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8년 08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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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80쪽 | 316g | 145*225*20mm |
ISBN13 | 9791160943870 |
ISBN10 | 1160943877 |
발행일 | 2018년 08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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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80쪽 | 316g | 145*225*20mm |
ISBN13 | 9791160943870 |
ISBN10 | 1160943877 |
고래의 귀지 / 유성우 / 코스모스 사운드트랙 / 비밀의 땅 / 침묵을 듣는 시간 |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복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누구는 지식이 많고, 누구는 부유하고, 누구는 지혜롭게 살아간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물론 있다. 이럴 때 그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지식, 부유, 지혜 등이 풍요한 삶의 진정한 가치가 될까? 그러면 가난하거나 외형적으로 보기에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불행한 자들일까? 그렇지는 또 않을 듯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상태에 맞게 삶을 살아가고 그것을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신들의 기준을 세워 놓고 그것에 도달하는 것만이 행복의 문을 열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하여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그들이 원치 않는 학습, 기예, 능력을 기르도록 한다. 그것들이 자식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인지는 인식도 하지 않으면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그것이 기본적인 능력에 따라 상처가 되기도 하고, 좌절의 길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식이 자신의 길이 아니었다는 후회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책 속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애인에 관한 내용이다. 주인공 수지는 어릴 적부터 듣지를 못한다. 그래서 소통을 자기만의 언어로 한다. 엄마와 나누는 수화는 둘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주관적인 수화다. 그들은 손동작보다도 더 많은 부분의 신체를 사용해 대화를 나눈다. 여기에서는 그것을 수화라 한다. 수지는 어릴 적부터 집을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한다. 집이 하숙집이기 때문에 하숙하는 사람들, 엄마, 할머니가 그의 세상을 향한 통로다. 그래서 그녀의 수화는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집과 결부되어 지극히 주관적으로 이루어진다.
나중에 수지가 학교에 갔을 때 학교 친구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것은 엄마와 자신만의 수화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수지가 타인들과 섞이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것이 자식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수지가 학교에서 공용의 수화를 익히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오로지 성장을 하면서 수지가 자신을 지켜나가길 원한다.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에서 복도에서 손가락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여기저기서 치고 들어오는 손가락들, 그 빠르고 복잡한 대화를 다들 잘도 이해했다. 간혹 다른 친구들이 수화로 대화하는 것 보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엿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손뿐만 아니라 온전한 눈빛과 입술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눠야만 수화다. 말로 하는 언어는 수화에 비해서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한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엿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고 다정하지 않았다. 내가 나라를 세운다면 한 사람 대 한 사람만 수화로 대화하도록 법을 정하고 싶었다. 모든 대화는 은밀해 지고, 괜히 참견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싸움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p35) |
수지는 엄마의 사고방식 때문에 학교에서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학교도 그만 두게 된다. 하지만 간혹은 알아들을 수 있다. 위의 글은 수화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수화의 효용성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수화를 좋은 하나의 언어로 보고 있다. 수화를 하는 사람들은 들리지 않는 것을 조금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음을 말한다. 일반인들이 자기 좋도록 농아들에게도 언어를 일깨우려고 하는 것이지 정작 그들은 소통에 문제가 없다. 그리고 수화가 진실한 대화를 나누기엔 더없이 좋은 소통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폭력적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언어에 대한 편견을 숙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수지는 학교에서 마음의 친구를 만난다. 그는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눈을 가진 한민이다. 한민은 맹인견을 데리고 다닌다. 맹인견의 이름을 마르첼로라 칭한다. 한민이 있는 곳에는 마르첼로가 있다. 한민이 마르첼로고 마르첼로가 한민이다. 수지는 한민과 유일하게 소통하는 친구가 되고 마르첼로도 가까운 존재가 된다. 둘은 학교를 마치면 늘 같이 귀가하곤 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상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둘은 그들이 좋아하는 그들만의 음악을 하자고 한다. 곡을 만들고 가사를 지어 노래를 더빙하지만 자신들의 노래가 다 만들어지자 허무감을 느낀다. 그들이 하는 일에 자신감이 상실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수지의 귀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는 그녀의 가족들이 수술을 하려고 한다. 수술을 해서 일반인들 속에 섞여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도다. 수지는 엄청난 거부반응을 가진다. 하지만 수지가 듣지 못함으로 인해 차량에 치이는 일이 일어나고 그것은 결정적으로 인공 와우 장치 수술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병원을 들락날락하며 검사받는 게 너무 지겨운 나머지 빨리 수술 받아 이 모든 것을 끝내 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지리멸렬한 검사 기간 동안 엄마는 수술을 받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사는 게 훨씬 수월해질 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엄마가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수술 받기가 싫어졌다. 소리를 못 듣는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원래 그랬으니까. 이 상태로 이미 내게는 완전한 세상이니까. 오히려 내가 받아들이는 감각 외에 소리라는 감각이 하나 더 있고, 사람들이 그것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게 내게는 더 이상한 일이었다. 언젠가 엄마는 내게 말했다. 이 세상에는 귀가 들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못 듣는 게 아니라 안 들리는 능력이 있는 거라고. 모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특별히 안 들리는 능력이 더 있는 거니까 신비한 일이라고. 나는 축복받은 거라고. 그렇게 말했던 것을 엄마는 다 잊었나 보다.(65p) |
결국 수지는 수술을 받게 되게 소리를 기계음으로 듣게 된다. 수지는 그것이 무척이나 싫다. 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를 들음으로 인해 오히려 고통이 배가 되는 결과를 느끼고 오히려 전원을 제거하고 생활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집의 기둥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할머니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버리는 형태가 된다. 그 후 인고의 세월을 보내던 어머니도 자신의 삶을 찾아서 떠나게 되고 수지는 혼자 남는다. 할머니가 남겨준 조금의 돈으로 홀로 살아가야 하는 입장이 된다. 한민은 부모의 강권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수지를 다시 만난다.
나는 마르첼로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한민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관계가 깊어진다는 건 마음에 다양한 방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해하려다가 미워지고 용서하려다가 거부하게 된다. 수많은 머뭇거림이 마음속에 수많은 길을 낸다. 그 잔뿌리들이 마음을 단단히 잡고 있다.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듯, 나에게 애증이라는 단어를 알려 준 할머니에게 문득 감사했다.(p166) |
그들의 관계는 뿌리가 깊어진다. 서로의 마음에 진정으로 다가가게 되고 결국 그들은 수지가 기획하고 한민이 참여하는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일거리를 만든다. 창의적인 사고로 특별한 일을 준비한다. 그것은 그들이 잘 하는 ‘산책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계획을 하고 인터넷에 올려 손님을 모집하면서 한민이 마르첼로와 더불어 산책자들과 동행하면서 그들의 얘기를 듣어 준다. 그리고 그 얘기들은 녹음해 본인에게 돌려준다. 그 산책이 삶에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에게 큰 힐링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자로 참여 하게 되고, 그들은 한민에게 일정량의 돈을 준다. 그렇게 그들의 사업은 번창한다.
결과에 가서 조금의 비현실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었지만 전체적인 내용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사람은 각자가 자신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안타까운 일도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지만 마음 편하기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자가 많이 가진 자보다 낫다고 하지 않는가? 부자는 자신의 것을 누가 훔쳐갈까 밤새 고민한다고 한다. 사람은 각자의 삶의 몫이 있다. 그것을 억지로 획일화 시키려고 하면 안 된다. 주어지는 대로 자연스럽게, 타고난 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면 되는 일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편견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산책을 듣는 시간...동정이 아닌 상호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기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우리 사회는 유난히 심하다. 특수학교 설립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전형적인 님비현상의 단골메뉴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반인들이 그저 숨 쉬듯이 간단하게 여기는 것조차 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할 정도다. 대체로 혐오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여전한 가운데 그나마 일말의 따스한 눈길은 동정심 수준이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미미하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엔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실정이다. 여기 사계절 문학 대상을 수상한 작가 정은이 풀어낸 방식은 기존과는 조금 색다르게 접근한다. 청각 장애와 시각 장애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정수지, 그녀의 어린 시절은 평범한? 가정에서 생활한다. 하숙을 운영하는 엄마와 여대생 고모, 그리고 할머니. 결코 달동네 분위기는 아니다. 인심도 넉넉해 하숙생들의 신발 숫자대로 밥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엄마, 그리고 손 큰 엄마를 나무라지 않는 할머니. 자연스럽게 수지는 하숙생들이 사는 방을 누비는 ‘헐렁이 꼬마유령’으로 통할 정도로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런데 수지에겐 아픔이 있다. 아빠가 누군지, 심지어 아빠라는 단어조차 금기시하는 싱글맘 밑에서 자랄 뿐만 아니라 어릴 때 고열로 제때 치료를 받지못해 청력을 잃었다. 수지는 자신의 귀가 들리지 않는 이유를 ‘고래처럼 귀지가 많아서’(P.8)라고 한다. 그녀는 또래완 다른 삶을 살아간다. 특수학교를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다녀야 했다. 아빠를 표현하는 동심을 보면 안타깝다. 화성탐사선에 선발된 아빠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적응 훈련 중인 쌍둥이 아빠 중 하나와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 제조팀장으로 카리브해 잠수함에서 코카인을 제조중인 또 다른 아빠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눈시울이 불거진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멜로디언 시위를 벌인 결과 피아노 학원에 가지만 엄마와 원장간의 다툼으로 인해 수지는 피아노를 배울 수 없었다. 하지만 원장 아들 박한민과의 길고긴 인연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한민은 선천성 전색맹 시각장애인이다. 수지와 마찬가지로 특수학교 친구로 중학교 때 만나 친해진다. 한민은 수지보단 더 심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4살 때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등 지금까지 우울증 약을 달고 살고 자신의 운명을 27살로 못박고 있을 정도다. 맹인안내견 ‘마르첼로’가 그와 함께 한다. 수지와 한민, 그들은 유성우처럼 지낸다. 한민 주위를 맴도는 유성처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관계다. 시간이 지나 수지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내가 사랑이란 걸 한다면 그 감정을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다. 확실한 건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이 좋고 가능하면 오래 함께 있고 싶은 사람’(P.59)이 한민이다.
수지는 인공와우 수술을 통해 일반학교로 전학한다. 그러나 달팽이관 대신 설치한 임플란트 기계장치는 거추장스럽고 소음에 가까워 불편을 느낀다.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불완전한 소리의 세계로 옮겨졌지’(P.78)만 결과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회색분자가 된다. 일반인처럼 행동하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흉내낼 뿐이고 장애인과는 같이 호흡할 수도 없다.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한다.
한 동안의 방황을 거쳐 한민과 수지는 밴드 ‘코스모스 사운드 트랙’을 결성한다. 기타를 공동구매해 수지는 작사, 한민은 작곡을 하며 한 몸이 되어간다. ‘불완전한 소리의 세계일지 몰라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은 많아. 세상에 무한히 많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그걸 모두 느낄 수는 없어도 적어도 하나는 느낄 수 있을 거야. 그걸 하나씩 하나씩 찾아 나가면 되지’(P.96). 수지는 그렇게 음악과 가까워진다.
할머니 및 엄마 이야기가 펼쳐진다. 명랑 소녀 할머니가 떠났다. 그리고 집안은 풍비박살이 난다. 엄마는 가출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음향 공부하러 유학길에 올랐고, 고모 역시 해외여행. 졸지에 집마져 내놓고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신세가 된 수지. 그나마 할머니가 남긴 일부 돈으로 고시원을 거쳐 옥탑방을 얻어 생활하면서 스스로 살 길을 찾는다. 그것이 한민과 사업계획을 공유하며 만들어낸 ‘산책을 듣는 시간’이다. 신청자를 받아 산책을 함께 해주는 것.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대로 말해주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 치유에 도움이 되었다’(P.171)는 동병상련, 상생의 길을 찾은 것. 현대인들의 소외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차원에서 자신보다 더 열악한 환경의 장애인들과 삶을 공유하면서 스스로 치유됨을 느끼는 것.
‘함께 산책’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성이 있다. ‘혼밥’, ‘혼술’등 현대인의 외톨이 삶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생활에서 비롯되어 정신건강의 위협하기에 이른다.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치유의 시간을 갖는 건 의미심장하다. 청각장애에 대한 편견과 구시대적 발상을 과감히 깨뜨린 작가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신선함을 더해준다. 짧지만 결코 감동이 덜한 건 아님을 보여준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책 속 한민은 색을 구분할 수 없고, 명암만 구분할 수 있다. 그가 색면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고 해서 몇 작품을 가져와봤다. 실제 한민은 우리보다 더 많은 명암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모든 사물을 이렇게 명암으로만 구분한다면 어떨까?
답답하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색을 봤기 때문 아닐까? 한민처럼 처음부터 명암만 구분한다면, 그렇게 길들여지면 오히려 더 편할지도 모른다. 답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고정관념일수도.
내가 느낀 이 책의 주제는 '자신의 특징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이다. 수용하여 사랑할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강점이 될 수도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인생도 바뀌겠지.
앞에 소개된 작품들의 원래 모습이다. 마크 로스코는 작품에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비극, 운명, 황홀 같은 감정을 색으로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화가다. 색을 '침묵'이라 여긴 그의 섬세함을 다시 느껴보자.
<산책을 듣는 시간>의 소제목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래의 귀지' 내 귀가 들리지 않는 이유를 엄마에게 물으면 고래처럼 귀지가 많아서라고 했다. 고래는 평생 귓속에 귀지를 쌓아두는데 언젠가 내 귀지도 그동안 수집해 온 소리를 모두 쏟아 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수지는 장애를 축복으로 여기며 자란다.
'유성우' 어느날 갑자기 장애는 극복의 대상임을 강요당하고, 수지는 결국 원하지 않는 인공와우 수술을 받는다.
'코스모스 사운드트랙' 한민과의 만남을 통해 수지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자신을 찾는 과정이 그려진다.
'비밀의 땅' 수지는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침묵을 듣는 시간' 수지는 서로를 인정하고 홀로서기를 한다. 한민과 '산책을 듣는 시간'이라는 사업을 시작하고 그 과정을 담았다.
그때 그 공간에선 어떤 소리가 나고 있었을까? 나는 그대로 시간이 멈추길 기도했다. 마지막 장까지 보고 나자 그 애는 책을 덮고 말없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개를 데리고 미술실을 나갔다. 나는 따라가지 못하고 한참 동안 미술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 시간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감정들은 특정 공간에 붙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옥상에서만, 벽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중략) 그날 내가 미술실에서 느낀 감정은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낀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그 감정을 미술실이라고 이름 붙이고 나만의 수화를 하나 만들었다. -50~51쪽
수지는 감정이 어떤 장소에 산다고 생각했다. 수지 언어인 ‘옥상’은 ‘슬픔, 외로움, 고독’ 같은 감정으로, 수지가 옥상에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미술실’은 설렘으로 심장이 두근거려서 폭발할 것 같으면서도,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 같은 익숙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의미한다.
시인 한 명과 한 명의 산책가 그리고 한 마리의 산책견. 우리 셋은 시인이 된 기념으로 도시를 함께 걸어 다녔다. 셋이 함께 걸을 때 나는 늘 충만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마음 상태와는 별개로 함께 걷다 보면 우릴 동정하고 싶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한 적도 없는데 쓸데없이 도움을 주고,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욕을 퍼붓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래도 절망하지 말고 죽지 말고 살아 있으라고, 더 힘든 사람도 있으니 힘내라고 기어이 말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112쪽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스스로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고, 남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의 행복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즉, 자기들이 가장 행복하다는 거지.
사람들에게 동정받기 싫고,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수지는 헤드폰을 이용한다. 소리를 듣지 못해 난처한 상황에 처해도 해드폰을 끼고 있으면 그러려니 한다. 인공와우 수술을 한 이후에도 자주 소리를 끄고, 헤드폰을 끼고 다니면서 고요한 자신만의 시간을 만끽한다. 수지는 헤드폰이 잘 어울리고, 그날 의상에 어울리는 헤드폰을 잘 고른다. 또 마르첼로(한민이와 함께 하는 안내견?)가 수지를 좋아하고, 수지의 냄새도 좋아한다. 산책을 잘한다. 이상은 수지가 찾은 자신의 강점이다. 나는? 나도 나의 강점을 찾아봤다. 한 번 내 것이 되면 그것은 나를 좋아한다. (한번 내 것이 되면 오래 사용한다.), 누가 웃으면 같이 웃는 게 좋다. 숲길, 봄에 새싹이 피어오른 걸 보며 걷는 걸 좋아한다. 내가 아는 걸 누군가에게 들려줄 때 행복하다. 작은 소리가 잘 안 들려서 좋다. 요리를 맛있게 한다. (우리집에 온 손님은 소금이나 간장을 필수로 찾지만) 이렇게 적어보니 꽤 많다. 나도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
“수지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행동하는 방식대로 너 자신에게 행동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너 자신과 친구가 되고 나면 너 자신을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거야. 불필요한 위로를 하지 않게 되지.” -125쪽 할머니의 ‘수지에게 당부하는 말’ 유언 중 일부
할머니는 손녀에게 자기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일깨워준다. 자기 이해와 자기 존중감이 있을 때 남과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 사이에 행동을 편안하게 할 수 있어서, 어줍잖은 위로를 할 필요가 없는 사이가 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책을 읽다 사이사이 좋은 문구를 많이 인용해본다.
“세상에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은 없어. 대신에 사람마다 행복한 시기와 불행한 시기가 있는데 너희 엄마는 잠시 불행하고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는 중일 거야.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130쪽
할머니는 늘 얘기했다.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고. 모두가 옳지만, 각자의 옳음들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곳은 비어 있다고, 구멍처럼. 세상엔 그런 빈 구멍들이 여러 곳 존재하는데 그곳을 진실이라고 부르며,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법이라고 했다. - 155쪽
수지 엄마는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 가출한다. 엄마는 수지에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고, 오랫동안 유학을 준비했다며 나를 이해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수지는 엄마를 미스 블랙홀이라며 우울해 보이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그때가 엄마에게는 행복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엄마는 원래 음향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지만, 딸을 못 듣는 장애를 갖게 한 죄책감으로 꿈을 접고 살았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슬픔에 빠져 있으면서 그동안의 일들을 되돌아보고 정리했을 것이다. 그동안 수지를 위해 살았던 게 어쩌면 수지를 더 난처하게 하고, 사회성이 떨어지게 한 요인이었음을 반성했을 것이다. 여러 생각정리를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맞는지도 고민했을 것이고. 서로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기고 엄마는 엄마의 꿈을 향해 떠났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위해서 내가 나에게 제출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도 썼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이고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161쪽
나도 수지처럼 나에게 나를 소개하는 '혼잣말 이력서'를 써봐야겠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써봐야지.
나는 먼저 나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던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나를 존중하고 내 선택을 존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할 것이다. 그 시간을 존중할 거라고 다짐하면서 나는 산책을 계속했다. -1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