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08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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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80쪽 | 540g | 140*205*30mm |
ISBN13 | 9791168340541 |
ISBN10 | 1168340543 |
발행일 | 2022년 08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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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80쪽 | 540g | 140*205*30mm |
ISBN13 | 9791168340541 |
ISBN10 | 1168340543 |
모자수는 인생이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믿었다. 다이얼을 돌려서 조정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생긴 불확실성 또한 기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p.80
16살 모자수는 형 노아처럼 학교에 다니지만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다. 그는 길에서 당과를 파는 엄마 선자와 할머니를 놀리거나 약한 친구 하루키를 괴롭히는 일본인 아이들을 혼내주기 일쑤고,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한다. 그날도 엄마와 할머니의 가게에 들렀다가 근처 다른 가게에서 양말을 파는 여자애를 희롱하는 손님에게 본때를 보여줬다가 이가 두 개나 부러지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한다.
다행히 모자수와 그의 가족들을 괜찮게 보고 있던 파친코장 주인 고로가 중재를 한 덕분에 모자수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고로는 모자수에게 적성에 맞지 않는 학교는 그만두고 자신의 파친코장에서 일을 하면서 가족들의 생계에 도움이 되라고 제안한다.
학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한 노아는 드디어 와세다대학에 합격했다. 일본 최고 대학 중 하나에 합격했다는 기쁨도 잠시, 이내 등록금과 도쿄에서 지낼 집, 생활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선자와 경희, 할머니 양진 역시 돈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픈 요셉으로 인해 드는 약 값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노아는 모자수가 일해서 버는 돈은 쓰지 않겠다고 하며, 자신이 학교생활과 일을 함께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했다.
그러다 한수가 선자와 노아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한수는 노아의 대학 합격을 축하하며, 자신이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등록금을 지불했고 도쿄에서 생활할 집까지 마련해두었다고 했다. 노아가 없는 자리에서 선자는 빌린 걸로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한수는 그 애는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다며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한다.
1권에서 선자를 중심으로 한 고된 이야기가 펼쳐졌다면, 2권은 그녀의 자식인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모자수가 낳은 아들 솔로몬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물론 선자는 이 장대한 이야기의 핵심 인물이니만큼 종종 등장해 중심을 잡아주었다.
선자가 낳은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는 성격이나 인생에 대한 주관 등 모든 게 달랐다. 일본 최고의 대학에 들어간 노아와 학교를 그만두고 파친코장에서 일하게 된 모자수를 얼핏 보면 각각 이삭과 한수의 피를 이어받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야쿠자라고도 불리며 몰라도 될 일로 돈을 버는 한수는 공부에 매진해 뜻을 이루고자 하는 노아를 대견스럽게 여겼다. 당연히 그 사실을 티 낼 수가 없어 대외적으로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나마 노아를 곁에 둘 수 있었다.
노아와는 달리 모자수는 굴하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꺾이지 않는 의지와 강인한 성격이 그를 세상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남자의 삶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자못 궁금해지게 만들었다.
노아는 아키코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누구와 함께 있어도 자신이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이든, 노아는 그저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었다. 때로는 자신을 아예 잊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p.104
대학에서 돈 걱정 없이 마음껏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노아는 한 달에 한 번씩 한수를 만나 식사를 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아가 만나던 여자친구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누가 봐도 노아는 한수의 자식이라고 한 말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노아는 그 길로 오사카에 달려가 선자에게 사실을 확인했고, 이후 대학을 그만두곤 모두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장면에서 입을 함부로 놀린 여자친구의 경솔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 노아는 여태껏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로 인해 괴로워하던 10대를 보냈지만, 순교자가 된 아버지 이삭의 정직함과 존경스러움, 그리고 가족들의 헌신으로 그나마 버틸 수가 있었다. 태생적으로 유약한 성정이라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갈피를 잡기 어려워하던 노아를 잘 알지 못하던 여자친구가 불을 붙여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선자는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됐다. 매달 돈을 보내는 걸로 살아있다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렇게 잠적한 노아가 신분을 감추고 파친코장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게 된 건 인생의 아이러니함이었다.
모세와 유미 같은 사람들은 조선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인들 이야기가 항상 들려오지만 어떻게 보면 조선인들 모두가 마음속에서 영원히 고국을 잃어버렸다. p.86
노아와는 달리 굳센 성격의 모자수는 파친코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 주임에서 지배인으로 승진했고, 나중엔 요코하마에 자신의 파친코장을 개업하기까지 했다. 그 사이에 모자수는 친구 하루키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의 직원 유미와 가까워져 결혼까지 하게 됐다. 그리고 몇 번의 유산 끝에 아들 솔로몬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지만, 아이가 3살이 되었을 때 교통사고로 유미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장 행복하고 즐거울 때, 부족함이 없을 때 불현듯 찾아오는 불행으로 인해 인생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일본에 사는 조선인으로 온갖 역경을 겪다가 드디어 이제 괜찮은 삶을 살아가나 싶을 때 찾아온 불행은 사람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수 덕분에 16년 만에 노아를 찾아 마주하게 된 선자 역시 모자수와 비슷한 불행을 겪게 되었다. 그 한 문장이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느낌이 들게 했다. 내 자식도 아닌 노아가 그렇게 됐다는 걸 알고 너무 큰 상심을 느꼈는데, 선자는 오죽했을까 싶다.
그렇지만 두 사람에게는 자식이 있어서 살아가야만 했다. 선자에게는 모자수가, 모자수에게는 솔로몬이 있었다. 삶은 그렇게 누군가로 인해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후 성인이 된 솔로몬의 이야기가 이어지며 재일조선인, 일명 자이니치로 불리는 삶이 어떤지 보여줬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한 번도 고향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남한과 북한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삶이 정체성의 근간을 계속해서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게 어떤 느낌일지 평범한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선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한수도, 심지어 이삭도 아니었다. 선자가 꿈에서 다시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젊음과 시작, 소망이었다. 선자는 그렇게 여자가 됐다. 한수와 이삭과 노아가 없었다면 이 땅으로 이어지는 순례의 길도 시작되지 않았으리라. 이 아줌마의 삶에도 평범한 일상 너머에 반짝이는 아름다움과 영광의 순간들이 있었다. 아무도 몰라준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p.362~363
그리고 이 이야기의 뿌리인 선자는 어느덧 할머니 세대가 되어 바뀐 시대와 여성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자는 고생해야 한다는 말만 듣고 자란 그녀가 만약 다른 시대에 태어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양진과 훈이에서 시작되어 선자로, 그리고 노아와 모자수,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 장엄한 이야기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희생과 역경의 시대를 살아간 조선인들의 삶을 말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일본에서 선자, 모자수, 솔로몬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니 절로 울컥하고 또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그래도, 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희망을 갖게 한다.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이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책을 읽은 게 큰 행운이다. 소설을 다 읽었으니 조만간 드라마도 봐야겠다.
더 편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
앞세대의 노력으로 더 나은 선택의 길이 열린 후대들.
선자의 아버지는 언청이다. 이것은 유전이며 원래 좋은 혼처 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노력해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되는 여건을 갖췄다. 그래서 그는 그런대로 괜찮은 혼처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시대의 보통 아버지들하고 다르게 자식한테 손찌검 한 번 하지 않고 아내와 딸을 존중해주는 아버지였다.
일제강점기 보통 집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선택의 길이라는게 거의 없었을 거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먹고 살려고 애를 쓰는 삶이 있을 뿐이었을거다. 그러나 선자는 자기를 존중해주는 부모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있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가질 수 있었을 것 같다. 비록 그게 한수란 유부남한테 속아서 성관계를 갖게 된거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것은 선자가 선택한 일이었고, 어쩌면 그것이 생존하기도 버거운 선자의 삶에서 스스로 결정한 유일한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래서 선자는 극도로 한수의 도움을 거부한건지도 모른다. 아들 노아를 자기 힘으로 키우려고 한 것은 선자의 인생에서 지키고자 했던 자기의 정체성이었던 것 같다.
그걸 자식욕심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냉정히 보면 그렇다. 노아에게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노아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게 이성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뺏기고 싶지 않았을 거다. 환경에 휘둘리며 살아야만 하는 자신의 삶에서 유일한 자기의 자부심이 노아였을 테니 말이다.
이 집안은 대를 내려갈수록 자식에게 조금씩 더 선택의 기회가 있는 삶을 주려고 앞세대가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1 한수의 도움을 받는 것.
선자가 한수의 도움을 거부하는 이유라면 첫째, 이삭에 대한 미안함. 둘째, 유부남인 것을 속였던 것에 대한 반감. 셋째,자식에 대한 애정 집착.의무감. 등이 큰 만큼,, 노아를 뺏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서..
가장 이성적이라면 노아에게 한수가 친부라는 것을 말하고, 노아가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게 맞다고 봄. 양육을 책임졌던 모라고 할지라도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갈라놓을 권리는 없음.
2. 경희와 창수.
남편을 놔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경희의 본질이 부정되는 거라는 점에 동의함. 그렇다고 요셉이 죽기만을 창수가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도 할 짓이 못됨. 따라서 창수는 요셉과 경희를 떠나서 자기 인생을 사는게 맞고, 만일 요셉이 죽는다면 그때 과부가 된 경희한테 들이대볼 수 있을 것 같음.
3.한수가 아버지라는 것을 안 노아.
자기가 지키려고 했던 자기의 정체성이 환경에 의해 부정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을 노아는 아마도 느끼지 않았을까 싶음. 자기 삶이 부정당함. 아키코와 헤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됨. 가족과 인연을 끊고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파친코 실장으로 산 인생이 노아에게 의미가 있었을까. 파친코 실장이지만, 거의 건실한 기독교인의 삶을 산 노아. 점심 후 갖는 삼십분 남짓한 독서시간이 자기가 꿈꾸었던 자기 삶의 시간이었을 같기도 함. 어머니의 방문 후 자살. 그렇게 부정하려고 했던 자기의 출신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됐겠지. 45살에 또다시 새 인생을 살 수도 없는거고.
책의 뒷부분에서 솔로몬은 자기 삼촌인 노아에 대해 일본인이 못돼서 자살한 사람이라고 폄하하던데, 나는 일본인이 되고 안되고가 노아한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노력과 의지로 만들려던 자신의 정체성과 삶이 부정당해져 버리는게 견딜 수가 없는거라고 봄. 특히 노아같이 어찌보면 매우 고지식한 사람에게 부모와의 관계는 윤리적인 문제하고 직결되기 때문에 늪이 될 수도 있지.
4 선자
선자가 한수의제안을 받아들여 한수의 첩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경희의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창수를 따라가지 않은 게 나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창수는 아마 북에서 총살당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니까. 하지만 선자의 경우라면 편하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음. 그러나 결과적으로도 좋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됨. 한수는 극도로 이기적인 인간임. 자기 마음에 안드는 짓을 했다고 대뜸 어린 접대부를 폭행해 인생을 부숴버리는 짓을 했듯이, 만일 선자가 첩질이나 하는 그저그런 여자짓을 했다면 선자도 폭행으로 몸이 망가져버렸을지도 모르고, 아들 이삭도 한수에게 뺐겼을 가능성이 높았겠지. 선자가 자기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한수가 끝까지 존중하게 된거지.
선자의 삶에서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노아의 죽음에 대해 선자가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던 것임. 물론 괴로워하기야 했겠지만, 자기의 방문 후 노아가 죽었으면, 후회와 죄책감으로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음. 그러나 그러지 않았고 여기서 알 수 있었던 게, 선자의 노아에 대한 사랑이 노아를 바라보는 사랑이 아니라는 점임. 기본적으로 선자는 노아에게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 역할 놀이. 자식 소유욕 등 이기적인 사랑을 한거임. 자기의 부족한 것을 아들통해 채우려고 한거임. 아들로선 숨막히지. 노아같이 고지식한 인간에게는 특히나.
5.모자수
가장 현실적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을 인물. 자기 출신을 굳이 부정하지도 않고, 세상에 분노하며 자신을 함몰시키지도 않으며, 가장 현실적으로 선을 지키며 자기 삶을 잘 꾸려간 인물임. 이삭과 선자의 아이였기 때문일까. 한수와 선자의 아이가 노아가 아니라, 모자수였다면
이런 질문은 의미없겠지. 인간이 성인이 된 후의 가치관을 갖고 아이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6. 솔로몬.
양진.--선자.--노아와 모자수---솔로몬
4대의 마지막 주인공 솔로몬.
경제적으로는 매우 유복한 가정환경..재일조선인이라는 신분상 한계.
미국유학으로 신분의 한계를 벗어난 삶을 살아보려고 하지만, 그 역시 출신에서는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파친코를 물려받는 삶을 선택.
뿌리에서 자랐지만, 그 뿌리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그 뿌리에 잡히는....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좀 그런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이번 책에서는 많지는 않지만 일부 일본어를 설명해주는 주석이 달려있다. 그 덕분에 또 호기심이 발동에 읽기를 멈추고 이 단어는 영어로 어떻게 표기되어 있나 찾아보기를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확인하기를 수차례 했다.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읽을 수 있는 책을 또 2배의 시간을 들여가며 읽었다.
모자수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처럼 2권에서는 등장인물 중 모자수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이후 그의 아들 솔로몬의 이야기도 꽤 차지하지만, 중간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일까. 형 노아의 이야기에 비해 확실히 많이 등장했던 것 같다. 두 달전 읽을 때는 잘 못 느꼈는데, 작가가 일부러 두 형제의 삶을 비교하려 의도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기는 했다. 물론 노아와 모자수 둘 사이의 형제애는 끈끈했지만 말이다.
파친코를 2번째 읽으면서 느낀 2권의 차이는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 외에 1권이 등장인물의 배경과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면, 2권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각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되었던 부분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이 왜 결국엔 '파친코'인가를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 가족이지만 생각도 성격도 다른 등장인물의 특성 묘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으며 그들이 특히 노아 조차도 '파친코'를 삶의 한 영역으로 받아들인 이유를 나는 두 달 전 읽었을 때의 생각과 달라지지는 않았다. 패망한 일본이 그들을 내 쫓을 수도 반길수도 없는 시대에 그들이 잘나가도록 돕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지만, 그들이 경멸하는 '파친코'라는 사업을 허락해 줌으로서 그들을 비난하고 자신들은 여전히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핑계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반기지 않는 모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그들에게 유일한 숨구멍이 아니었을까. 싸움을 하지도, 위법을 저지르지도 않지만 따가운 시선에도 늘 정정당당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그들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그들을 한 마디로 정의한 말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라는 말로 소설의 포문을 연 이유가 아닐까.
이 번 역시 그리고 1권에서 같은 부분의 내용이 읽기 힘들거나 이해가 안 되었던 것처럼 2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읽기 힘들었던 부분은 여자 등장인물들의 가치관을 표현해 주는 부분이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며 이제 생의 마감을 맞이해야 될 나이가 된 그들의 진짜 솔직한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대게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솔직한 마음들과는 정반대의 가치관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두 번째 읽는 이 번 역시 참 읽기 어려웠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 번판 2권의 끝에는 작가의 감사의 말 외에 이전 책에서처럼 해설이나 번역가의 말은 실리지 않았다. 원래 좋아하지 않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전판에서 도움을 받았기에 이번에는 어떤 해설이 실렸을까 궁금해 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같은 내용을 여러번 읽는 일이 드문 내겐 이번 소설을 읽는 시간이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등장인물에 대해 또 어떤 부분을 새로이 느끼게 될까하는 기대는 읽으면서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덕분에 몰랐던 단어도 많이 알게 되었고, 번역에 따라 느껴지는 내용의 흐름이 어떤지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젠 진짜로 드라마 시즌2에서는 이 책의 나머지 내용이 어떻게 표현을 할까 궁금해하며 기다려본다. 종교적인 부분에 대한 표현도 그렇고, 실제로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사는 이들의 이 책이나 드라마에 대한 반응들을 살펴보면 분명히 호불호가 있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특히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