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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작가의 말 |
완벽한 정적. 우리는 타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아무와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완벽한 도시는 나를 외롭게 했다.
--- p.7 ‘절대 눈을 뜨지 않을 거야.’ 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고 다짐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분명히 두려워질 테고, 눈을 뜨고 싶어질 것이다. --- p.13 “지금은 어때? 외곽으로 갈래?” 내 마음을 읽은 듯한 질문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적어도 머릿속으로는 그랬다. 입이 먼저 움직여서 대답했다. “갈래.” --- p.30 “하지만 처음으로 너를 봤을 때, 불안하거나 답답하지 않았어.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직접 쳐다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따뜻한지 느꼈어. 이상하지? 눈을 뜨고 남을 봤는데 오히려 안심했다는 게.” --- p.133 “중앙에서 자라는 게 쉽지 않았어. 중앙의 아이들은 보호자와도 관계를 형성하지 않아야 하는데, 함께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란 어려웠거든.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 것 같았는데 왜 나만 유난했는지 모르겠어. 어쨌든, 나는 보호자를 사랑했어.” --- p.142 나는 평생 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규칙에 나를 욱여넣었다. 발을 딛고 있던 바닥이 사라져 버린 감각이 아찔했다. 나와 똑같은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를 떠올리자 소름이 끼쳤다. --- p.260 나는 버블을 깨는 방법을 배웠다. --- p.274 만약 그가 내게 갖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좀체 모르겠다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 보면 쉬울 것이다. 나는 그가 어질러진 책상에서 펜을 쥐고 거침없이 써 본 후에 감정 교본을 들여다보았으면 했다. 감정의 이름을 적어 놓은 종잇조각이 귀퉁이가 닳을 때까지 지니고 다니면서 나를 생각했으면 했다. --- p.278 |
저마다의 버블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는 눈을 뜨고 타인을 바라보는 일도, 버블 밖으로 나가 타인과 접촉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주인공 ‘07’은 ‘126’을 만나 자신의 세상과는 다른 ‘외곽’이 있는 걸 알게 되고 외곽으로 향한다.
타인을 마주 볼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07은 세계의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07은 자신을 가두던 장막을 뛰어넘어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
안전하지만 외로운 도시
나는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버블에 둘러싸인 채 타인을 만날 수 없고, 불가피하게 대화를 나눌 때는 눈을 감는다는 원칙이 있는 중앙에서 07은 외로움으로 시들어 간다. 번듯한 직업과 혼자 살아가는 집도 있지만, 그는 모두가 문제없이 지내는 이 도시에서 자신만 겉돈다는 생각에 괴로울 뿐이다. 언젠가는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하기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향해 한 번도 다정한 눈빛을 보낸 적 없고 지금은 연락조차 나누지 않는 양육자의 존재 역시 07을 더욱 고독하게 한다. 그래도 중앙이 주는 안락함, 버블이라는 자기만의 공간이 주는 안전함을 알기에 절대 눈을 뜨지 않겠다고 되뇌며 일하던 평범한 어느 날, 07의 앞에 ‘126’이 갑작스레 나타난다. 126이 중앙이 아닌 ’외곽‘에서 오가는 직원이라는 것을 알고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07은 규칙을 어겨 몰래 실눈을 뜨고 그를 훔쳐본다. 126은 그런 07의 마음을 안다는 듯 외곽으로 가자는 제안을 해 온다. 07은 소통은 싸움을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소통이 자유로운 탓에 불화가 끊이지 않고, 중앙에 비해 물적 자원이 부족해 가난하게 살아가는 외곽으로 간다는 결심은 쉽지 않다. 하지만 07은 안주보다 자유를 택한다. 단단하고 안락한 세계를 깨는 07의 첫 번째 도약이다. 괜찮다는 건 거짓말이다. 평생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기회를 잡아 보고 싶었다. 결심이 약해지기 전에 126에게 말했다. “외곽으로 갈게. 눈을 뜨고 싶어.” - 본문 33면 타인을 마주한다는 건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용감히 발을 내디디는 것 외곽에서 126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에게 첫인사를 건네거나 고마움을 표시하며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익히는 사이, 07은 때로 혼란에 빠진다. 눈을 뜨고 대화를 나누며 타인을 대하는 것은 서로를 알아 가고 사랑할 수 있다는 기쁨과 살아 있다는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다양한 감정의 총천연색을 일깨우고 관계 맺음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배우며 행복과 어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고전하는 07의 모습은 타인과 마주하며 분투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모든 것이 처음인 상황 속에서 07은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구를 좋아해야 할지 더욱 어렵게 느낀다. “어때? 사람들을 만나 봤잖아. 지금은 외롭지 않아?” “확실히 외롭지는 않았어. 좋은 사람들인 것 같은데?” “좋은 사람들인지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어.” - 본문 65면 한편 처음 알게 된 이에게서 차가운 눈빛을 받을까 봐도 두렵지만, 그보다 내가 아는 이의 모습이 정말로 그 사람의 본모습이 맞는지, 다른 이면이 감추어져 있지 않은지도 07을 불안하게 한다. 126에게 의지하던 07은 어느 날 126이 비밀을 숨기고 있으며 그 비밀이 중앙과 외곽을 둘러싼 세상의 진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감정 교본을 통해 감정의 종류와 상황별 대응법을 씩씩하게 배워 왔지만, 126의 비밀 앞에서 07은 그를 향한 애틋함과 배신감, 미움과 의문 등 복잡한 생각의 소용돌이로 빠지게 된다. 온전히 믿을 수 있던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된 07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투명하지만 단단한 장막을 넘어 “이제는 내가 너를 만나러 갈게.” 철저히 통제되어 온 세계의 비밀에 접근하게 된 07은 충격에 얼어붙지만, 무엇이 진짜 진실인지를 말해 주는 이는 126을 포함해 아무도 없다. 이제 07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게 된 타인들을 구하기 위해 더 용감한 발걸음을 내딛기로 결심한다. 『버블』에서 07이 진정으로 넘어야 하는 것은 ‘버블’이라는 물질이 아닌 진실을 알 수 없게 가로막는 벽이다. 주변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놓인 선을 넘어야 그 벽 위로 함께 날아오를 수 있음을 07은 마침내 깨닫는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알아가는 모험을 감행하고, 스스로의 복잡한 마음을 직시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깨달음이다. ‘한 번만 더 부딪혀 보자.’ 나는 주먹을 움켜쥐면서 생각했다. 맨몸으로 남의 버블에 뛰어드는 모험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 본문 263면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버블』은 07이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고, 실망하고, 반목하다 화해하는 등의 사건을 찬찬히 그리며 자연스레 주인공에게 공감을 보내게 한다. 확신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발휘하는 07의 빛나는 성장이 가슴 깊이 남을 것이다. 관계 맺음이 불러 오는 미묘하고도 다양한 감정에 대한 통찰부터 비밀과 반전을 통한 흡인력까지, 『버블』은 자신을 가두던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르는 특별함을 아름답게 그려 낸 작품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사람과의 관계는 우리가 의식하는 것보다 많은 노력을 요하지만, 결국에는 노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편물처럼 조심스럽게 엮여 가는 관계의 모습을 『버블』에 담았습니다. 외롭고 편안한 자기만의 공간보다 갈등을 감수하고 얻는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문학은 시대를 밝히는 불꽃이다. 불꽃은 넓은 광장보다 변두리를, 좁고 어두운 골목을 밝힌다. 불꽃은 집요하게 타올라 인간의 깊고 축축한 심연을 들여다본다.
우리는 종종 더 나은 제도와 규칙이 세상을 안전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기저에 인간의 연대가 없으면 아무리 정교한 시스템도 쉽게 붕괴한다. 사회를 튼튼히 떠받치는 건 사람 간의 교류와 믿음, 그리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익명성 뒤에 숨어 타인을 공격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손쉽게 외면하며 그 반석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요즘이다. 126과 07이 서로에게 단순한 숫자로 남을 때 무관심과 끊어진 연대가 버블이 되어 그들을 가둔다. 그러나 소설의 인물들이 단순한 숫자를 넘어 자신의 이름을 찾을 때 버블의 단단한 벽은 무너진다. 버블을 터뜨릴 방법을 아는 주인공은 더 이상 갇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시대를 강렬하게 비추는 『버블』이라는 불꽃에 반드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이희영 (소설가) |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눈을 감아야 하는 세계. 주인공 ‘07’은 앞에 있는 사람을 마주 보기 위해 다른 세계로 용감히 건너간다. 눈앞의 상대를 보면 복잡해지는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공책에 찬찬히 적어 보는 07의 모습이 못내 사랑스럽다. 그를 응원하게 되는 건 우리 모두 한때 눈을 감고 살았던 적이, 그러다 처음으로 타인을 마주 바라본 순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이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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