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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 한정 부록 : 문장 엽서 1종 ] 나남신서이동
김훈 | 나남 | 2024년 06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3 리뷰 45건 | 판매지수 218,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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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36쪽 | 384g | 135*195*22mm
ISBN13 9788930041683
ISBN10 893004168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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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MD 한마디

[김훈이 담아낸 시대의 눈물과 웃음] 우리 시대 문장가 김훈의 신작 산문집. 생로병사의 무게를 실감하며 지나온 그의 치열했던 '허송세월'을 담은 책은 간결하고도 유려한 글맛으로 이 시대의 기쁨과 슬픔을 마주한다.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파고들어 삶의 비애와 아름다움을 포착한, 김훈 산문의 미학을 만나볼 시간이다. - 에세이PD 이주은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新生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p.43 「허송세월」중에서

말은 고해를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주어와 술어 사이가 휑하니 비면 문장은 들떠서 촐싹거리다가 징검다리와 함께 무너진다. 쭉정이들은 마땅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므로, 이 무너짐은 애석하지 않다. 말들아 잘 가라.
--- p.39 「말년」중에서

알을 품은 새는 고요히 집중했고, 스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둠과 비와 추위를 새는 혼자서 감당했다. 수컷은 작은 먹이들을 부지런히 날랐고 가끔씩 암컷과 교대했다. 나는 생명과 생명 사이를 건너가는 온도의 작용을 생각했고 ‘품다’라는 한국어 동사의 경건함을 생각했다. 새가 알을 품어서 새끼를 깨워 내고, 아득히 먼 곳에서 호롱불처럼 깜박이는 생명을 가까이 불러와서 형태를 부여해 주듯이, 나는 나의 체온을 불어넣어 가며 단어와 사물들을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당신들과 나는 오랫동안 잘못 살아왔다.
--- p.70 「새 2-새가 갔다」중에서

별들이 운행하는 우주 공간 속의 시간과 땅 위의 흙을 익혀서 흙 속에 잠들어 있던 태초의 색을 발현시키는 도자기 가마 속의 시간과 몸속에서 몸을 길러내는 포유류들의 자궁 속의 시간과 씨앗에서 꽃을 피워 내는 식물들의 시간과 김치를 익히는 김장독 속의 시간이 모두 동일한 질감과 작용을 갖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인간의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저 여러 가지 시간들은 말의 길이 끊어진 절벽 건너편에서 제가끔 아름답다.
--- pp.69-70 「시간과 강물」중에서

영하의 날씨에 군중이 모여서 독재자와 무기대열을 향해 깃발을 흔들며 펄펄 뛰는 자리는 민중의 광장이 아니다. 고립된 개인들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울타리를 저마다 설치하고 그 안에서 이기주의의 논리를 개발하고 실천하는 공간은 이명준이 그리던 밀실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과 정치·사회적 환경이 밀실과 광장으로 구획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남북 어디에도 밀실도 광장도 없었다.
--- p.109 「적대하는 언어들」중에서

한국어 조사 ‘에’는 문장의 논리적 기둥을 이루면서도 문장 안에 자유의 공간을 유지한다. 한 음절뿐인 그 성음은 낮고 작아서 잘 들리지 않지만, 논리의 경직성을 풀어 주고 글의 세상을 넓혀 준다. ‘소나기에 들이 깨어났다’, ‘바람에 꽃이 진다’, ‘봄볕에 노인의 몸이 마른다’라고 한국어로 쓸 때, ‘에’는 인과관계를 말하기도 하지만, 논리와 정한을 통합하는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연다. 조사 ‘에’는 헐겁고 느슨하고 자유로워서, 한국어의 축복이다.
--- p.141 「조사 ‘에’를 읽는다」중에서

가야토기의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유습遺習된 악업과 이념의 짧은 목줄에 묶여서 헐떡이는 이 철벽같은 현실에 구멍을 뚫을 일을 생각하면 마음의 구멍이 막힌다. 가야의 옹기장이처럼 무심한 듯 가벼운 손놀림으로 현실의 철벽에 구멍을 뚫을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하되 구멍 안쪽의 어슴푸레한 것들,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과 빈 것들이 사람의 역사 속에서 끝내 무력하지는 않다고 가야의 구멍들은 말하고 있다.
--- p.194 「구멍」중에서

젊은 방정환의 이 외침을 들으면, 요즘의 어린이날이 얼마나 퇴행적인가를 다들 알 수 있다. 지금,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면서 삶과 미래에 대한 영감을 얻는 어린이는 없다. 어린이는 어른이 만든 목줄에 짧게 묶여 있다. 어린이는 ‘내 새끼’일 뿐이다. 집집마다 ‘아이고 내 새끼야’를 외치는 날은 젊은 방정환이 설계한 어린이날이 아니다. 지금의 어린이날은 ‘내 새끼의 날’이다. 다들 제 자식만 끌어안고 있으면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은 ‘남의 자식’이 된다.
--- p.256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2」중에서

글에서나 사진에서나 1인칭만으로는 세상을 구성할 수가 없다. ‘나’가 물러서므로 3인칭은 겨우 드러난다. 1인칭과 3인칭 사이에 ‘너’가 있음으로써 인간은 복되다. 3인칭을 2인칭 ‘너’로 변화시켜서 끌어당기는 몸과 마음의 작용을 쑥스럽지만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다. 잘 드러난 3인칭은 대상으로서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너’가 되어서 나에게도 다가온다.
--- p.259 「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그리고 강운구」중에서

디지털은 모든 정보와 자료를 기호로 바꿈으로써 문명의 개벽을 이루었지만, 삶과 언어의 바탕은 기호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례로 무너져 간 황 씨의 생업과 그가 남긴 작업도구들은 불멸의 추억으로 인류의 근육에 각인되어 있다. 교동도 대룡시장은 아날로그의 시장이다. 시장 상인들은 새로 날아올 제비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과 그리움은 모두 아날로그의 사업이고, 디지털의 공간 속으로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 p.279 「아날로그는 영원하다」중에서

의견과 사실이 뒤섞여 있는 말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듣기의 헛갈림은 시작됩니다. 아마도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고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려는 충동은 인간의 언어의식 밑에 깔린 잠재욕망일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기의 어려움입니다. (…) 근거 없고 쓸데없는 헛소리를 한자로는 화譁라고 씁니다. 온 세상에 말의 쓰레기들이 물 끓듯 들끓는 모습이 화비譁沸이고, 그런 세상의 이름은 화세譁世입니다.
--- p.297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중에서

달링누나에게 가까이 가면 그 몸과 옷자락에서 형언할 수 없이 신기한 냄새가 났는데, 그 냄새는 이 세상의 냄새가 아니었다. DDT 냄새와 똥냄새 위로 달링누나의 냄새는 한 줄기 선율처럼 선명하게 솟아올랐다. 그 냄새는 강렬했고 찌르는 듯이 나의 감각 속으로 달려들었는데, 잡을 수 없는 냄새였고, 땅 위에 붙잡아 놓을 수 없는 헛것의 냄새였으며, 헛될수록 강렬했고, DDT 냄새와 똥 냄새 속에서 격렬한 부조화를 이루면서 나의 어린 영혼을 휘저었다. (…) 꽃핀 나무 아래서 온갖 냄새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노년은 늙기가 힘들어서 허덕지덕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이 미세먼지 속에서 아기들이 태어나서 젖 토한 냄새를 풍겨 주기를 나는 기다린다. 이 마지막 한 문장을 쓰기 위하여 나는 너무 멀리 돌아왔다.
--- pp.314-318 「호수공원의 봄 2」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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