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01월 05일 |
---|---|
쪽수, 무게, 크기 | 520쪽 | 680g | 143*210*32mm |
ISBN13 | 9788932919553 |
ISBN10 | 8932919550 |
발행일 | 2020년 01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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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520쪽 | 680g | 143*210*32mm |
ISBN13 | 9788932919553 |
ISBN10 | 8932919550 |
저자의 말 프롤로그 1부 1 선을 선택하라 2 산파 3 크림색 신발 4 아파치 여인 5 정직한 검댕 6 보호막과 방패 7 주님이 마련해 주시리니 8 꼬마 창녀들 9 그 세대로서는 완벽한 10 깃털로 만든 방패 11 본능 12 물고기 눈깔 13 교회 내의 정적 14 내 발은 더 이상 땅에 닿아 있질 않아 15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16 불충한 인간, 불복하는 하늘 2부 17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 18 피와 깃털 19 태초에 20 아버지들의 합창 21 골무꽃 22 우리가 속삭인 말들과 우리가 외친 말들 23 나는 아이다호에서 왔어요 24 모험을 찾아 떠나는 기사 25 지옥 불길의 조화 26 흐르는 물을 기다리며 27 내가 여자였다면 28 피그말리온 29 졸업 3부 30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손 31 비극 그리고 광대극 32 커다란 집의 떠들썩한 여자 33 물리학의 주술 34 사물의 내용 35 태양의 서쪽 36 허우적거리는 네 개의 긴 팔 37 구원을 위한 도박 38 가족 39 버펄로 떼 지켜보기 40 교육 감사의 말 본문에 관한 저자의 말 |
타라 웨스트오버는 미국 아이다호주의 시골 마을에서 일곱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는 다섯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언니가 있다. 출생신고조차 되어있지 않던 그는 병원과 학교를 전혀 가보지 못한 채 열여섯 살이 된다. 아버지는 같은 교회의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않는 극단적 성향의 모르몬 교도로서 가족 모두에게 자신의 신앙과 사고를 강제한다. 병원조차 정부의 음모가 숨어있다고 하면서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책에서 언급하지만 조울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 아버지는 경제권과 억압을 무기로 아내와 자식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타라는 어떤 계기를 통해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우선 물리적으로,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자신을 억압하는 가족과 결별하게 된다. 결국 더 나은 교육을 받고자 집을 떠난 세 명의 자식들은 가족이 안고 있는 문제를 인지하고 아버지를 상대로 독자성을 발휘하지만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나머지 자식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책의 원제는 Educated이다. 나는 이 제목이 여러 의미―적어도 세 가지 모습의 배움―를 담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 중 하나는 어린 시절에 (주로 아버지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입된 각종의 사고 방법과 행동양식이다. 즉 본인의 의사가 개입되지 않은 단계의 배움이다. 이 시기에 어머니로부터 글이나 간단한 수학 등을 일종의 홈스쿨링으로 배우기는 하지만 그 수준은 낮아서 타라가 독립된 개체로서의 독자성을 발현하는 데에는 아주 미미한 영향만을 끼칠 뿐이다. 아버지가 강요하는 차별적이고 편협한 삶의 방식은 자식들에게 그대로 내려져 그들의 사고思考의 폭을 제한함으로써 자신의 사고의 틀 안에 자식들을 가두게 된다. 아버지는 그루밍 Grooming과 가스라이팅 Gas Lighting이 복합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식들을 제한된 범위 안에서 교육한다. 자아라고 할 만한 게 형성될 수 없는 환경에서 자식들을 양육한 셈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사고 체계와 행동양식이 형성된 타라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대학에 발을 내디딘 이후로도 긴 시간 동안 이런 사고의 틀과 행동양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의 행태는 어머니에게도 영향을 미쳐 어머니는 마치 아버지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살며 아버지를 옹호하고 자식들이 아버지의 영향 아래에 계속 자리하도록 환경을 조성한다.
또 하나는 작고 어슴푸레하지만 타라의 배움의 욕구에 불씨를 지핀 외부의 자극과 이런 자극을 받아들여 자신의 길을 찾기 시작한 자가 발전의 배움이다. 배우고 싶다고 스스로 각성하는 단계가 없었다면 그 이후의 과정을 진행하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줄탁동시?啄同時의 단계를 겪으면서 불합리한 과거를 벗어나는 자신의 기틀을 만든다. 책의 맨 처음에 ‘타일러 오빠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한 것은 그럴 기회를 준 타일러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타일러는 타라보다 먼저 집 바깥의 대학을 향해 발을 옮겼으며 타라가 대학 진학을 실현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주고 나중에는 타라가 가족들의 공격에 허물어질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타라를 지지한다.
나머지 하나는 폭넓게 사고하게 하고 주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만든 세상의 교육이다. 이 교육의 과정을 통해 타라는 과거가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자신의 현재를 억압하는 과거와 사람을 끊어내기로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던 과거와 타협하거나 그런 사고의 바탕 위에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새로운 현실과 미래를 포기할 위험을 자초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타라에게 내재된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 타라가 혼자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우고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과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결국 타라는 현재의 세계에서 익힌 교육을 자산으로 삼아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문제에서 탈피할 결심을 한다.
따라서 ‘배움의 발견’이라는 한국어 제목은 글쓴이의 의도를 일부만 밝힐 뿐이라는 한계를 느낀다. 즉 마지막 단계의 배움만을 부각시켰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아를 일깨우지 못하는 교육의 강제가 미치는 나쁜 영향은 제거해야 하며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을 깨우치고 확장함으로써 독립된 개인으로 살 수 있는 배움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게 타라가 공유하고자 했던 바가 아닐까 한다. 물론 그 배움에는 독자성만 중요시되지 않고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동료들의 가치 역시 중요함을 책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타라가 남긴 감사의 글은 그런 이들에 대한 절절한 동의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경제력이 기본이 됨을 새삼 느낀다. 아버지의 지원 중단으로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처한 타라는 정부지원금 수령을 허용한 후 자신을 옥죄던 상황을 벗어난다. 그리고는 자신의 영역에서 역량을 십분 발휘한다. 사유재산을 확보하든 국가의 공적 재산을 활용하든 결핍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음을 책의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 번도 배움에 목말랐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배우려 하는 것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환경은 그런 배움에 열려 있었다. 가족의 경제 사정이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배움을 이어나가는 일을 가로막을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이만하면 됐지 라는 자만심에 젖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마음 내킬 때 하지 같은 생각. 이제라도 배움에 집중해야겠다는 자극을 이 책으로부터 받는다.
책의 내용은 무척이나 스텍타클해서 책을 손에서 놓게 될 때에는 빨리 이 책으로 돌아와야지 하는 조바심에 부대꼈다.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흡입력 강한 글 솜씨와 내용의 긴박함, 타라의 진심이 책의 가치를 더 높였다. 벌써 올해의 책으로 추천하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배움의 발견]이라는 제목을 봤을때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배움이 아니라 자발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배워나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16살이 될때까지 엄마의 홈스쿨링 외에는 학교 교육도 받지못한 저자가 17세에 대학에 입학하고,게이츠 케임브리지 장학금 수상자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하버드 대학에서는 방문 연구원을, 다시 케임브리지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저자가 이야기하는 배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내가 단순하게 생각했던 실질적인 배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기위해 필요한 궁극의 배움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라는 정부의 공교육,의료행위 모든 것을 불신하는 모르몬교 아버지의 세상에 갇혀 살았다. 출생신고도 아홉살이 되어서야 했고, 학교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과 7남매( 오빠 다섯명과 언니, 타라)는 심각한 화상을 입어도, 교통사고를 당해도, 뇌손상을 입어도 병원에는 가지 않고 약초등 민간요법에 의지했다. 저러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라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기적처럼 그들은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것은 자신들이 선택받았다는 아버지의 신념을 더 강하게 했다. 의료행위 없이 엄마가 만든 오일등으로 살아났기에 그 약물이나 오일등이 날개 돋힌듯 팔려나가 큰 사업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는 세상의 종말을 대비한 벙크를 만들고, 비축해 둘 연료를 구입하고, 비상식량을 구입하는 등의 비용으로 들어갔다.
아주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되지만 타라는 1986년생이고 현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라서 놀라웠다. 소설이라고해도 너무 과한 설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이것이 현실이라니. 종교적인 신념이 어느정도여야지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읽어 나가다보니 아버지에 대해서는 조울증, 조현병으로 볼 수 있는 부분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한 순간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7남매중에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제들도 있었고, 집을 벗어나 공부를 하고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난 형제들도 있었다. 폐쇄적인 가정이어서일까? 가정내 폭력도 심각했다. 타라는 숀 오빠에게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폭력을 당했다. 그럴때면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을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하지 않은 건 아닐까? 어떤 말을 속삭이고 어떤 말을 외쳤던가? 결국 내가 다른 방법으로 의사 표현을 했더라면, 더 차분히 말을 했다면 오빠가 멈췄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것을 스스로 믿을 때까지 일기장에 그렇게 써내려갔다.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나도 그 사실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라는 결론은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그렇게 믿으면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p 309~310
피해자가 죄인인듯 마음을 가진다면 그 사슬을 끊어내기는 정말 어렵다. 타라도 초기에는 자신의 잘못일뿐이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녀에게뿐만 아니라 언니나 다른 오빠에게도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었던 일이었는데 부모님은 알면서도 모른척했고,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부모님께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오빠에게 살해위협을 당하기까지했다. 이런 사람들을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어릴 적 친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 그냥 내려놓아야 할 사람들이라는생각은 해본 적 없어?> 라고 말했지만타라는 가족을 버릴 수 없었기에 힘들어했다.
7남매중 대학에 간 타일러 오빠가 타라에게 대학에 가기를 권했던 것을 계기로 독학과 오빠의 도움으로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서양 예술사 시간에 [홀로코스트]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흑인 인권운동]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집에 갔을때 숀 오빠는 온통 검댕이가 묻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검둥아'라고 불렀다. 그 전에는 웃으며 들었던 그 말을 이젠 웃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단어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숀 오빠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오직 그 단어를 듣는 내 귀뿐이었다. 내 귀는 그 안에 담긴 농담을 더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내 귀에 들린 것은 시간을 관통해서 울리는 신호음이자 호소였고, 나는 거기에 점점 더 강해지는 확신으로 응답했다. 이제 다시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갈등에 내가 꼭두각시로 이용되도록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p 288
오빠의 폭력도 자신의 잘못으로 치부해버리고 그 상황을 모면하려했던 타라가 아버지가 구축해둔 강한 성 밖으로 드디어 한 발자국씩 내딛기 시작했다. 흄, 루소, 밀등의 책을 읽으면서 가족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집착했고,가족에 대한 특별한 의무와 사회 전체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개인이 어떤 균형을 찾아야하는 지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풀고 싶은 숙제는 가족이었을 것이다. 숀 오빠의 폭력에 맞서려다가 가족과 멀어져버렸지만 그들을 버릴 수도 없었고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하버드에서 공부하는 중에 찾아온 부모님은 타라에게 사탄의 포로가 되었다고 하면서 은총을 내리겠다고 한다. 타라가 아버지의 의견을 존중한다면 타라는 다시 그들만의 세상으로 돌아갈 터였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 p 471
그녀의 가족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될 숙제일 것이지만 지금은 평화롭다고 하니 다행이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나가는 것에서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 자신이 없는 것이니까. 그 속에 있었으면 절대 알지 못했을 가족의 모습, 커다란 세상의 모습들을 발견한 그녀에게 배움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배움 아닐까? 그녀는 자신이 변화했다고 느꼈던 한 순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p 507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6년간 학교에 다니지 못한 채, 기초 교육 과정을 모두 건너뛴 채로 대입자격시험을 치룬 후 브리검 영 대학에 들어간 이후 케임브리지와 하버드라는 세계 유수의 명문대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획득한 저자의 이력을 보게 된다면 언뜻 [배움의 발견]이 공부에 대한 내용이거나 천재 또는 무수한 노력으로 우뚝 선 사람의 이야기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랬다면 나로서는 이 책을 굳이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어려움을 겪고 명문대에 진학하는 스토리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시작하면 그 끝을 봐야겠다는 몰입감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저자의 흔치 않은 환경에서의 성장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열이 높은 한국에서는 공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사교육이 성행하고 있으며, 대안교육 또는 홈스쿨링과 같은 별도의 교육방법도 존재한다. 1986년 미국 아이다호에서 태어난 저자 역시 아버지의 공교율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17세 이전까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문제는 한국의 경우에는 공교육이 학생들의 역량에 따라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 근거한 불신이라면 저자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공교육을 아이들을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정부의 음모라고 생각하였기에 저자를 비롯한 7남매의 대부분은 아예 학교의 문턱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심지어 저자를 포함한 몇몇 자녀들에 대해서는 아예 출생 신고조차 하지 않았으니 저자의 그러한 환경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게 다가오게 된다. 문제는 가족들 모두 그러한 아버지의 종교적인 신념이 옳다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피해망상과 종교적 원리주의가 저자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규정해 가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도 불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Y2K(밀레니엄 버그), 종말론에 심취하여 다가올 재앙에 대비하여 헛된 준비를 하면서 그 과정에 자신의 자식들에게 육체적인 노동을 강요하는 저자의 아버지는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노동에 내몰린 아이들이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로지 일의 효율만을 강요하는 그의 모습은 현재의 미국에서 그러한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타라(저자)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그러한 아버지에게 별다른 저항없이 그대로 순응하며 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모두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전혀 깨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삶을 이루는 모든 결정들, 사람들이 함께 또는 홀로 내리는 결정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하나의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들이 한데 뭉쳐 퇴적층을 만들고 바위가 되듯이.
- p. 75 中에서 -
타라의 오빠들은 아버지를 돕다가 심각한 화상을 입거나 추락 사고를 당하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그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내의 약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는 그의 모습은 왠지 거대한 벽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타라를 비롯한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 타라의 오빠 중 한명은 타라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일마저도 벌어진다. 이쯤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타라가 깨뜨려야 할 알이라는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정작 타라는 아버지의 신념에 의한 가정의 테두리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기에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오빠는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확신이 불확실성이 드리운 어둠을 밝힐 정도로 밝게 타오르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 p. 92 中에서 -
가족에게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하고 집을 떠난 그녀의 오빠 타일러의 행동은 타라로 하여금 조금씩 자신이 극복해야 할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여전히 타라는 아버지가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머물러 있었지만, 대학 진학에 성공한 타일러의 조언을 통하여 그녀 역시 알을 깨기 위한 첫발을 내딛게 된다. 오빠처럼 홀로 공부하여 대입자격시험에 통과하여 17세의 나이로 브리검 영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이었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것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내게 허구의 이야기와 사실에 근거한 배경의 차이를 구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과 장발장 중 누가 역사적 인물이고 누가 허구의 인물인지 구분이 안 됐다. 두 사람 모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p. 242 中에서 -
비록 대학에 진학하였다고 하더라도 타라는 기초 교육을 건너뛴 상태라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무엇보다 아버지에 의하여 옳다라고 생각한 것들이 주위에서 가볍게 부정되는 것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여전히 아버지가 말한 것에 대한 믿음은 여전했다. 그녀는 아직도 알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그녀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그토록 꺼려하던 학비 보조금을 받게 되면서 그녀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교수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학비 보조금을 받기 전까지는 마치 흐릿한 렌즈를 통해 그들을 본 느낌이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꼭 필요한 것 이외의 참고 서적도 읽기 시작했다.
- p. 327 中에서 -
경제적인 부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타라에게 배움은 단순히 학업적인 성과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배움을 통하여 그녀에게 절대자로 군림했던 아버지가 조울증 내지는 조현병으로 인하여 가족들을 그토록 압박한 것이었으며 거기에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역사와 사회학, 정치학 등을 배우면서 자신이 과거에 벗어나지 못했던 알 내부의 상황에 대하여 인식하면서 그녀는 변화의 길을 걷게 된다. 여전히 아버지를 비롯한 어머니와 몇몇 형제자매는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타라를 다시금 그 세계로 되돌리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필요했던 것은 혁명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맡아 왔던 오래되고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역할을 뒤집는 것.
- p. 410 中에서 -
과거는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대단치 않은 유령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이제는 미래만이 무게를 지닐 뿐이라고 생각하는 타라는 알에서 벗어난 순간 가족을 잃었다. 물론 타라와 같이 그 알에서 벗어난 오빠들이 있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대부분의 가족은 여전히 그 세계 안에서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한 신념이 허위라는 사실을 그녀가 깨닫게 하고 또 자신을 변화시켜 삶을 탈바꿈하게 한 것을 바로 '교육'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왠지 다시 그 세계로 회귀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우리 역시 진정한 배움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의 배움은 진정 알을 깨고 나와 보다 성숙한 삶으로 나가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 알 속에서의 순응을 위한 것인지 두고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