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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이 담아낸 시대의 눈물과 웃음] 우리 시대 문장가 김훈의 신작 산문집. 생로병사의 무게를 실감하며 지나온 그의 치열했던 '허송세월'을 담은 책은 간결하고도 유려한 글맛으로 이 시대의 기쁨과 슬픔을 마주한다.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파고들어 삶의 비애와 아름다움을 포착한, 김훈 산문의 미학을 만나볼 시간이다. - 에세이PD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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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늙기의 즐거움 7
1부 새를 기다리며 일산 호수공원의 설날 31 말년 34 허송세월 43 재의 가벼움 49 보내기와 가기 55 새 1 - 새가 왔다 63 새 2 - 새가 갔다 69 다녀온 이야기 75 꽃과 과일 83 눈에 힘 빼라 89 시간과 강물 91 태풍전망대에서 96 적대하는 언어들 104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111 2부 글과 밥 여름 편지 127 걷기예찬 130 조사 ‘에’를 읽는다 134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 142 노래는 산하에 스미는구나 149 난세의 책 읽기 153 먹기의 괴로움 159 혼밥, 혼술 166 주먹도끼 172 박물관의 똥바가지 177 구멍 187 수제비와 비빔밥 195 몸들의 평등 201 키스를 논함 205 새 날개 치는 소리를 들으며 211 고속도로에 내리는 빛 - 겨울의 따스함 215 3부 푸르른 날들 청춘예찬 221 안중근의 침묵 239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1 246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2 253 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그리고 강운구 - 강운구 사진전 [사람의 그때]를 보면서 257 주교님의 웃음소리 267 아날로그는 영원하다 273 여덟 명의 아이들을 생각함 280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288 개별적 고통을 생각하며 300 호수공원의 봄 1 307 호수공원의 봄 2 313 인생의 냄새 319 뒤에 새와 철모 329 |
저김훈
관심작가 알림신청金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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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新生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p.43 「허송세월」중에서 말은 고해를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가 휑하니 비면 문장은 들떠서 촐싹거리다가 징검다리와 함께 무너진다. 쭉정이들은 마땅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므로, 이 무너짐은 애석하지 않다. 말들아 잘 가라. --- p.39 「말년」중에서 알을 품은 새는 고요히 집중했고, 스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둠과 비와 추위를 새는 혼자서 감당했다. 수컷은 작은 먹이들을 부지런히 날랐고 가끔씩 암컷과 교대했다. 나는 생명과 생명 사이를 건너가는 온도의 작용을 생각했고 ‘품다’라는 한국어 동사의 경건함을 생각했다. 새가 알을 품어서 새끼를 깨워 내고, 아득히 먼 곳에서 호롱불처럼 깜박이는 생명을 가까이 불러와서 형태를 부여해 주듯이, 나는 나의 체온을 불어넣어 가며 단어와 사물들을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당신들과 나는 오랫동안 잘못 살아왔다. --- p.70 「새 2-새가 갔다」중에서 별들이 운행하는 우주 공간 속의 시간과 땅 위의 흙을 익혀서 흙 속에 잠들어 있던 태초의 색을 발현시키는 도자기 가마 속의 시간과 몸속에서 몸을 길러내는 포유류들의 자궁 속의 시간과 씨앗에서 꽃을 피워 내는 식물들의 시간과 김치를 익히는 김장독 속의 시간이 모두 동일한 질감과 작용을 갖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인간의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저 여러 가지 시간들은 말의 길이 끊어진 절벽 건너편에서 제가끔 아름답다. --- pp.69-70 「시간과 강물」중에서 영하의 날씨에 군중이 모여서 독재자와 무기대열을 향해 깃발을 흔들며 펄펄 뛰는 자리는 민중의 광장이 아니다. 고립된 개인들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울타리를 저마다 설치하고 그 안에서 이기주의의 논리를 개발하고 실천하는 공간은 이명준이 그리던 밀실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과 정치·사회적 환경이 밀실과 광장으로 구획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남북 어디에도 밀실도 광장도 없었다. --- p.109 「적대하는 언어들」중에서 한국어 조사 ‘에’는 문장의 논리적 기둥을 이루면서도 문장 안에 자유의 공간을 유지한다. 한 음절뿐인 그 성음은 낮고 작아서 잘 들리지 않지만, 논리의 경직성을 풀어 주고 글의 세상을 넓혀 준다. ‘소나기에 들이 깨어났다’, ‘바람에 꽃이 진다’, ‘봄볕에 노인의 몸이 마른다’라고 한국어로 쓸 때, ‘에’는 인과관계를 말하기도 하지만, 논리와 정한을 통합하는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연다. 조사 ‘에’는 헐겁고 느슨하고 자유로워서, 한국어의 축복이다. --- p.141 「조사 ‘에’를 읽는다」중에서 가야토기의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유습遺習된 악업과 이념의 짧은 목줄에 묶여서 헐떡이는 이 철벽같은 현실에 구멍을 뚫을 일을 생각하면 마음의 구멍이 막힌다. 가야의 옹기장이처럼 무심한 듯 가벼운 손놀림으로 현실의 철벽에 구멍을 뚫을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하되 구멍 안쪽의 어슴푸레한 것들,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과 빈 것들이 사람의 역사 속에서 끝내 무력하지는 않다고 가야의 구멍들은 말하고 있다. --- p.194 「구멍」중에서 젊은 방정환의 이 외침을 들으면, 요즘의 어린이날이 얼마나 퇴행적인가를 다들 알 수 있다. 지금,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면서 삶과 미래에 대한 영감을 얻는 어린이는 없다. 어린이는 어른이 만든 목줄에 짧게 묶여 있다. 어린이는 ‘내 새끼’일 뿐이다. 집집마다 ‘아이고 내 새끼야’를 외치는 날은 젊은 방정환이 설계한 어린이날이 아니다. 지금의 어린이날은 ‘내 새끼의 날’이다. 다들 제 자식만 끌어안고 있으면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은 ‘남의 자식’이 된다. --- p.256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2」중에서 글에서나 사진에서나 1인칭만으로는 세상을 구성할 수가 없다. ‘나’가 물러서므로 3인칭은 겨우 드러난다. 1인칭과 3인칭 사이에 ‘너’가 있음으로써 인간은 복되다. 3인칭을 2인칭 ‘너’로 변화시켜서 끌어당기는 몸과 마음의 작용을 쑥스럽지만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다. 잘 드러난 3인칭은 대상으로서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너’가 되어서 나에게도 다가온다. --- p.259 「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그리고 강운구」중에서 디지털은 모든 정보와 자료를 기호로 바꿈으로써 문명의 개벽을 이루었지만, 삶과 언어의 바탕은 기호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례로 무너져 간 황 씨의 생업과 그가 남긴 작업도구들은 불멸의 추억으로 인류의 근육에 각인되어 있다. 교동도 대룡시장은 아날로그의 시장이다. 시장 상인들은 새로 날아올 제비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과 그리움은 모두 아날로그의 사업이고, 디지털의 공간 속으로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 p.279 「아날로그는 영원하다」중에서 의견과 사실이 뒤섞여 있는 말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듣기의 헛갈림은 시작됩니다. 아마도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고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려는 충동은 인간의 언어의식 밑에 깔린 잠재욕망일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기의 어려움입니다. (…) 근거 없고 쓸데없는 헛소리를 한자로는 화譁라고 씁니다. 온 세상에 말의 쓰레기들이 물 끓듯 들끓는 모습이 화비譁沸이고, 그런 세상의 이름은 화세譁世입니다. --- p.297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중에서 달링누나에게 가까이 가면 그 몸과 옷자락에서 형언할 수 없이 신기한 냄새가 났는데, 그 냄새는 이 세상의 냄새가 아니었다. DDT 냄새와 똥냄새 위로 달링누나의 냄새는 한 줄기 선율처럼 선명하게 솟아올랐다. 그 냄새는 강렬했고 찌르는 듯이 나의 감각 속으로 달려들었는데, 잡을 수 없는 냄새였고, 땅 위에 붙잡아 놓을 수 없는 헛것의 냄새였으며, 헛될수록 강렬했고, DDT 냄새와 똥 냄새 속에서 격렬한 부조화를 이루면서 나의 어린 영혼을 휘저었다. (…) 꽃핀 나무 아래서 온갖 냄새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노년은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 미세먼지 속에서 아기들이 태어나서 젖 토한 냄새를 풍겨 주기를 나는 기다린다. 이 마지막 한 문장을 쓰기 위하여 나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 pp.314-318 「호수공원의 봄 2」중에서 |
허송세월의 가벼움으로 버텨 내는 생로병사의 무게
시대의 눈물과 웃음을 포착한 성실한 글쓰기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_「늙기의 즐거움」, 7쪽 소설가 김훈이 산문 《허송세월》로 돌아왔다. 종이에 선명하게 찍힌 첫 문장에서 감지되듯 그는 죽음마저 일상적 루틴으로 여기는 ‘글 쓰는 실무형 노동자’다. 어느덧 여든에 가까워졌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바라보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 그 오래고도 성실한 노동의 흔적이 이 책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_「재의 가벼움」, 54쪽 노년에 접어든 후 술과 담배에 품게 된 애증의 감정을 털어놓은 서문 ‘늙기의 즐거움’을 지나쳐 1부 ‘새를 기다리며’를 펼쳐들면, 김훈의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14편의 글이 기다린다. 심혈관 계통의 질환 때문에 그간 크게 아팠다고 고백하며 그는 말 그대로 “신체 부위와 장기마다 골병이” 든 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것인지 자조하고, 몸이 완전히 사그라들어 마침내 뼛가루가 되기 전 어떤 유언을 남길 것인지 고심한다. 이렇듯 입원실에 누워 오줌통에 소변이 고이는 모습을 꼼짝없이 지켜보아야만 하는 애환은 자연스럽게 생로병사의 무거움을 허송세월의 가벼움으로나마 버텨 내야 하는 중생의 고단함에 대한 반추로 이어진다. 일산 호수공원에 앉아 햇볕을 쪼이며 노년의 나날을 보내는 그는 자신의 말이 이 고단함에서 벗어나 삶의 맨 얼굴에 닿기를 꿈꾼다. 그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허송세월에 바쁘다는 그가 2부 ‘글과 밥’에서 눈을 돌리는 곳은 다시금 “밥벌이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지지고 볶는 일상”이다. 일찍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했던 그에게 먹고사는 일의 애달픔을 정확히 포착하는 글쓰기는 평생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는 “웃자라서 쭉정이 같고, 들떠서 허깨비 같은 말”을 버리고 필요한 말만을 부림으로써 언어를 삶의 한복판에 밀착시키고자 한다. 글 쓰는 이와 모국어 사이의 간극을 더욱 벌리는 허약한 품사를 과감히 쳐 내고, 사물을 향해서 “빙빙 돌아가지 말고 바로 달려들”기 위함이다. “쓰이기를 원하는 것들과 남에게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속에서 부글거리는 날에는 더욱 문장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 이런 날에는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고, 등장인물의 말투가 들뜨고 단정적 종결어미가 글 쓰는 자를 제압하려고 덤벼든다. 글이 잘나가서 원고 매수가 늘어나고 원고료가 많아지는 날이 위험하다. 이런 날 하루의 일을 마치고 공원에 놀러 나가기 전에 글 속에서 뜬 말들을 골라내고 기름기를 걷어 낼 때에는 남이 볼까 무섭다.” _「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 143쪽. 필요한 말만을 정확히 부리려는 노력은 삶의 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소박한 물건들에 애정을 보이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박물관에서 가야토기의 “어둡고 서늘”한 구멍을 들여다보며 그는 신라의 철제 무기에 스러져 간 가야 옹기장이들의 비애를 생각한다. 반면 생활 속 쓰레기가 일상의 연장이 되어 돌아온 똥바가지를 보면서는 “펄펄 살아 있던 활물”에 신명이 뻗치기도 한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한” 이 물건들에서 들려오는 듯한 “순하고 과장 없는” 단순한 말들이 그의 산문 언어가 향하는 지향점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나는 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므로 우선 밥을 먹는 일에 관련된 유물들을 들여다보았는데, 너무 많아서 다 볼 수는 없었다. 절구, 맷돌, 항아리, 젓독, 김장독, 장독, 술독, 밥그릇, 국그릇, 주전자, 접시, 쟁반, 냄비, 뚝배기, 보시기, 탕깨(탕기)들이 끝이 없었다. 한없는 물건들은 제가끔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표정들의 일관된 질감은 사람의 일상 속에서 필수불가결한 것들이 지니는 단순성과 현실성이었다.” _「박물관의 똥바가지」, 179쪽 3부 ‘푸르른 날들’에 다다르면 작가는 시선을 더 멀리 두어 난세를 살았던, 또는 살고 있는 이들에게로 관심을 뻗친다. 다윈과 피츠로이,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안중근의 청춘이 그의 문장에서 교차되며 떠오른다. 이러한 호명은 방정환, 임화, 최인훈, 박경리, 백낙청, 신경림…으로 이어진다. “「농무」가 보여 주는 울분과 소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신경림의 표정은 맑고 선하다. 눈을 맞고 있는 그의 얼굴은 천진성의 바탕을 보여 준다. 이 순간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본질을 보여 준다. 무엇을 기필코 보아야 한다는 의도가 없다. 물러서 있는 카메라가 그 순간을 보았다. 그 순간이 보였다. 이날 눈송이는 굵었다. 사진 속의 신경림은 아마도 눈이 내리는 것이 좋아서 웃고 있는 것 같다.” _「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그리고 강운구」, 264쪽 서늘한 시대를 살면서도 푸른 날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근심과 희망이 남은 자리를 성실하게 더듬어 가던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지금 여기’의 중생고로 향한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끼여 죽고, 깔려 죽”었던 수많은 이웃의 죽음을 기리기 위함이다. 그는 현실의 문제를 두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뿐이다.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말들로 들끓는 화세에, 말하기 어렵고 듣기 괴로운 세상에 몸서리치면서도 그의 문장은 꿋꿋이 나아간다. “의견과 사실이 뒤섞여 있는 말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듣기의 헛갈림은 시작됩니다. 아마도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고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려는 충동은 인간의 언어의식 밑에 깔린 잠재욕망일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기의 어려움입니다.(중략) 근거 없고 쓸데없는 헛소리를 한자로는 화譁라고 씁니다. 온 세상에 말의 쓰레기들이 물 끓듯 들끓는 모습이 화비譁沸이고, 그런 세상의 이름은 화세譁世입니다.” _「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289쪽 늙어 가는 일의 즐거움을 논하는 글로 운을 떼어, 도로변의 투명 벽에 부딪쳐 죽는 새들과 철모를 남기고 간 옛 병사를 향한 헌사로 닫는 45편의 산문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운명’에 포박되어 있던 가엾은 중생의 말에 바치는 송가다. 꽃과 새와 밥과 꿈에 뒤엉킨 이 시대의 기쁨과 슬픔을 애달프면서도 때로는 웃음기 있게, 명료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낸 언어의 짜임이 눈부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