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지난 시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돌아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지난 시간을 사진으로 붙들어 맬 수 있을까. 사진은 본성적으로 과거 지향적이다. 현재를 찍는 순간 이미 과거의 장면이요, 미래를 찍는 사진은 발명된 적도 없다. 내가 썼건, 남이 썼건 사진에 관한 수많은 글 또한 과거를 거닌다, 과거를 헤맨다. 아픈 일이다, 돌아본다는 건. 즐거웠던 일조차도..
---「여는 글: 말하려던 눈들」중에서
판단은, 단판이 아니다. 겹겹이다. 물리적 차원의 판단이 끼어 있는가 하면, 정신적 차원의 판단도 끼어 있다. 아무튼 끼어 있다. 고로 우리가 마주하는 사진은 겹겹의 선택과 배제가 토해낸 의결의 산물이다. … 사진이 뭔가를 보여준다는 얘기는, 뭔가는 감춘다는 얘기다.
---「사진의 가위질」중에서
인상 깊은 말씀이 있었다. “나쁜 끝은 없어도 착한 끝은 있다”는 말이었다. … 그 한 문장이 며칠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쁜 끝은 없어도 착한 끝은 있다. 그 말씀을 읽는 방법이 여럿일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착함의 좋은 끝’을 말하였으나, 나는 ‘착함의 한계’를 생각했다. 사람의 착함엔 한계가 있다. 사람의 나쁨엔 한계가 없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 결국 나쁜 짓이 아닐까.
---「방아쇠, 총알과 필름」중에서
사진 안에 선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가름할 잣대는 없다. 사진은 결국 콘텍스트(맥락)에 의존하는 텍스트일 뿐이고, 어느 맥락에 사진을 놓을 것인가, 어느 맥락으로 사진을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을 뿐이다. 사진은 결코 착한 매체일 수 없다. 어떤 ‘선의’도 쉽게 ‘악의’로 변질시킬 수 있고, ‘악의’마저 ‘선의’로 포장할 수 있는 교묘한 매체다. 선악의 판단 기준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사진이 놓인 맥락일 수밖에 없다. … 그것을 사진의 함정이라 부를 수도, 반대로 가능성이라 여길 수도 있다. 어쩌면 사진 자체에 선의를 판가름할 잣대가 내장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담는 사진의 생산과 사용에 관해 중단 없이 사고해야 할 이유가 아닐까.
---「방아쇠, 총알과 필름」중에서
사진기에 담긴 장면들은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에 관한 존재 증명이 되었다가 이내,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이젠 흘러가 버렸다’는 부재 증명이 되고 만다.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 태어났으나, 부재를 증거하고야 마는 사진의 역설. … 시간을 붙들 수 없다는 불안 속에서 눌러대는 우리의 추억 사진, 그래서 우리가 제 맘대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진을 더 찍을까, 덜 찍을까.
---「사진의 시간」중에서
흔들린다. 넘어진다. 엉뚱한 길로 빠진다. 산 사람을 찍어야 하는데, 어쩌다 죽은 사람을, 죽은 사람의 옛 사진을 찍고 있을 때가 많다. 산 사람의 터전을 찍어야 하는데, 어쩌다 죽은 사람의 뫼를 찍고 있을 때도 많다. 내 사진을 봐야 하는데,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에 눈이 돌아간다. 사진에 길이 있을까. 이른바 ‘정도正道’가 있을까. 있다면 알고 싶다. 그 길을 피할 수 있도록. 시간 앞에 영원한 사람이 없듯, 영원한 사진이란 없을 것이다. 사람도 사진도 시간 앞에선 바스러진다.
---「사진의 시간」중에서
한 번의 전쟁을 직접 치르는 것과 여러 번의 전쟁을 목도하는 것의 무게는 어떻게 다른가. 겪는 것과 보는 것의 감도와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무게를 계량화할 수 있는가, 잴 수 있는 감도인가. 나는 내가 진 짐의 무게도 몰라 허우적대며 살아왔다. 다른 이가 진 짐의 무게를 가늠하려 더듬이를 세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가늠이라는 사실을 안다. 어려운 일이다. 타인이 진 고통의 무게를 잰다는 것은. 본 것이 쌓였다 해서 겪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더듬이가 부러진다.
---「기억 투쟁」중에서
파국이란 멀리 있는 시공간일까. 아직 당신에게 도달하지 않았을 뿐 이미 곳곳이 파국이요, 시시때때로 파국이었다. … 사진을 믿는가.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다루되,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닫는 글: 그때, 내가 본 것의 의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