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을 바랐던 20대의 나와 아마존으로부터 독립한 지금의 나. 아마존은 그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시간이 지나 증류되고 남은 이 가르침들은 내가 아마존에서 썼던 수만 줄의 코드, 셀 수 없이 많은 프로젝트, 첨단기술, 미래 산업, 취업 비밀, 직장생활 잘하는 법 또는 경영법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적이고 생명력 있으며 비옥한 삶을 살기 위한 아마존의 원리들과 방식들이 정유가 되어 남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 각자의 유니크한 삶의 맥락 위에서 다르게 적용될 때 비로소 그 힘을 가진다. --- p.12
입사 첫날,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원증을 발급받는 것이었다. 파란 바탕의 플라스틱 사원증 위에 즉석에서 어정쩡하게 찍힌 내 얼굴이 프린트되어 나왔다. 사원증 테두리는 5년 차가 되면 노란색으로, 그리고 10년이 되면 붉은색으로 바뀔 거라고 했다. 당시에는 아마존이 아직 10년이 채 되지 않은 터라 붉은색 테두리 사원증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이때는 내가 장차 빨간 테두리를 달게 될 거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 색이 점차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올지도 알지 못했다. --- p.22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온 사회는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경우가 많았다. 원칙은 거창하지만 그걸 진짜 믿고 지키면 바보가 되는 사회였다. 교실에 걸려 있던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자’ 같은 급훈을 친구에게 인용하다가는 시답잖은 취급을 당할 게 뻔했다. 그런데 아마존의 원칙은 진짜였다. 이곳 사람들은 그 원칙을 정말 믿었고 그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이상하거나 유치한 행동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던 세계와 이곳 아마존의 차이를 한마디로 설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말과 행동의 거리’다. 한마디로 아마존은 말과 행동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곳, 능력과 청렴성이 우선인 곳, 주체적으로 일하는 곳, 그리고 원칙이 정말로 지켜지는 곳. 이것이 내가 받은 아마존의 첫인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낯설었던 문화는 점점 나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아마존이란 정글에 나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 p.43
아마존 사원들의 책상은 길이가 보통 책상보다 반 정도 긴 두꺼운 원목이다. 도어 데스크라 불리는 이 책상에는 베조스 회장의 유명한 일화가 담겨 있다. 사원 수가 한 자릿수였던 창업 초기에 직원들의 책상을 구입하러 갔다가 책상보다 문짝의 가격이 훨씬 싼 것을 보고 문짝과 각목을 사서 책상으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까지도 인턴부터 회장까지 아마존의 모든 사원은 길쭉한 도어 데스크를 사용한다. 회의실도 예외가 아니어서 도어 데스크를 이어서 회의실 탁자를 만들어놓았다. 회장이 “도어 데스크야말로 검소함의 상징이며, 아마존은 고객에게 중요한 곳에만 돈을 쓴다는 의미에서 도어 데스크는 매우 중요하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힐 만큼 아마존에게는 특별한 책상이다. 또한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 혁신적이고 창의적으로 문제 해결 방법을 찾은 창업주의 정신을 기리는 상징이기도 하며, 모든 사원이 지위의 높고 낮음 없이 같은 책상을 사용함으로써 사원들 간의 계급이나 거리를 없애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 pp.58~59
회사 곳곳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아마존의 사내 슬로건은 ‘Work Hard, Have Fun, Make History’이다. 베조스 회장은 이미 1997년 그가 처음 보낸 주주 서한에 아마존은 일하기 쉬운 곳이 아님을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사람은 오래, 열심히, 영리하게 일할 수 있는데 아마존에서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채용 기준은 지독히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열심히 일하는 똑똑한 인재들이야말로 아마존 성공의 일등 요건이라고 믿기 때문 이다. 이런 인재들이 함께 세상에 필요하고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창조물들을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뿌듯해하는 회사. 그런 그의 바람이 슬로건에 녹아 있다. --- pp.79~80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거꾸로 소비자로부터 시작하라(Start with the customers and work backward)’는 말이다. 손익이나 기술적 한계를 고려하기에 앞서 소비자가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결정이 더 소비자에게 도움을 줄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에 따라 회사가 할 일을 정하는 것이다. 과연 이 기능은 소비자에게 필요한가? 소비자에게 도움을 주는가? 소비자 리뷰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역시 답은 간단했다. 제품에 대한 이전 구매자들의 평가는 소비자에게 큰 도움을 준다. 부풀려진 광고보다 자신과 같은 소비자들의 평가는 한층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05
아마존으로 이직해온 개발자들은 하나같이 서비스 지향 아키텍처와 아폴로로 대변되는 아마존의 소프트웨어 개발 환경을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다른 회사와 비교해서 아마존의 장점을 물을 때마다 듣는 답변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은 개발자들이 생산과 직결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결과적으로 아마존의 성장을 가져온다. 아마존은 이 같은 작업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담당 팀을 두어 오랜 시간 개발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왔다. 그리고 마침내는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아마존 외에 누구라도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서비스들을 아마존 웹서비스를 통해 제공하고 있다. --- p.169
아마존은 TV 광고 등의 마케팅을 거의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이는 베조스 회장이 유독 향수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제품을 만들고 그럴듯한 과대 포장을 하여 고객 판매를 유도하는 것은 아마존이 딱 싫어하는 향수 냄새가 진동하는 방식이다. 이에 반해 아마존의 방식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실제로 아마존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알리기 위한 필수적인 마케팅 이외에 회사 브랜드를 위한 미디어 마케팅을 거의 하지 않는다. --- pp.191~192
다시 3월이 찾아왔다. 동료평가(peer review)가 진행되는 3월은 아마존 직원들에게 피곤한 달이다. 인사고과 시스템에 접속하니 벌써 나에게 평가를 부탁한 이들의 리스트가 떴다. 그중에는 내 상사와 팀원들은 물론이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교류했던 타 부서의 매니저와 개발자도 있었다. 몇 번 만나지 않아서 별로 쓸 말이 없는 이들을 제외하고 나서도 아직 여덟 명에 대한 평가를 써야 했다. 게다가 써야 하는 분량이 더 많은 셀프 평가까지 마치려면 이틀을 꼬박 매달려도 다 할 자신이 없었다. 시간만 많이 드는 것이 아니라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자라온 문화 탓인지 당사자 모르게 이런저런 말을 쓰는 것도 불편했고, 내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도 매우 어색했다. --- pp.223~224
아마존 복도에는 포스트잇 메모지가 수두룩하게 붙어 있는 벽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스크럼 보드라고 불리는 스크럼 프로세스의 상황판이다. 메모지들은 주로 ‘할 일(To Do)’, ‘진행 중(In Progress)’, ‘테스트 중(QA)’, ‘완료(Done)’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메모지에는 한 명의 개발자가 하루에 할 수 있는 작업 하나가 적혀 있다. 이 할 일들은 반복되는 주기의 첫날에 진행되는 스프린트 계획 회의에서 정해진 다. 이후 개발자들은 매일 아침마다 이 앞에 모여 짧게 미팅을 하는데 한 명씩 돌아가며 어제 자신이 마친 작업을 이야기하고 오늘 일할 새로운 작업 하나를 고르게 된다. 이렇게 2주 동안 ‘전력질주’를 하고 나면 마지막 금요일 오후에 관계자들 앞에서 작업물을 시연하고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지 회의함으로써 한 주기를 마무리한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새로운 스프린트가 시작되며, 이 사이클은 무한히 반복된다. --- p.235
아마존을 다니면서 힘들었던 부분은 종종 일 자체보다도 주위 사람의 시선이었다. 워낙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작은 실수에도 스스로 위축되거나 안 그래도 소수인종인데 무시라도 당하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료가 승진을 하면 마음의 동요는 더욱 커졌다. 운전을 하다가도 회의에서 한 말실수가 생각나서 혼자 고개를 가로젓기도 하고, 주위 시선이 부담스러워 근속 연수가 차면 바꿀 수 있는 사원증의 테두리를 천천히 바꾸기도 했다. 한마디로 ‘바보’ 소리 안 들으려고 무던히 신경 쓰며 산 것 같다. 물론 그럴수록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표정은 경직되었다. --- p.279
아마존을 다니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진정으로 행복하게 일하는 사람은 없었다. 직급과 직종에 상관없이 아마존에서 일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거나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보지 못했다. 오히려 삼삼오오 모이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피곤한지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당시 팀에는 빌이라는 동료가 있었다. 일도 너무 잘할 뿐더러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하는 그는 내가 보기에 정말로 천직을 찾은 사람같이 보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개인적으로 나를 찾아와서 지금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다른 길을 찾고 싶다고 털어놓았을 때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회사를 옮긴 동료들도 몇 년이 지나면 또다시 같은 사이클에 빠지는 것을 많이 보면서 단순히 회사를 옮기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다. 나의 몸과 마음은 주기적으로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당시에 개인적으로 베조스 회장을 만나게 되면 묻고 싶은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당신은 진정 행복하신가요?”라고. --- pp.290~291
뼈아프지만 내가 대체 불가능한 사원이 아님을 절감한 이상 아마존의 테두리를 벗어나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을 찾아야 했다. 이미 서른에 접어든 시점이라 무던한 노력으로 새로운 패를 만들기보다는 내가 가진 패들을 활용하여 플레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30년간 나도 뭐라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아마존의 수많은 천재들보다 잘하는 것이 분명 있을 터였다. 영어가 부족했다면 그만큼 최소한 부족한 정보로 때려 맞히는 눈치라도 늘었을 것 아닌가? --- p.300
아마존은 절대 관대한 스승이 아니었다. 아마존을 떠난 지 3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가끔 저녁이 되면 문득 내일 아마존에 출근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후유증을 겪는다. 이내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쉴 만큼 아마존은 나에게 감사한 곳이면서 참 힘들었던 곳이다. 12년이라는 기간이 스스로도 미스터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다녔다. 가끔 주위 사람들이 “아마존 떠난 것 후회하지 않아”라고 묻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는다. 실제로 나에게 아 마존 사원으로서 남아 있는 미련은 전혀 없다.
--- pp.32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