 거지? 그러더니 내가 잡은 손을 뿌리치고 도로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가 비틀거렸다. 발을 헛디딘 게 분명했다. 때로 운명은 한 순간에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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