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주인공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왕자 곁에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내주고 다리를 얻는다. 마녀가 인어에게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목소리를 앗아간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인어는 왕자와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가 사람이 되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왕자가 건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짓는 것 정도다. 사랑을 얻기 위해 인어가 잃어야 했던 것, 그것은 ‘발언할 권리’다.
--- p.6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 ‘여성혐오’는 유독 오해와 논란을 많이 빚는 단어다. 영어 ‘misoginy’의 번역어인 이 단어는 단순히 여성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성적 도구로 취급하는 것, 하나의 인격으로, 주체적인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상화하는 시각 모두를 가리킨다. “여성혐오를 하다니, 제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같은 발언은 이 단어가 어떻게 오해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 p.27
노혜경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남성이 여성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무기”라고 갈파하며 이에 앞서 행해지는 성폭력적인 언사 역시 “남성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여성 이미지를 관리하고 독점하려는 ‘말’의 억압”이라고 보았다. 그는 어떤 세계에서건 ‘여성’이라는 이유로 매우 유사하게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거의 모두라 할 만큼 많은 여성들이 생애의 어느 한순간 여성이란 것이 치욕이 되는 경험을 한다. 그 경험은 사소하게는 월경과 임신을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말뽄새로부터, 과도하게는 얻어맞고 강간당하는 경험에 이르기까지 층위도 다양하고 색채도 다양하다.”
왜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이토록 많은 여성들에게, 이렇듯 비슷비슷한 일들이,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벌어지는 것일까. 답은 매우 간단하다. 여성들에게는 ‘그렇게 해도 되기’ 때문이다. 아니, 여성들은 ‘그렇게 길을 들여야만 하는’ 존재다. --- p.중략)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은 윤리위원회 규정이 미약하고 여성소위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여성들에게는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성범죄 사건의 가해자들에게 이 사건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알려졌기 때문에, 폭로되었기 때문에, 고소를 통해 사건화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가해자들이 단골로 내놓는 변명인 ‘술먹고 한 실수’라거나 ‘딸 같아서 그랬다’ 등을 봐도 잘못에 대한 인정이나 반성의 뜻은 보이지 않는다. 그럴 의도가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다. 여성들에게는 원래 그래도 된다. 다만 알려졌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 p.34~46
손님들의 무례함이 말로만 그치는 법은 없었다. 몸에 달라붙는 짧은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다리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는가 하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주말에는 성추행도 빈번했다. 하루 일이 끝나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퇴근하는 길에는 앞을 막아서며 전화번호를 달라거나 저녁을 같이 먹자는 남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 같이 ‘너무 예뻐서 그랬다’고 말했다.
소연 씨가 교육받은 학원에서는 내레이터모델이 ‘행사의 꽃’이고 ‘행사의 얼굴’이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말을 뒤집어보면 남자들이 큰돈이 오가는 중요한 거래를 할 때 옆에서 방긋방긋 웃는 ‘꽃’이자 ‘얼굴’ 역할을 하라는 뜻이다. 행사 주최 측에서 소연 씨를 고용한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이 필요해서였다. 그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구입하고 ‘아름다움’ 이외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제한했다.
--- p.83~84
“번듯한 대학을 나오고도 취직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저처럼 고등학교 졸업장 겨우 손에 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아요. 경험상 어떤 일에 진입장벽이 낮다면 낮은 이유가 있어요. 실적을 내야 하는 영업직 같은 게 그렇죠. 자기가 한 만큼 벌어갈 수 있다고 하면 처음엔 솔깃하지만 기본급이 없으니 실적이 나쁘면 버티기 어려워요. 일을 시작하기도 쉽지만 그만두기는 더 쉽죠.” (중략)
‘아가씨 말고 남자 직원 나오라고 해.’ 이것은 그녀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어떤 회사에서건 어떤 일을 하건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이었다. 이는 소연 씨만이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하위직으로 남자 팀장의 지시를 받으며 고객 대면 업무를 하는 여성들이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기도 했다. 소연 씨가 예쁜 얼굴로 활짝 웃어야 하는 일을 할 때도, 지금처럼 목소리로만 고객을 응대하는 일을 할 때도, 고객들은 그녀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남성을 더 신뢰했다.
--- p.138~139
정은 씨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짬짬이 프리랜서로 일을 했다. 그러나 외주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회사 밖으로 나오는 외주 일감이 충분하지도 않았거니와 그 충분하지 않은 일거리를 둔 경쟁마저 치열했다. 그녀에 대한 평가도 180도 바뀌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그녀는 일밖에 모르고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독한 엄마였지만 아이의 교육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자 곧 프로의식도 없고 제 아이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엄마가 되었다. (중략)
정은 씨처럼 육아 등의 사정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줄여 ‘경단녀’라고 일컫는다. 국내 기혼여성 10명 중 2 명은 경단녀이고 이 가운데 10년 이상의 경력 단절을 경 험한 여성도 38퍼센트나 된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이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혼 여성 가운데 경단녀는 205만 명--- p.2015년 4월 기준)으로 이 는 전체 기혼여성의 21.8퍼센트에 달하는 규모다. 기혼 여성 10명 중 2명이 경단녀라는 이야기로, 이 가운데 10년 이상의 경력 단절을 경험한 여성은 38퍼센트나 된다. 30~34세의 비혼여성 고용률이 79.9퍼센트에 달하는 반면 기혼여성은 47.3퍼센트에 불과해 기혼여성의 경력 단절 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p.152~153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바보가 돼 있었어요. 핸드폰에 어플 하나 설치하는 것도 남자친구한테 물어본 다음에야 안심하고 할 수 있었죠. 어쩌다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가면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여자처럼 입었냐는 핀잔을 들었어요. 저는 그 사람한테 여자답고 순종적인 여자친구여야 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여자처럼 행동하는 건 안 되는 일이었어요. 치마를 입고 나간 날도, 술을 많이 마신 날도 남자친구한테 사과를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이 굴 수 있었는지 저도 믿기지 않네요.”
지원 씨는 남자친구가 여성에게 지배욕을 드러내는 마초였다고 회고하면서 여성 전체를 무시하고 자기를 특별한 여자로 칭찬하는 그의 화법이 지독한 여성혐오에서 나왔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저는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받은 건 사랑이 아니라 경멸이었어요. 더 화가 나는 건 그 사람은 자기가 저를 경멸했다는 인식조차 없을 거라는 사실이에요. ‘넌 다른 여자랑 달라’가 칭찬이 아니라 경멸이라는 걸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지만요.”
--- p.191~192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의 폭력이 용인되는 것은 남자주인공은 진심으로 연인을 사랑하는 진실한 남자이며, 그가 그럴 만한--- p.폭력을 사용할 만한) 성격적인 결함이 있거나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다는 식의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주인공 역시 내심으로는 남자주인공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같은 폭력적인 구애를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남성과 여성의 진심이 엇갈릴 때, 구애의 방법은 잘못되었으나 여성을 향한 애정만큼은 진심 그 자체인 남성과, 잘못된 구애방식으로 남성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게 된 여성 간의 갈등은 크다. 남성은 다시 잘해보자고 여성을 설득하고, 여성은 관계를 여기서 끝내자며 이별을 고하는데, 사귀는 동안 행해지던 데이트폭력은 신체, 더 나아가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안전한 이별’이 화두가 된 시대, ‘이별폭력’의 현장이다.
--- p.200~201
제사와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근원적으로 부계혈통의 조상을 기리는 의식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철저히 여성의 노동을 기반으로 행해진다. 여성들은 제사에 필요한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허리 굽혀 일하지만 정작 그 제사에 참여해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은 남성들이다. 왜 명절의식이 여성의 노동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으며, 남성들의 뿌리를 확인하는 이 의식에서 남성들은 철저히 ‘도와준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명절이 지나고 나서 힘들어하는 아내의 어깨를 주물러주거나 평소 갖고 싶어 하던 명품백이라도 사다 건네라는 조언들이 사방에 넘친다. 여성들의 일이 힘드니까 남성도 도와주어야 한다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주체가 될 수 없는 일의 책임을 떠맡으며 부계혈통의 적자들인 남성은 자신들의 제사를 여성의 손으로 지내게 하면서도 도움을 베푸는 시혜적인 입장을 끝내 견지한다.
--- p.251~252
어머니는 딸이 자신과는 다른 삶,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남자처럼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동시에 자신이 누리지 못한 ‘여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모순되는 이중메시지를 전달받는 딸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머니들은 “너는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아라” 하고 말하다가도 정작 다르게 살겠다는 딸의 선언 앞에서 곧잘 당황한다. “엄마처럼 살지 마”와 “그래도 네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은 오기 마련이며, 딸들에게 엄마와 다르게 산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불효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러한 어머니들의 이중 메시지에 대해 나에게 없었던 것을 딸이 가지기를 바라는 한편 자신의 인생이 딸을 통해 부정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딸에게 모순되는 기대를 갖게 되는데, 그 결과 딸은 상반된 가치 속에서 혼란에 빠지고 만다. “여자가 돼라!”는 것과 “여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즉, 딸이 전통적인 여성의 삶에서 한 걸음 나아가기를 바라면서도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모순적인 기대를 하는 것이다.
--- p.269~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