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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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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 양장 ]
| 디노북스 | 2022년 11월 1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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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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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2년 11월 1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398g | 125*195*20mm
ISBN13 9791195646678
ISBN10 1195646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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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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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변의 비스듬한 산비탈에 수박밭이 있어.
- 응.
- 그런데 달밤에 하얀 것들이 바다에서 나와서,
- 무섭니? 무서운 얘기야? 하지 마. 나 공포영화 후유증 심해.
- 하나도 안 무섭고 웃겨.
- 웃겨?
- 웃겨. 들어봐. 희고 동그란 것들이 수박밭으로 올라가서,
- 물에서 나온 하얀 것들이 수박밭으로?
- 그렇다니까. 그게 수박을 하나씩 껴안고
으스러져라 힘을 주니까 수박이 쩍 갈라져 깨졌어.
그것들이 빨간 수박을 맛있게 먹어, 쩝쩝거리며.
- 빨리 말해. 그 하얀 것들이 뭐야?
- 문어.
- 문어? 그 문어? 문어가 수박을?
- 응.
- 바다에서 나와서 수박밭을?
- 그렇다니까. 눈부시게 환한 달밤에 떼 지어서. 실화야.
- 실화 좋아하네. 콱. 문어 대가리는 벌게. 벌겋다고.
- 달빛 속에서는 마냥 하얗대. 진짜래.

유군은 억울했다.
고씨가 직접 봤다고 소상히 얘기해줘 수박밭으로 달려갔더니
정말 수박들이 능지처참당한 듯 법석으로 부서져 있었다.
인간의 주먹도 칼도 아닌 제 삼의 뭔가가 으깨버린 게 분명한
수박들이 붉은 살점을 사방에 흩트린 채
낭자한 피 같은 육즙을 땅에 쏟고 있었다.

- 구라쟁이.

강양이 비웃으며 의자를 찼다.
침 삼키며 열렬히 듣더니 뭘 노려보기까지?
유군은 카페 밖으로 쌩, 나가버리는 강양의 뒷모습을
어이없게 바라봤다.
구라였대도 재밌는 얘기 아냐? 밍밍한 타입이네.
--- p.71

기운 없는 유군에게 용이 맥주를 사줬다.
어둑한 동네 펍에서 나이 든 여주인이 자꾸 말을 걸자
귀찮아진 용이 전화로 누군가를 불렀다.
30여 분 지나 한 남자가 들어섰다.
키가 심하게 작아 유군은 당황했다.
- 난 빅씨요.
- 네?
영어로 빅.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BIG이라고 썼다.
술집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그 이름으로 굳어졌다며 씩 웃는데
눈빛이 신기했다.
유군이 본 어떤 고달픈 사람보다 고달파 보이는데도
맑아서 자꾸 눈길이 갔다.
--- p.82

맨 처음 자그만 손이 등을 살짝 쳤다.
유군은 짙은 색 수경을 쓰고 돌아앉아 있어서
누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안 보였다.
이어 다른 손이 머뭇대며 목덜미에 닿았다. 차가웠다.
일회용 비닐장갑을 낀 손들이 물감 통에서 등으로 오갔다.
시시해 보여 힘을 뺐던 유군은 움찔했다.
커다란 손이 옆구리를 세게 때렸다.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난 아니네.
물감을 잔뜩 발라 거의 주먹을 날리는 남자와
슬슬 문지르는 여자들이 있었다.

유군은 오래 샤워했다.
발등을 타고 딸기색과 노란색이 흘러갔다.
허리와 등 쪽이 우둘우둘 부풀어 올랐다.
빅씨가 맥주 한 조끼를 건네주고 연고를 발랐다.
- 몇 번 맞다 보면 부풀지 않아. 다 먹고 살게 돼 있어.
빅씨의 손이 따뜻했다.
--- p.87

감기에 걸린 날 유독 많이 맞았다.
직업병이 된 듯 뒷목도 고개를 못 돌리게 뻐근했다.
빅씨가 짧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척추를 눌러줬다.
- 세상에서 제일 슬픈 소리가 뭘까.
빅씨의 물음에 유군은 눈만 껌벅였다.
- 내게 키 크는 기계가 있었어.
매일 밤 자기 전에 기계 위에 몸을 눕히고
노를 젓듯 양쪽에 달린 레버를 앞뒤로 당겼지.
그러면 판때기가 휘면서 내 몸을 잡아 늘이는 거야.
거열형 당하는 것처럼 억지로 사지를 늘이는 거지.
빅씨는 유군의 뒷목을 고루 눌렀다.
- 레버를 당길 때마다 끼익, 날카로운 소리가 났어.
매일 밤 오랫동안. 나는 목숨 걸고 기계에 매달렸거든.
다른 방에서는 어머니가 주무시고 계셨어.
끼익 끽. 빅씨가 들릴락 말락 소리 냈다.
- 어느 날 어머니가 혼잣말로 그러셨어.
그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슬프다고.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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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움이라는 말은 날이 있는 칼에서 온 것임에 틀림없다. 흔히 날카롭다는 말을 한자로는 예리(銳利)라고 쓰는데 그 단어를 들여다봐도 금속과 칼이 있다. 예리한 칼. 그것의 용도는 뼈와 살, 씨앗과 과육, 꼬투리와 열매를 감쪽같이 분리하든가 원하는 모양으로 도리거나 다듬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의 가장 본질적인 쓰임새는 대상을 끊고 발라내고 도려서 칼의 날카로움에 상응하는 날카로움을 빚어낸다는 데 있을 것이다. 갠의 칼이 그렇다.
- 구효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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