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06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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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60쪽 | 364g | 130*200*16mm |
ISBN13 | 9788954686853 |
ISBN10 | 8954686850 |
발행일 | 2022년 06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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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60쪽 | 364g | 130*200*16mm |
ISBN13 | 9788954686853 |
ISBN10 | 8954686850 |
프러시안블루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심장의 심장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밤의 정원사 감사의 글 |
복잡한 수식이 등장하고 뭔가 증명을 해야만 하는 과학이론들이 여전히 나에게 낯설저만, 과학을 소재로 한 글들은 이제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과학사의 주요 사건들을 소설처럼 다룬 이 책의 내용들이 그래서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다. 저자 자신은 이 책의 성격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허구’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과학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생애를 저자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한 ‘팩션(faction)’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주지하듯이 팩션이란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결합된 합성어로,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일대기에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낸 것을 일컫는다.
모두 5작품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다보면, 과학이론과 과학자들의 생애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과학자의 이름과 그들의 행적이 소개되고, 자신의 연구에 무섭게 집착하는 그들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깊이 고민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저자는 과학을 소재로 한 이 작품들을 쓰기 위해 자료조사를 치밀하게 진행하고, 이미 알려진 사실의 바탕 위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구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첫 번째에 수록된 작품인 ‘프러시안 블루’는 과학적 성과가 인류에게 긍정적인 작용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프러시안 블루는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안료로 활용되었지만, 그것이 전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일시에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 화학전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식물생장에 필수 요소인 질소를 공기 중에서 채취하는 법을 알아냈던 과학자 프리츠 하버의 기술은 1차 세계대전에서 화약과 폭탄을 제조하는 것으로 전용되어, 끝내 하버 자신을 전쟁 범죄자로 규정하도록 만들었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이라는 제목의 두 번째 작품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해를 전쟁터에서 찾아낸 과학자의 사례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의 발견은 뒤이은 과학사에서 ‘블랙홀 이론’으로 증명되었다고 한다. 참혹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참호 속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화학전의 후유증으로 피부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상대성 이론의 해법을 찾기 위해 고투했던 과학자 슈바르츠 실트의 업적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세 번째 작품인 ‘심장의 심장’은 수학자들에 대한 일화를 다루고 있으며, 표제로 활용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이제는 보편적인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양자역학의 정립 과정을 실감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마지막 작품인 ‘밤의 정원사’는 과학적 사고가 때로는 인류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조용히 정원에서 식물을 키우는 과학자의 상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비록 저자의 상상력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이 책을 통해서 과학적 사고와 우리의 삶에 대해서 조금은 진지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기술의 발전에 의한 인류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급속한 과학 발전이 부정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과학에 대한 맹신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다고 하겠다. 과학자들의 생애와 그들의 업적을 일방적으로 칭송하지도 않고, 또한 과학의 진보와 그것이 초래할 파국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른 조금은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차니)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당혹스러웠다. 첫 번째 단편 <프러시안블루>를 읽으면서도 그랬는데, 두 번째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더욱 그랬고, 세 번째 단편 <심장의 심장>도 그랬다. 이게 소설이라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독가스를 만들어낸 과학자들에 대한 <프러시안블루>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해를 처음으로 구한, 그것도 제1차 세계대전 참호에서, 아인슈타인에게 해를 구한 결과를 편지 뒷면에다 적어 보낸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마도 독가스의 여파로 죽게 된 카를 슈바르츠실트의 이야기를 담은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이나,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의 삶을 재구성한 <심장의 심장> 모두 차라리 과학 교양서의 한 챕터라고 하면 더 어울릴 듯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 해석과 과학자의 삶을 그대로 다룬 이야기는 <심장의 심장>의 일본인 수학자 모치즈키 신이치에서부터 조금 균열을 보여주고(그러나 모치즈키 신이치는 실재하는 수학자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표제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 비로소 소설 같아 보이고(물론 과학적인 내용과 관련해서는 과학 교양서에 손색이 없다), <밤의 정원사>에 이르러서는 진짜 소설이 된다.
그럼 이런 ‘소설’에서 과연 무엇을 읽어야 할까?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양자역학의 토대를 세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를 중심으로 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 찾아볼까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을 통해, 슈뢰딩거는 파동 방정식을 통해 양자역학을 만들어냈다(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좀 어렵다). 과학에서는 이 두 가지 방식이 양자역학의 서로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는, 같은 해답을 내놓는다고 설명한다. 물론 하이젠베르크나 슈뢰딩거 모두 이야깃거리가 많은 삶을 살았기에 많은 과학 교양서에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라바투트는 소설에서는 좀 더 달리 둘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이젠베르크나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에 한 걸음 성큼 접근하여 불멸의 업적을 남기는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소설은 그 순간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이젠베르크는 헬골란트에서 요양하며 극단적인 제약 속에서 간신히 그 길을 찾아냈고, 슈뢰딩거는 별 볼 일 없는 물리학자였지만, 결핵으로 인해 알프스에서 요양하는 와중 한 소녀와의 염문을 일으키며(그는 평생 염문 속에서 살았지만) 어찌어찌 파동 방정식을 고안해냈다. 또한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받아들일 수 없던 하이젠베르크가 낙심 끝에 불가사의한 경험을 하면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해낸 이야기도 이어진다.
이런 발견의 뒷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소설’인 셈인데, 소설가는 하이젠베르크나 슈뢰딩거, 드 브로이, 아인슈타인 등과 관련한 과학적 사실은 훼손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그들의 발견이 어쩌면 논리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소설’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 소설집을 과학 교양서처럼 읽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건 나로선 좀 불가사의하기도 한데, 어떻게 이런 인물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까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찾아본 그로텐디크는 힐베르트와 함께 20세기의 대표적인 수학자로 여겨지고 있단다. 아니, 정말 그럴까 싶은데, 진짜 그렇단다. 이게 분명 소설로 쓴 이 책이 내게는 과학 교양서인 이유인 셈이다.
그런데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
이 정도면 이 책이 소설이든 과학 교양서든 별 상관이 없는 거 아닌가?
“양자역학, 신기한 기적처럼 작동하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단 한명도 없다. 우리 정신은 양자 역학의 역설과 모순을 감당할 수 없다. (...) 만지작거리고 노리개로 쓸 뿐 결코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 253쪽
알지 못하며 이용하는 것이 어디 위의 문장처럼 양자역학 뿐 이겠는가? 리볼버 권총을 손에 쥔 세 살 아이 같은 아찔한 위기의 장면들이 인간의 역사를 가로지른다. 책은 화학, 물리학, 수학이 문학적 예술의 언어로 버무려져 그 주체였던 인물들을 통해 욕망의 우연적 과실(果實)들, 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묘사해보려는 집요한 탐구의 역사를 빚어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한계, 지적 파열의 순간에 대한 성찰이다.
다섯 편의 ‘픽션+논픽션’으로 구성되어 바로 오늘의 인간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정신, 그 거대한 전환적 이정표가 되었던 과학적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천재와 광기의 영역을 파고든다. 그 시작은 나치의 강제수용소 벽돌을 물들인 ‘프러시안 블루’로 불렸던 고운 파란색, 치명적 독가스인 치클론 A와 B가 남긴 흔적이다.
이것은 18세기 고급의 화려한 안료를 얻으려는 실험의 부산물이다, 극미량의 황산을 입힌 스푼으로 프러시안 블루를 휘저어 탄생한 비소계 안료, ‘에메랄드 그린’은 나폴레옹 숙소에 칠해짐으로써 성분의 유해성을 알지 못했던 황제와 그의 가솔들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았음은 물론이다. 분명 창조적 노력의 결실이지만 알지 못하는 사용이 무엇을 초래하는지의 한 사례일 것이다. 첫 편인 「프러시안 블루」는 이처럼 화학 물질의 발견과 추출을 둘러싼 영광과 분노의 역사이다.
오늘날 인류의 먹거리 증산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공기 중 질소 채취에 성공한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천연 비료를 대체케 한 이 연구는 그에게 노벨상을 선사했지만, 1차 대전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었던 이프르 전투에서 화학전을 지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로부터 전과를 인정받아 전쟁부 화학부서 책임자가 되기도 했으며, 2차 대전에는 자신의 활약으로 탄생한 시안화물 살충제, 즉 치클론 가스가 동족을 살해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인간을 산업적 규모로 몰살할 수단을 고안하고” 우쭐대던 과학 맹신자의 뒤늦은 죄책감을 읽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심장의 심장」,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이들 세 편은 인간 지성의 한계, 그 지적 파열의 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의 주제를 살필 수 있을 것 같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독일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카를 슈바르츠실트’의 “무한한 중력으로 공간이 휘어져 스스로를 감싸고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영원히 단절되는 맹점, 불가지(不可知)”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원리를 발표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15년 12월 22일, 전쟁의 참호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일반 상대성 방정식의 정확한 해(解)를 기록한 흙먼지 묻은 편지의 주인공, 이 천재 수학자 슈바르츠실트는 ‘특이점’, 즉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그의 모든 생각에 어둠을 드리우는, 형태도 차원도 없는 공허”를 본 것이다. 그것은 “한번 넘으면 무지막지하게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떤 표시도 경계도 없는” 찰나의 지점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심연, 훗날 학계는 이를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이라 명명한다. 이것은 저자 ‘벵하민 라바투트’에 의해 이러한 물음을 낳는다.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을까? 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만한 일이 벌어질까?” -71쪽
메타버스, 인공지능, 오늘의 세계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것이 도달했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함에도 마치 천상의 낙원이 열릴 것처럼 질주한다. 인간 정신이 이렇듯 압축 동원되면, 그 선, 특이점을 넘어섰을 때 바라던 인간의 희망이 성취될까? 특이점 너머의 세계는 암흑, 공허, 영혼의 그림자만 있을 뿐이라고 그토록 신봉하는 수학, 물리학이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이 무모한 질주의 동력인 이기적 욕망, 자본이란 신의 추구는 분명히 바른 길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심장의 심장」 역시 슈바르츠실트의 심연과 그리 멀지 않다. 아마도 1958~1973 세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명석한 수학자였던 모양이다. 수학의 거성으로 불리는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의 탁월한 추상 능력이 발견한 수학적 우주의 핵심에 자리 잡은 기이한 실체, ‘심장의 심장’에 대한 문학적 단편이랄 수 있다. “희미하디 희미한 미광 말고는 아는 것이 없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무수한 이론들을 묶을 수 있는 은밀한 뿌리”를 밝혀내려 했던 인간의 돌연한 도피와 은둔의 삶을 지펴내고 있다. 그는 대체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소외된 자들에 대한 아낌없는 베풂과 단식과 헐벗음의 길을 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슈바르츠실트와 같이 그 공허의 심연을 보았기에 동료 인간에게, 인류에게 보내려했던 연민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우주 입자, 원자 내부 현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둘러싼 갈등과 마침내 배타와 적대와 동시에 상보적인 그 불가해의 세계에 대한 선언, “우연을 가지고 노는 천수(千手)여신의 변덕에서 탄생한 놀랍고도 희한한 이 세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결정론 종말의 이야기다.
“양자 물체에는 본질적 성질이 전혀 없다. (...) 측정되기 전에는 어떤 성질도 없다. (...)입자를 실재하는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측정 행위다. - 223~224쪽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과학과 문학의 언어가, 우리 의식의 뿌리에 질긴 방식으로 얽혀있다고 느꼈듯이 이 단편은 행렬과 파동 방정식이 두 천재 물리학자의 감성적 직관, 그 원초적 삶의 감각들과 조우하며 아름다운 문학의 언어들로 번역되어, 세계의 근원, ‘실재’라는 모호하고 불가해한 인간 한계에 대한 겸허한 이해로 안내한다. 1927년 10월 24일은 어쩌면 인류의 사상적 거대한 전환점이라 할 것이다.
이날, 폴 디랙, 볼프강 파울리, 막스 플랑크, 마리 퀴리. 헨드릭 로런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닐스보어... 최고의 천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물리학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가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에만 관여해야 한다”며 전통과의 가차 없는 결별을 선언했던, 훗날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는 인간 사고의 대혁명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말한다.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초연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오늘의 과학이 치달으려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윤리적으로 성찰토록, 우주 자연, 인간이라는 자연과의 관계를 잊지 말라는 주문 아니겠는가
책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단편 「밤의 정원사」는 아름다운 한 편의 에세이에 가깝다. 앞 선 네 편의 글들을 포괄적으로 정리하는, 그러면서 오래되어 썩어가는 할머니가 아끼던 한 그루의 나무와 훼손되지 않고 듬성듬성 남아있는 작은 숲과 호수가 있는 자신의 정원, 한 때 수학자였던 밤의 정원사와의 나지막한 대화를 들려준다. 밤의 정원사는 수학이 우리 세상을 무시무시하게 변화시키리라는 돌연한 깨달음과 함께 은거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우리 안에 있는 인간성의 진짜 의미를 점차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악화되는 세상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도, 슈뢰딩거도 아인슈타인도, 그 어느 누구도 인류 삶을 지배하는 많은 수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 존재가 더는 없다는 말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가뭄, 질병, 역병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레몬 나무’가 어떻게 죽는지 아느냐”는 물음이 등장한다. 마지막 봄이 되면 거대한 꽃송이가 대기에 향기를 가득 채우고, 엄청난 열매를 맺고는 그 과잉의 결실로 쓰러져 죽는다는 것이다. 이 메타포는 우리에게 심원한 울림을 전달한다.
죽음을 앞둔 풍요, 이 야릇한 광경, “과숙(過熟)의 과시”는 오늘의 인류 개체들을 향한 자문의 요구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과학 천재들,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욕망의 집요한 추구와 결실로서의 파괴와 죽음, 낙천적 희망과 무지의 그림자 지대를 거닐며 인간 인식의 한계를 가히 최고의 미적 언어로 그려낸 물질계의 승화된 문학예술이요, 정신사의 걸작 중 걸작이라 하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