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는 그동안 ‘극우 반공주의’와 ‘시장만능주의’에 의존하며,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바로 ‘종북좌파’나 ‘사회주의’라는 딱지를 붙여왔다. 대중은 오랫동안 그 선동에 세뇌돼 왔다. 그러니 당이 달라지려 해도 개혁이 쉽지 않다. 자기들이 ‘좌빨’이라 불러온 정책을 채택하는 것을 지지층부터 용인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공포 마케팅이 보수 개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유연성과 정책적 상상력까지 박탈해 버린 것이다. 달라지려면 일단 입에서 ‘좌빨’이라는 단어를 빼고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래야 보수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 p.31
그동안 보수에서 대안 서사 역할을 한 것은 ‘줄 · 푸 · 세(세금과 정 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 공약’이었다. 복지와 분배에서 정부 역할을 줄이고, 기업을 위해 규제를 풀며, 거기서 터져나올 불만은 법으로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방적인 친기업 정책으로 양극화에 시달리는 서민층을 사로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중산층과 서민층에서 소구력을 잃고,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TK(대구·경북) 자민련(자유민주연합) 신세가 됐다.
--- p.38
보수는 진보가 실패한 지점에서 대안 서사를 써야 한다. … 앞으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4차 산업 혁명’은 창의적 소수에겐 무한한 기회겠지만, AI(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빼앗길 대다수에게는 실존 위기로 다가올 테다. ‘기본 소득’ 역시 그런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 우리 앞에는 아직 가보지 않아 깜깜한 미래가 놓여 있다. 보수가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보수는 그 어둠을 향해 앞으로(pro) 빛을 던지는(ject) 전조등, 즉 기획(project)이 돼야 한다.
--- p.40~41
디지털 중심의 미디어 환경도 합리적 사유를 관철하는 데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말이 진보나 보수지, 어차피 인간은 다 보수적이다. 대중은 제 신념을 다시 확인케 해주는 콘텐츠를 좋아하고, 제 신념이 잘못됐다는 얘기는 듣기 싫어한다. 나 자신도 그렇다.
--- p.46
국가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양아버지를 모실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정체성을 만든 것은 ‘국부’로 불리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와 맞서 싸운 것은 이 땅의 백성들이었고, 북한의 침략에 맞서 싸운 것도 이 땅의 민초들이었다. 고된 노동과 아픈 희생으로 산업화를 이룩한 것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었고, 군부독재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것은 이 땅의 시민들이었다. 바로 그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들이 이 나라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보수가 찾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이 이름 없는 시민의 희생과 헌신과 노력 속에 숨어 있다.
--- p.58
보수는 ‘정치적 올바름’을 조롱해선 안 된다. 외려 철저히 지키려고 애써야 한다. 그래야 진보의 위선을 비판할 자격이 생긴다. 보수가 외면당한 것은 유권자들이 보수의 막말을 진보의 위선보다 더 파렴치하게 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옳지 못한 언행은 보수에 상처만 입힐 뿐이다. 선거의 패배는 생채기일 뿐이다. 치명상은 유권자 머릿속에 보수가 아예 공감 능력이 없는 혐오·기피 세력으로 새겨지는 것이다.
--- p.70
보수의 개혁이 성공하려면 합리적 보수가 극우로부터 지지층을 빼앗아 그들을 보수진영에서 주변화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합리적 보수’의 입장을 견지하는 정치적 소통의 대중적 채널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함은 구체적으로 진영의 게토에서 벗어나 보수의 주장을 중도 시각에서 개진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 채널은 이념적 경직성을 벗어 버리고 보수만이 아니라 중도는 물론 진보측 인사까지도 출연할 수 있는 정치적 유연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럴 때 보수는 자신을 혁신하는 동시에 중도와 진보를 향해 외연을 확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p.85~86
보수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적인 아버지상’이다. 중요한 점은 그 아버지가 디지털시대에도 나라를 먹여 살릴 능력이 있음을 입증 하는 것이다. 새로운 아버지는 과거 아버지와 달라야 한다. 이견자를 밖으로 내칠 게 아니라 안으로 품어야 한다. 노조를 적대시하기보다 아군으로 만들고, 외국인 노동자를 배척하기보다 우리 사회 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좋은 아버지는 말 안 듣는 자식마저 품고, 배다른 자식이라고 밖으로 내치지 않는다.
--- p.95
다수결 민주주의가 지금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를 위협한다. 특히 사회의 중도층은 이 현상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그들은 공공선의 기준이 무너지고, 개개인의 자유가 위협을 받는 상황을 그저 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다. 민주당에게 배신당한 이들은 누군가 저들의 폭주에 제동을 걸어주기를 원한다. 그 역할을 보수가 해야 한다. 보수가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치를 다시 세워 벌써 대중독재로 흐를 조짐을 드러내는 집권당의 다수결 민주주의를 견제하기를 바란다.
--- p.103
보수는 ‘태도’의 이름이다. 가치에 관해서는 ‘고루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원칙을 고수하는 태도. 그러나 정책에 관해서는 ‘인간 본성의 영원한 요구’를 그때그때 시대적 정신과 사회적 과제에 맞춰 유연하게 적용시키는 태도. 하지만 이제까지 보수는 정책에서는 경직되고, 가치에서는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럽기만 했다. 이를 뒤집어야 한다. 그래야 보수가 산다.
--- p.114
정당과 대중 사이에는 대중의 요구를 합리적 담론으로 가공하는 전문가들, 그리고 그 담론을 쉬운 말로 바꿔 대중에게 되쏘는 인플루언서들이 있어야 한다(지금은 다 망가졌지만 민주당에는 유시민, 공지영, 이외수 등 그런 역할을 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발신하는 메시지는 굳이 시키지 않아도 유튜버들이 알아서 널리 증폭해준다. 이 관계는 일방적이 아닌 쌍방향적이어서 유튜버들의 콘텐츠가 거꾸로 인플루언서와 전문가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구축할 때 비로소 보수도 제대로 된 자기 ‘메시지’를 갖게 될 것이다.
--- p.172
중요한 것은 거리의 기동전이 아니라 생활 속 진지전이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 부족한 게 아니다. 부족한 것은 그 비판의 대안이다. 대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 보수가 뒤집어쓴 부정적 이미지도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됐다. 그 이미지를 벗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 p.180
내 시각은 너의 편향을 견제해 주고, 너의 시각은 나의 편향을 바로잡아준다. 그럴 때 사회는 올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 한쪽 날개가 잘린 새는 날지 못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