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6년 07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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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0쪽 | 518g | 145*215*30mm |
ISBN13 | 9788952782458 |
ISBN10 | 8952782453 |
발행일 | 2016년 07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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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0쪽 | 518g | 145*215*30mm |
ISBN13 | 9788952782458 |
ISBN10 | 8952782453 |
시작하며 1장 철들지 않는 어른 아이 남자는 침묵으로 말한다 왜소한 남성성 바라보기 남자의 가짜 독립 썸만 타고 잠적하는 남자 사랑을 방해하는 낮은 자존감 2장 허세 부리는 소년 게임하는 남자의 숨은 욕구 남자의 인정 욕구와 거짓말 특별함에 사로잡힌 남자 둔감하고 무심한 남자들을 위해 커다란 남성과 아담한 여성 3장 가장은 영웅이고 싶다 실패할까 봐 불안한 남성 남자는 쿨하고 싶다 슈퍼맨이어야 하는 남자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용기 왜곡된 딸 바보 아빠 4장 아버지의 그림자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아버지를 모른다 가부장의 분노 표출 우리 아빠는 개저씨 완장에 집착하는 남자 마치며 |
책읽기도 묘한 흐름 같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책 읽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흐름도 있겠습니다만, 출판계가 만들어내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합니다. 금년 여름에는 특히 남성의 정체성이 주목을 끌고 있는가 봅니다. 그래서 저도 같은 맥락의 책을 이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소개드린 일본의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의 <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 http://blog.yes24.com/document/8870141>에선 은퇴 이후의 남성과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면, 이번 주에 소개드린 <혼자 있고 싶은 남자>는 우리나라에서의 남성의 심리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고 싶은 남자>는 상담심리사로 활동하시는 선안남님이 상담현장에서 만난 분들의 이야기를 정리해냈습니다. 앞서도 출판의 흐름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작가의 저서 목록을 보아도 그런 흐름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여성을 다루었다가 이제 남성으로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이 모두 인문학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리학이 개별 사례를 통하여 미시적으로 분석하는 미분적 접근방식을 취한다면 사회학은 개별 사례들을 모아서 거시적으로 분석하는 적분적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작은 변화가 모여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현상으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특정한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성의 정체성이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미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성의 정체성에 대한 미시적 분석을 통하여 새롭게 드러나는 현상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혼자 있고 싶은 남자>는 남성 심리학을 다루고 있지만, 특히 중년 이후의 남성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일본의 장년들이 갈 곳을 찾고 있다’라고 본 미나시타 기류와는 달리 <혼자 있고 싶은 남자>의 저자는 ‘한국의 남자들은 혼자 있고 싶다’라는 명제를 내놓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남자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자다움‘의 압력에 시달리며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는 방법을 터득하고 억압 본능을 갈고 닦게 된다(7쪽)”라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저자에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특정한 성격의 남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이 전제가 타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지 않는 대다수의 남성들 역시 이와 같은 압력을 받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미에 보편성의 그물망에 묶이지 못하는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들이 있다는 점을 서술하기는 했지만,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이야말로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남녀 간의 성차에 주목하고 과거와 현대의 남성상을 병렬적으로 비교, 대조하는 방식으로 남성상을 설명하고, 궁극적으로는 인식의 틀과 차이를 허물로 각자의 경험 밑에 깔린 복잡한 사정을 이야기하는 물꼬를 트고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과거 한국의 남성상을 ‘가부장제’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하기에는 과거 한국의 가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차이를 정확하게 짚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앎이 많지 않아서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만, 과거 한국의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방적인 횡포에 눌려 살았다고 정리하는 것이 절대적 진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구조, 특히 관직에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나뉘었던 사회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지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엄하신 왕께서도 내명부의 일에는 일체 간여할 수 없었던 것이 법도였던 것처럼 사가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남녀가 평등한 사회의 전형으로 삼는 서양에서의 여성의 입지는 오히려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우리나라보다 못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한국의 남성을 ‘철들지 않는 어른 아이’, ‘허세 부르는 소년’, ‘가장은 영웅이고 싶다’, ‘아버지의 그림자’ 등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심리상담을 받으러 오는 남성들을 여성적 시각에서 해석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철들지 않는 어른 아이’의 핵심은 ‘침묵’입니다. 남편 혹은 남자친구와 소통이 안된다는 불만을 들고 오는 여성 상담자로부터 듣는 이야기로부터 일반화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회사 일까지도 미주알고주알 아내에게 털어놓는 저의 경우가 일반적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리상담을 받으러 갈 일이 없을테니 말입니다. 물론 침묵으로 일관하는 남성의 아내나 여자 친구 가운데에도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적이므로, 남성의 침묵이 그리 불편하지 않을 여성도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남성의 침묵을 아동기에 경험한 분리 불안에 기인하는 것으로 단정하여 심리학적 문제가 기저에 깔려있다고 단정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나름 정상인 사람을 환자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알파걸’이니 ‘거대한 엄마’ 등의 수사가 과연 우리나라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여성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나 보편적인 사회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상황들로 인하여 만들어진 허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최근에 강남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단편적인 사회현상을 지나치게 부풀렸던 것이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입니다. “특히 삶이 더 힘들어지고 기댈 데가 없어진데다가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남성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강력한 가부장제로 회귀하고자 하고 여성 혐오주의를 키우기도 한다.(43쪽)”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가부장제를 향유한 남성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한국 남편들을 모두 마마보이로 모는 듯한 대목도 있습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독립하던 미국사회에서도 요즈음 가정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들은 여전히 독립을 꿈꾸고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사회나 관계는 중요합니다. 가족은 모든 관계의 기본이 되는 것인데, 어찌 보면 부부의 관계보다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의 관계를 부모-자식 간의 관계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갓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식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부부의 중심으로 돌아가던 가정도 자식이 장성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부모-자식 관계가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부모의 관계보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바꿀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 말입니다. 결혼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가족 관계의 가지가 더 확대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나르시스와 에코의 관계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시각을 달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기로 한 여성이 내세운 이유를 보면 남자친구가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관계 속에서 착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특성을 보이고, 에코이스트는 에코이스트들은 자기 주관이 없어 상대의 욕구에 끌려 다니기 쉽다(123쪽)’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만약 나르키소스가 들으면 아주 섭섭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그가 자기중심적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착취적 특성은 나르키소스의 명예를 심대하게 훼손시키는 말입니다. 나르키소스는 단지 눈이 높았던 것이기에 에코들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한 죄밖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나르키소스의 눈이 낮아서 모든 에코들의 소망을 들어주었더라면 이번에는 나르키소스가 바람둥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문제는 에코에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옛 말도 있는 것처럼 상대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목을 맬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만을 사랑해줄 진정한 인연은 따로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사례에 나온 여성의 경우에도 남자친구가 아니다 싶으면 일찍 이별을 결심하면 될 일입니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개저씨’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책에 쓰는 어휘를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대목입니다. “보통 사회적으로 민감성이 강한 여성일수록 자기 목표를 행해 가는 도중에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많다.(142쪽)” 이는 부정적 의미의 속담에서 나온 것으로 사실은 길을 잘 못 든 사람이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말일 것입니다. 삼천포로 가는 길이 잘 닦여서 벌어지는 일이었다고 위안을 삼으면 좋았을 터이나 삼천포에 사시는 분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트집을 잡는 것으로 일관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마도 남성의 시각으로 읽다보니 변명거리를 찾아내야 하겠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트집잡기로 책읽기를 일관하는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남성들의 현주소를 아는데 분명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부모와 자녀들의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원인 가운데 중요한 것에 대한 언급은 부모나 자녀 모두가 꼭 알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부정적 인식은 대체적으로 어머니를 통하여 어머니의 시선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는 직접 부딪혀 문제인식을 공유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경우 의외로 쉽게 해결점을 찾더라는 것이 저자의 경험입니다. 따라서 희생자로 보이는 어머니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를 권유하였고, 또한 아내에게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불만을 자녀들에게 투사하는 일이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여성들은 남편 혹은 남자친구의 동호회 활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 쓰고 돈 쓰고 에너지 쓰고, 얻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남자들은 왜 그렇게 단체를 만드는데 집착할까요?(305쪽)”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와 같은 남자들의 행태를 ‘완장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여성들이 사적이며, 친밀한, 작은 관계 속에서 나를 찾는 경향이 강한 것과는 달리 남성들은 학연, 지연, 취미를 망라한 조직적인 관계망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관계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기 마련입니다. 유명 배우의 상징이기도 한 ‘의리’라는 관념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남성들의 이런 특성은 은퇴 후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본 남성들은 은퇴하게 되면 그때까지 유지해오던 관계망이 무너지는 경향이 있어 ‘갈 곳이 없는 남자’가 되어 아내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심리상담 현장에서 만나는 남성 혹은 여성들이 가지고 오는 문제의 원천적 원인은 ‘고립’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소통의 부재가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인데, 소통을 단절시키는 원인은 아마도 쌍방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라는 노랫말처럼 타인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도 그렇지만 <혼자 있고 싶은 남자> 역시 여성의 시각으로 남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심리상담을 통하여 경험한 사례들이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크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혼밥’(혼자 먹는 밥)이니 ‘혼술’(혼자 마시는 술)이니 혼자가 익숙한 시대다. 글 쓰는 상담심리사 선안남은 혼자 있고 싶은 남자에 주목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남성상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회 변화에 맞고 심리적 욕구와 일치하는 건강하고 새로운 남성상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의 모습과 그 모습 밑에 깔린 남성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특히 여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남자들의 특성에 초점을 맞춰 표정을 잃어가는 얼굴 밑에 잠긴 심리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남녀가 함께 사는 재미를 회복하고 소년에서 남자가 되는 과정에서 남자들이 접어 두어야 했던 자기 안의 진짜 마음을 펼쳐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싶다.
-p. 10 시작하며
책은 1장 철들지 않는 아이, 2장 허세 부리는 소년, 3장 가장은 영웅이고 싶다, 4장 아버지의 그림자로 구성된다. 도대체 남자가 왜 그러는지 저자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원인을 분석한다. 남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저자에 의하면 사실은 남자도 약한 존재다. 그런데 그 약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때로는 여자가 문제를 크게 만들기도 한다. 썸만 타고 잠적하는 남자의 경우, 추적하는 여자가 남자 안에 있는 잠적 욕구를 끄집어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유를 막론하고 잠적하는 남자의 행위는 최악이지만, 저자는 여자도 너무 남자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건강한 관계는 ‘너도 나, 나도 너(혹은 나), 우리도 우리’가 되어 서로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고 ‘너는 너, 나는 나, 우리는 별개’로 각자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너는 너, 나는 나, 우리는 우리’로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는 교집합을 늘려나가되 각자의 다른 세계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따로 또 같이’ 하는 관계다. 이 경계를 잘 지키고 소통해나간다면 잠적과 추적을 반복하는 남녀 관계의 풍경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p. 75~ 76
이렇게 저자는 문제의 원인을 파헤칠 뿐만 아니라 해결 방법까지 모색한다. 그 방법이 공통적인데, 용기, 균형, 이해, 표현, 배려 등이다. 이 방법으로 인해 ‘개저씨’도, 마음과 입의 문을 꼭 닫은 남편도,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는 아빠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표현 방식과 타이밍은 달랐을지 몰라도 우리는 누구나, 또 언제나, ‘고립’이 아닌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를 품고 있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상처 받고 상처 입히게 될 때마다 끝끝내 기억해내고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공통의 연결 욕구인 것이다.
이 책이 우리가 서로를 고립시키는 정체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작은 파문이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혼자’보다 ‘함께’에 한 표를 더 던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p. 319 마치며
혼자 있고 싶은 남자.. 속으로는 함께 하고 싶다는 욕구를 품고 있다. ‘혼밥’, ‘혼술’도 맛있지만, 함께 하는 ‘이야기밥’이 더 맛있다. 모두 함께 하실래요?
선안남 심리 상담사의 책을 접하며 우리 사회야말로 심리학이 필요한 사회라는 생각을 했다. 남자도 여자에 못지 않게 고민과 어려움이 말 못할 정도로 크다는 생각도 함께. 저자가 남자에 대해 서술한 내용들을 보며 나는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저자는 차이를 통해 설명하는 방식은 도리어 그 차이를 강조하게 될 수도 있어 조심스럽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 저자가 언급한 보편성의 그물망에 묶이지 못하는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들은 분명 있다.
저자의 책에 언급된 남자들은 내면을 억압하고 선택적으로 함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나는 사회화가 덜 되어서인지 내 감정 표현하기를 즐기고 장점 못지 않게 약점을 털어놓는 데도 어려움이나 거리낌이 없다. 물론 고백도 나름이어서 기술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듣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표현을 신중히 하고 마음을 다듬는다. 물론 그런 나도 알파걸 앞에 주눅드는 베타보이에 가깝다.
우리 시대는 여성들이 능력을 발휘하는 시대이다. 이런 현상은 갑작스런 것이 아니다. 고도의 잠재력을 가진 여성들이 여성상과 남성상이 급격히 변하는 시대를 맞아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나는 잘난 여성 대 못난 남성의 구도로 세상을 볼 것이 아니라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마음을 가부장적인 관념적 틀에 의존해서 말하기보다는 그 틀에서 벗어나 진짜 내 심정과 욕구를 이야기해야 한다.”(45 페이지)고. 저자는 남자들이 진정 독립하지 못하는 것은 충분한 의존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 말한다. ‘혼자 있고 싶은 남자’라는 제목을 보고 남자에 대해서만 저자의 진단과 처방이 내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저자는 여자에 대해서도 가짜 독립이 아닌 진짜 독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독립은 경제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심리적인 것이기도 하다. 남녀 관계에서 여리고 의존적인 면을 보일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독립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결혼을 앞둔 여자가 메리지 블루(marriage)를 느낀다면 남자는 콜드 피트(cold feet)를 느낀다. 전자는 결혼 후에 펼쳐질 육아와 가사노동, 시집살이에 대한 심란함을 반영한다. 이는 과연 이 남자가 평생 나를 보살펴줄 괜찮은 남자인가, 과연 결혼이 자신을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란 의혹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자는 결혼 전 압박감을 느낀 남자가 위기의식을 갖게 된 나머지 차가워진 발을 느끼며 내면 깊은 곳의 “도망쳐“란 소리에 반응하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하는 사람들 중 하나로 프로이트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정신분석에 주로 의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릴 적 경험하는 사랑 결핍은 커서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남녀관계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굳이 정신분석이 아니어도 어릴 적의 경험이 성인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프로이트에서의 무의식을 소꿉놀이 같은 것으로 보고 사회, 우주 차원의 스케일이 큰 무의식을 이야기한 들뢰즈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성향을 설명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여성은 관계를, 남성은 성취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남성은 성취성을 획득하면 관계성도 확보하지만 여성은 성취성과 관계성이 반드시 함께 하지 않는다. 공부를 많이 한 남자가 결혼을 못할까봐 걱정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공부를 많이 한 여자가 결혼 시기를 놓칠까봐 걱정하는 경우는 많다.
여성들은 성취성과 관계성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95 페이지) 남성들은 취업에 실패하면 연애, 결혼, 출산 등등에 줄줄이 실패할 것이라는 공포감에 시달린다. 저자에 의하면 남자들은 게임에 몰입함으로써, 여자들은 드라마에 몰입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성취로부터의 좌절감을 견디고 스트레스를 조절하며 현실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100 페이지)
그렇다면 게임도 드라마도 즐기지 않는 나는 무엇일까? 더구나 나는 스포츠는 좋아하지만 격투기나 혈투가 난무하는 영화를 즐기지도 않는다. 앞서 언급한 ‘사회화가 덜 되어서인지’란 말을 떠올리는데 저자는 그런 과격한 운동과 혈투가 난무하는 영화를 보며 남자가 되어 가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여자와 남자에게 공히 성취와 관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는 남자는 리플리 증후군(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을 보이기 십상이다. 같은 선상에서 나에게는 허세와 과장이 없(어서 좋)다는 옛 선배의 평가가 생각난다. 자신이 너무 특별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 하고,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자기희생을 불사한다.(129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타인의 기대에 대한 건강한 균형 감각을 갖는 것, 그리고 자신의 욕구에 솔직한 것 등이다.
저자는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관심을 받지 않아도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사랑받지 못했어도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 것을, 나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두 특별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라 정의한다.(137 페이지) 그런데 이는 사랑을 받아본 경험 없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기란 어렵다(83 페이지)는 저자의 다른 말과 상충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했어도 사랑을 주는 것이라 말하지 않고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 것이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라 말한다. ”실제보다 과장하는 것은 억지스럽고 축소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162 페이지) 남자들도 반추 사고 때문에 힘들어 한다. 반추 사고란 관계에 대한 과거지향적 되새김질을 뜻한다. 내가 왜 이랬을까? 이러 저러 해서 그런 것일까? 등을 생각하며 후회하고 걱정하는 것으로 이 덫에 빠진 남자들은 자신의 내면과의 전쟁은 물론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는 외적 전쟁에 시달린다.
이 덫에서 빠져 나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생각을 멈추고 행동하는 것이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수다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다. 물론 남자에게 허용된 수다의 수치는 낮다. 남자들도 섬세하고 민감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표현할 언어와 기술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내 이야기를 즐겨 하지만 주로 여자분들에게 그랬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되새김질은 관계를 더 잘하고 싶고 관계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반성과 성찰, 타인에 대한 배려와 타인을 향한 민감성으로 드러난다. 남자가 민감성을 발휘해주고 부드러운 친밀감과 공감력을 가져주길 원한다면 남자들에 대해 갖고 있던 이중 잣대를 내려놓아야 한다.(191, 192 페이지) 앞에서 들뢰즈 이야기를 했지만 심리학은 소소하지만 중요한 심리 상태를 해명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왠지 공허해진다. 물론 사회 차원보다 개인이 변하는 데에 초점을 두는 학문이라 보면 문제가 없겠지만 말이다. 저자가 말했듯 우리가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회문화적 압력과 태도, 과거에 경험한 감정 인식 및 표현 방식에 좌우된다.(198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남자도 여자처럼 상처에 민감하고 섬세한 존재들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말을 보라 ”모든 남자는 남자이기 이전에 아이였다.“(215 페이지) 이 말은 가부장제는 여자만 억압하고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필연적으로 부여하는 남자다움이라는 압력으로 작용해 오히려 남자들에게 더 큰 상처로 작용하는 반면 그것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구조가 남자들을 더 힘들게 한다는 진단(218 페이지)과 공명한다. 또한 ”부성(父性) 역시 처음부터 저절로 샘솟는 것이 아니라는 말(253 페이지)과도 연결된다.
저자는 남자들을 너무 남자다움이라는 틀에 가두지 말 것을 주문한다.(222 페이지) 이는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말이다. 부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내가 집중한 부분은 아이와 한 몸이었다가 마음으로 다시금 연결되는 어머니와 달리 처음에 아버지들은 아이를 그저 낯설고 여린 존재로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이 말을 접하고 내가 생각한 것은 사람의 감정과 정서는 많은 부분 생물학적 조건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아버지(남자)들은 어머니(여자)에 비해 자녀들과 가까워지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나는 남자들도 가부장제 하에서 고통받는다는 저자의 지적에 동의한다. 그렇기에 남자들에게 반성적 자기성찰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분노조절장애를 대표적 남성적 심리질환으로, 화병을 대표적인 여성적 심리질환으로 정의한다.(277 페이지) 분노 표출에서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닌 힘의 위계 관계이다.
분노한다는 것은 자기의 경계선이 침범당했다는 신호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분노의 기능을 남용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 안의 분노를 감지하는 데에 너무 서툴다.(279 페이지) 저자는 화(火)란 마음 어딘가가 불편하고 아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282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적절한 대상에게,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강도와 방법으로 화를 표현(표출이 아닌)하는 것은 어렵다. 화내는 것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저자의 글에서 장점으로 받아들일 부분은 이해심이다. 개저씨에 대해서도 저자는 사회경제적 맥락을 짚어 이해하는 마음을 보인다. 공감한다. 저자는 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것을 주문한다. 사회가 매듭을 풀 수 없으니 개인이 결단하라는 의미이다. 아니 사회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고립에서 연결로‘라는 의미 심장한,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을 마지막으로 저자의 책은 막을 내린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면 심리학 책을 정독해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며 나도 읽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