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은 집단 학습을 통해 그 선택의 자유와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문명을 건설해왔다. 인류세란 그런 문명사의 전개가 임계점에 이른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빅히스토리가 앞서 말한 3문 가운데 마지막 물음에 답하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강화하려면,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와 존재 의미에 관해 더 많이 성찰하고 전망하는 문명사적 문제의식을 가진 빅히스토리 모델이 요청된다.
--- p.13
현생인류는 미래의 리스크에 대비하고 꿈의 실현을 목표로 사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야기를 매개로 집단 학습을 한 인간은 미래를 대비하고 기획한 덕분에 문명을 건설했다. 인류 문명의 원천은 ‘이야기꾼’이라는 인간 정체성에서 기인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이야기는 남아서 미래 후손들에게 문화 유전자를 전달한다.
--- p.80~81
갈릴레오 또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의 연구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의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과학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새로운 과학적 사실들을 발견한 것보다는 그의 문제제기로부터 세상을 보는 방식이 중세 기독교적 믿음에서 과학적 사고로 바뀌었다는 데 있었다.
--- p.140
과학의 목표는 지식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인문학의 제일 목표는 의식의 각성이다. 과학이 밖으로 향하는 인식이라면, 인문학은 내면을 성찰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인간이 자의식을 갖고 자기 인식을 추구하면서 인문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났다. 이런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왜’라는 물음을 토대로 ‘어떻게’의 문제를 푸는 방식을 지향한다. 〔……〕 인간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계기는, 모른다는 것을 깨달을 때다. 무지의 앎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 창의성의 원천이다. 결국 창의성은 자기 이해에서 비롯하는 이상, 메타-과학으로서 인문학이 과학의 나침판이 되어야 한다.
--- p.159
역사란 과거 인간이 살아온 집단적 삶의 기억을 이야기로 편집하여 집대성한 아날로그 데이터다. 그것은 오랫동안 삶의 지도로서 유용했다. 하지만 삶의 지도로서 역사가 제공하는 데이터의 한계는, 그것이 대부분 인간 기억을 중심으로 모은 주관적 정보라는 점에 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인간 집단 기억의 데이터만으로는 팬데믹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인간중심적으로 집단 기억을 축적하는 지식 체계로서 역사학의 한계 지점에 봉착한 것이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역사 인식의 지평을 자연의 거시·미시 영역으로 확장하지 않는다면, 문명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요컨대 집단 기억과 집단 학습을 하는 역사의 인식 범주를 인간 사회 밖과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로 확대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 p.190
우주가 아무리 크고 영원하다고 해도, 그건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주가 내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주에 관한 정보를 생산하고 의미에 관해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 의식의 차원이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 인류는 어디로 가는가? 궁극적으로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어떤 의식을 갖고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 p.298~99
앞서 갈릴레오와 튜링의 예로 설명했듯 과학도 인간의 마음으로 한다. 인간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그들의 과학적 연구 과정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와 열정이 내재해 있다. 과학적 사실은 객관 세계의 재현이나 묘사가 아니라, 과학자가 우주에 참여 관찰함으로써 구성해낸 것이다. 라투르는 과학의 비밀이 기계, 텍스트, 사람, 동물, 언어적 진술 등 무수히 상이한 종류의 물질을 끊임없이 연결하는 과학자의 고통스럽고 창조적인 노력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했다. 이렇듯 고뇌하면서 노력하는 인간을 탐구해 이야기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질주하는 과학을 운전하는 인간에 관한 학문으로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뇌의 나’로 태어난 인간이 ‘나의 뇌’로 살려는 불굴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 정체성과 존재 의미를 성찰하는 인문학은 필요하다.
--- p.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