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소프트에 다닌 지 5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석사를 끝냈고, 둘째도 낳아 아이 둘을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5년 동안 아이가 아파서 재택근무 한 날도 많았고, 육아 때문에 잠을 못자서 피곤한 기색도 많이 보였다. 그러나 그 긴 시간 동안 누구도 나에게 엄마의 자질을 의심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애 키우느라 일 제대로 하겠냐는 식의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독해서 버틴 게 아니고
내가 잘나서 회사가 알아서 대우해준 게 아니고
내가 운 좋게 훌륭한 상사를 만나서 그런 게 아니고
그저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바뀌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일할 수 있었다. 성평등, 고용평등 그리고 노동자 권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 싸워주었던 사람들 덕분이다. --- p.7
그래서 우리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하다. 짧더라도 상관없다. “아, 그 말은 여성혐오 같은데요”라고 한마디 던졌을 때, 그 말을 듣거나 보는 다른 여성들, 비슷한 말을 하고 싶었던 다른 여성들과 약하게나마 네트워크가 생성된다. 페이스북에서 글을 하나 공유하면서 우리의 동창들과 동료들의 네트워크 안에 아주 작은 반反 여혐 정서의 씨줄이 하나 생긴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이 한마디를 더하면서 날줄이 생긴다. 이 다음에 또 다른 여혐 이슈가 등장하면 조금이라도 연결된 우리의 네트워크에는 다른 분위기가 조성된다. 여혐에 대해 이게 아니다, 싶었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쉽게 응원을 보낼 수 있게 되고, 여혐 발언을 맘껏 내뱉던 이는 주변의 압력을 미미하게라도 느끼며 자신을 한 번 더 검열하게 된다. --- p.34
한국의 성차별을 얘기하다 보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제대로 된 페미니즘’을 모른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런 말로 젊은 여성들을 윽박지르는 이도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글 하나라도 읽고 토론을 해라, 어느 나라의 어떤 전문가가 무슨 말을 했느냐는 식으로 따지고 든다. 앞뒤가 바뀌었다.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이 생기고 나서 그 학문을 공부한 학자들이 페미니스트가 된 게 아니라, 성차별을 인지하고 싸우다 보니 차별주의자들의 말과 행동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그것을 학문으로 정립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페미니즘’ 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우리가 매일 당하는 차별부터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훌륭한 페미니스트이다. --- p.94
“여자가 쇼핑하는 동안 지쳐서 기다리는 남자들”이란 사진 모음을 자주 본다. 참 지랄도 가지가지다. 누구든 자기가 관심 없는 거 쇼핑하는 데 따라가면 재미없긴 마찬가지다. 남자가 시계를 쇼핑하러 가든 골프용품점엘 가든 여자가 따라다니는 입장이 되면 똑같이 지겨울 거다. 여자들도 너무 재미없어서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사진 천 장도 찍혀줄 수 있다. 여자만 돈 쓰는 거 좋아하는 것처럼, 그래서 돈 안 쓰는 남자가 사치하는 여자를 관대하게 봐주는 것처럼 구라 치지 마라 제발.
이런 작은 것 가지고도 여혐이라고 하냐, 웃긴다는 사람들 있는데, 그렇다. 이런 작은 데에까지 여혐이 깔려 있는 게 현실이다. --- p.129
지금까지도 여성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선택 중 하나는 결혼이고, 출산과 육아, 경력단절과 노후까지 놓고 볼 때 그 결혼이라는 선택은 러시안 룰렛에 가깝다. 이미 선택한 이들은 자기 선택을 합리화하며 아직 선택하지 않은 이들에게 기대를 낮추라고 말한다.
나쁜 아빠 되기가 힘들다는 말은 남성에 대한 혐오가 아니다. 결혼과 남자를 최대한 끌어안아야 했던 여성들의 생존 본능의 결과다. 여성들의 가슴 아픈 역사다. --- p.178
남자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남자가 먹여 살려야 한다, 능력 없는 남자는 남자도 아니다, 남자가 먼저 작업 걸고 리드해야 한다, 남자가 더 좋아해야 한다, 여자가 밝히면 안 된다, 여자는 쉽게 보이면 안 되니까 남자한테 너무 잘 하면 안 된다, 이런 거 다 페미니즘으로 극복 가능하다.
얼마나 좋습니까. 기승전페미니즘.
---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