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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L의 운동화

[ 양장 ]
김숨 | 민음사 | 2016년 05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4 리뷰 29건 | 판매지수 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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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5월 3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32g | 135*205*20mm
ISBN13 9788937432941
ISBN10 893743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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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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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라고 했다.
채 관장은 L의 운동화를 가져오는 대신에, 그것을 찍은 사진을 가져왔다. 운동화가 손으로 집어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나는 사진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진 속 L의 운동화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L의 운동화가 질량, 밀도, 탄성 등 물리적 성격을 띤 ‘물질’이라는 것. 또 하나는 유물이든, 예술 작품이든, 유품이든 ‘그 어떤 물질’이라는 것이었다. 단일 물질이든, 여러 물질의 조합이든. --- p.15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 --- p.33

“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 보았어요. 피해인석과 증인석은 비어 있고, 사건과 사건 번호와 배심원들과 재판장과 피의자만 있는 법정을요. 그럴 때 L의 운동화가 피해자이자 증인이 되어 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 p.55

1987년 6월 9일, 집회가 열리던 그곳에는 천여 명의 학생이, 따라서 이천 개의 발들이 운집해 있었다. 집회가 끝난 뒤 이천 개의 발들은 분주히 흩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L의 왼발에서 벗겨진 운동화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듯 발들 속에 집어삼켜졌을 것이다.
자신의 왼발에서 운동화가 벗겨질 때, L은 그것을 알아차렸을까. 나처럼 허물이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벗겨진 운동화를 다시 신으려고 L은 허둥거렸을까.
단발이거나 긴 생머리이거나 어색하게 파마를 한 여학생이, L의 운동화를 주워 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날개를 다쳐 날지 못하는 새를 주워 드는 심정으로 L의 운동화를.
여학생의 손이 뻗어 와 혼비백산한 자신을 들어 올리는 순간, L의 운동화는 구원의 손길을 만난 듯 안도했으려나. --- p.59

유품이 된 운동화는 L에게 몇 번째 신발이었을까?
그 당시 L의 것과 똑같은 운동화가 몇 켤레나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을까?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L의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
나는 애타게 L을 기다렸을 왼짝 운동화를 생각한다. 어떤 여학생이 주운 왼짝 운동화를, 주인이 끝끝내 찾아가지 않았다는, 끝끝내 찾아가지 않아서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갔을 운동화를. --- p.82~83

예술품으로 치자면, L의 운동화는 레디메이드(Ready made)다. 레디메이드는 뒤샹이 전시를 위해 ‘선택’한 기성품에 붙인 용어로, 기성품이 예술품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을 뜻한다. 뒤샹은 대량 생산된 기성품에 어떤 변형도 가하지 않고 단순히 제목을 붙이고, 사인을 넣어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럼으로써 미(美)가 창조가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L의 운동화는 대량 생산된 기성품이었지만 특별히 ‘선택’되었다. 뒤샹 같은 특정한 예술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에 의해서, ‘시민’에 의해서. --- p.83

“저 운동화가, 우리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라고 하니까, 우리 아들의 운동화인가 보다 해요……. 우리 아들의 운동화인가 보다……. 나는 솔직히 저 운동화가 우리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인지 잘 모르겠어요.” --- p.124

“우리 아들이 어디서 죽었을까…… 왜 죽었을까…… 도망가다 죽었을까……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더라도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뒤에서……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위험하니까 하더라도 앞에서 하지 말고…… 사진을 보니까 앞에서 했더라구요…… 앞에서…….” --- p.125~126

“나는 역사를 기억의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억은 구체적인 매개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데, L의 운동화 같은 물건이 그 매개물이 아닌가 싶어요.” --- p.135쪽

그녀가 가 버리고, L의 운동화 앞에는 또다시 나 혼자 남겨진다.
갑자기 모든 게 혼란스러워지면서 내 작업대 위 L의 운동화가 어쩌면 환(幻)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마저 든다. 만질 수도, 집어 들 수도, 신을 수도 없는 환. --- p.203

L의 운동화는 세대를 걸쳐 다시 복원될 것이다. 한 세대, 두 세대를 걸쳐서. 내가 하고 있는 복원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다. 현재 내가 L의 운동화에 진행하고 있는 복원 방법은 100년, 혹은 200년 뒤에 있을 복원 작업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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