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프랑스 학술원이 사진술을 처음으로 공인했을 때, 겁에 질려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였던 미술과는 달리 문학은 아직 어렸던 사진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중략) 에드가 앨런 포우는 사진의 도래를 예언했고, 마크 트웨인은 재빠르게 사진을 이용하려 했다. 소로우는 사진의 영향을 심각하게 숙고했다. 카프카는 사진의 진실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심지어 코넌 도일과 버나드 쇼는 열정적인 아마추어 사진가가 되었다. 현대의 문인들 중에도 사진을 흥미로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중략) 사진과 문학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꾸준히 무언가를 속삭이는 중이다. 이것은 사진과 글쓰기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부족함들을 서로 뒤섞는다면 어떨까, ---「들어가며」중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 인생은 슈퍼마켓에서 판매되는, 비닐로 포장한 스파게티 면과 같아. 각자의 인생이 객관적 시간의 순서에 따라 가지런하게 놓여 있지. 하지만 그건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장피에르의 주장에 따르면 말이야. 실제 우리 각자의 인생은 그 포장을 뜯어 삶은 뒤, 팬 위에서 소스와 버무린 뒤의 면과 같다는 거지. 포장 상태에서는,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모두의 인생이 하나의 시간을 따라 진행되지만 실제로 우리의 인생은 소스에 버무릴 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뒤엉키는 스파게티면과 같아. 소스팬 안에서 한 가락의 스파게티면은 자신의 형태만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뿐이며, 다른 면의 형태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지. ---「그사이에」중에서
사람이 들어가지 않는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내려앉아 넓고 푸른 바다를 누리고 있다. 사람이 없는 바다에 몸을 담그고 수평선을 향해 천천히 나가 본 사람은 잠시나마 갈매기의 눈이 되어 사방을 둘 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까부터 눈치를 챈 한 마리가 주위를 낮게 맴돌더니 가까이 내려앉았다. 조금 더 상황을 보다가 가장 연한 구석부터 먹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곧 무리들이 생겨나 한 떼를 이 룰 것이 틀림없다. 나는 이대로 조금만 더 고요히 머물러 있고 싶었다. 운이 좋다면 먹히기 전에 높은 파도에 휩쓸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먼 바다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간절히 다른 것이 되고 싶었다.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다시 한 번 지구에 남고 싶었다. ---「옥타비아 비치」중에서
그는 거기에 서서 눈을 감는다. 그러면 반쯤 열린 문이 꿈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그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때때로 어둡고 지저분한 골목이 보일 때도 있다. 깨진 창문과 낡아빠진 건물 사이로 쓰레기봉투가 널려져 있다. 방수포로 싸 놓은 무언가도 보인다. 그는 그게 버려진 냉장고일 거라고 생각한다. 순간 골목에 불이 탁,하고 켜진다. 그러면 그 골목은 믿을 수 없이 아름답게 보인다. 멀리서 본 사람들은 한동안 넋을 놓고 그걸 바라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는 그게 눈속임이라는 걸 안다. 그는 어둠에 잡혀먹힌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빛에 잡혀먹히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는 자신이 지금 살아가는 삶이 나쁜 삶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마침내 천천히, 그가 눈을 뜬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는 하염없이 그것을 기다린다. ---「불행수집가」중에서
#옥상_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지난밤에는 울음 몇몇이 끝까지 오르지도 못하고 낮은 곳으로 흘러내린 듯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눈앞이 막막해지는 것은 우리의 환상인지도 몰랐으나 실제로 옥상 문을 열면 창백한 하늘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었다.
#계단_ 새어나간 것들은 아무데서나 추웠다.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 곁에 언젠가는 돌아와야 할 것이라는 불길을 쌓을 때 소문이 시작되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고 말했고 너는 앞날이 어두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동시에 큰 소리로 웃었다. 곧 돌아오는 웃음소리의 메아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그해 폐허」중에서
그래서 현대 소설의 역사란 소설이 시간을 상대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는『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가장 훌륭한 챕터 중 하나에서, 19세기 플로베르의 시간이 삶의 이상적 실체를 좀먹는 파괴의 에이전트라면, 20세기 프루스트의 '지나간 시간'은 바로 그것이 있기에 우리가 삶의 진정한 본질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시간이라고 대비한 적이 있다. 예컨대 낸 골딘의, 또 같은 챕터에서 다루어진 라이언 맥긴리(Ryan McGinley)의 어떤 사진들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은 플로베르적 시간과 프루스트적 시간의 힘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어떤 내면성의 아름다움, 아니 더 정확히는, 그 내면성을 수호하려는 시도 자체의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시도는 실패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사진은 가장 아름답게 실패하는 방법을 안다. ---「사물성, 사건성, 내면성: 사진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몇 개의 메모」중에서
이제 우리는 사진과 영화의 역량의 차이에 대한 드파르동의 견해를 다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고민은 무엇보다 그가 침묵에 매혹된 작가라는?데서 기인한다. 여기서 침묵을 굳이 소리와 관련된 무음의 상태로만?이해할 필요는 없다. 침묵이란 서로 중첩된 사건들이 이루는 평형 상태에 가까운 것이다. (즉, 우리는 침묵이란 소란을 통해 형성될 수도 있다는?점을 인정해야 한다.) 사건을 순간화하는 역량을 지니고 있는 사진을 통해 드파르동은 우리로 하여금 '공간화'된 침묵과 대면하게 만든다. 문제는 그가 침묵에 대한 관심을 영화로까지 밀고 나가는 순간 발생한다. ---「스톱-모션: 만델라의 침묵」중에서
『감상적인 여행』의 사진들은 밝고 행복한 미소로 가득한 여느 신혼여행 사진들과는 사뭇 다르다. 신부는 카메라를 향해 웃지 않는다. 신랑은 신부의 벗은 몸을 향해 마구 셔터를 누른다. 심지어 섹스 도중에도 아라키의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지독한 구경거리다. 이 사진집의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를 비판한 어느 비평가에게 거세게 항의한 것은 요코였다. 섹스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당신 부모도 섹스를 하지 않는가. 당신도 섹스로 인해 태어난 것이 아닌가. 그녀 역시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1990년 1월 27일, 요코는 자궁암으로 죽었다. 「겨울 여행」은 그 죽음의 전말을 기록하는 아라키의 사진 연작이다. 책의 도입부에서 아라키는 고양이 치로를 목욕시키는 요코를 찍는다. 페이지를 넘기며 아라키의 카메라를 따라가다 보면, 요코는 죽는다. 병원의 차가운 조명, 흰 시트, 텅 빈 골목. 죽어서 관에 누운 요코의 얼굴을 아라키는 찍는다. 장례식도 끝난다. 눈이 내린다. 아라키는 눈송이를 찍는다. 눈 내린 골목길의 치로를 찍는다. 요코는 없다. 치로와 아라키만 남았다.
---「사진집 아나토미: 아라키 노부요시, 『감상적인 여행, 겨울 여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