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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육근상
202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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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시선

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한낮 | 모개 | 손님 | 볕 | 봄날 | 수국 | 새 떼 | 호박꽃 | 적멸 | 가을 | 메밀꽃 | 손 없는 날 | 보름벌레 | 달 강 | 북바위 | 여우 | 폭설 | 숫눈 | 바라실 미륵원지 노을집

제2부
詩 | 사월 | 앵두가 익어가네 | 봄비 | 달가락지 | 빈집 | 여수 바윗골 | 누이 | 노을 강 | 낙화 | 어떤 저녁 | 가을밤 | 강 | 첫사랑 | 낮달 | 속초 | 동백 | 망종 | 오늘만 같고 | 해남 윤씨네 골방에 누워

제3부
삭망 | 겨울밤 | 엄니 | 벚꽃 설렁탕 | 사랑가 | 콩꼬투리 | 오늘은 비 | 밥 | 살림 1 | 살림 2 | 살림 3 | 살림 4 | 살림 5 | 새벽 | 이 몸이여 홀로 살아가는구나 | 첫눈이 해끗해끗 | 세밑 | 연대기 | 혼자 사는 즐거움 | 길손 | 붉은 포도밭

해설 | 겨울의 송가에서 봄의 예감으로_방민호

저자 소개 1

1960년 대전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90년 『삶의문학』에 참여하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절창』 『만개』 『우술 필담』 『여우』 『동백』 등이 있으며, 현재 대전과학기술 대학교에서 후학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제12회 오장환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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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8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108쪽 | 198g | 124*210*9mm
ISBN13
9791160201567

책 속으로

이러한 슬픔과 회한의 ‘겨울 시집’ 속에서 시인은 어떤 암중모색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시집에 이르러 시인은 자신이 오랫동안 몰두해온 고유명의 세계에서 잠시 물러서는 듯하다. 그동안 앞선 시집들에서 시인은 ‘여기, 이렇게’ 살아가고 존재하는 고유한 개체들에 대한 목격자로서 존재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가 이 시집에 이르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이룩해놓은 진짜 구어체 이야기 시, 임우기 문학평론가의 용어를 따른다면 그 ‘소리시’의 ‘진경’이 이 메마른 인공적 세계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자연-인간’의 존재를 일깨워줄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 「방민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여우

정월은 여우 출몰 잦은 달이라서 깊게 가라앉아 있다
저녁 참지 못한 대숲이 꼬리 흔들며 언덕 넘어가자
컹컹 개 짖는 소리 담장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런 날 새벽에는 여우가 마당 한 바퀴 돌고
털갈이하듯 몸 털어 장독대 모여들기 시작하지
배가 나와 걱정인 장독은 옹기종기 숨만 쉬고 있었을지 몰라
여우는 골똘하게 새벽 기다리다
고욤나무 가지에도 신발 가지런한 댓돌에도
고리짝 두 개 서 있는 대청까지 들어와
바람을 토굴처럼 열어 세상 엿보고 있다

나는 칼바람 몰아치는 정월이면
문풍지 우는 소리 견디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럴 때마다 화진포에서 왔다는 노파가 간자미회 버무려주는 집에서
며칠이고 머물다 돌아오곤 하였다

소나무가 한쪽 팔 잃고 먼 산 바라보는 것은
밤새 여우가 길 내어 올라간 북방 그리워하는 것
나는 북방 사내인 듯 여우 지나간 길 한참 바라보다
새벽밥 툭툭 털고 일어나 마당 나서면
흰 털 보송보송한 여우가 뽀드득뽀드득 소리 내어 따라왔다

오늘처럼 솜눈이 푹푹 날리는 날이면
나는 어디를 급히 다녀와야 할 사람처럼
고욤나무 아래에서 여린 가지 바람 타는 소리로
꼬리만 남은 강변길 우두커니 바라본다
대숲도 따라나서고 싶은지
여우 지나간 길 흰 그림자 내어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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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눈

댓잎 얼어붙은 뒤란 열어 장 뜨고 김치 한 보시기 담아 따끈한 반상 내어주면 나는 오종종 달라붙어 숟가락 달그락거리다 대숲이 뱉어내는 새 떼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숫눈이 푹푹 쌓이는 날이면 버드나무 후리채 들고 콩새며 박새 까투리 사냥으로 하루 점두룩 밭둑 스미다 더깨진 빈손으로 들어오면 엄니는 하는 짓이 오째 꼭 늬 아부지냐 얼른 밥이나 먹어라 가마솥 습증기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처럼 눈발 날리고 가죽나무 사이로 새 떼 날아오르면 곁을 내어준 어깨 조붓하고 허리 굽은 엄니라는 말 떠올라 들판 뛰쳐나갈 궁리로 휘어진 소나무 가지처럼 장꽝 노려보는데 대숲도 곁을 내어준 듯 컹컹 짖더니 크게 숨 몰아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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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여 홀로 살아가는구나

나는 이제 빨랫줄에 해지고 구멍 난 셔츠로 걸려 있다
바람 들락거리기 좋았으니 풀 먹은 베옷처럼 얼어
앙상한 갈비뼈 자리 훤히 들여다보이는구나
이장하는 목사공파 7세조 유골처럼 고스란하구나
할아버지도 손 닿지 않는 등허리 쪽 가려웠으리라
친정 간 각시처럼 할머니 계시지 않아
오동나무 둥치 기대 긁적이고 있었으리라
이 몸 벗어 걸쳐두고 며칠 술잔 속 세상 떠돌다 돌아와
맨몸 다 드러낸 푸댓자루로 널브러져 술 몸살 앓다
솜눈이 푹푹 쌓일 것 같은 산초나무 바라보니
저이도 며칠 어디를 다녀왔는지 찬물 들이켜는 신음소리로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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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속 같다 무엇이든 끌어안고 있으면 한 생명 얻을 수 있겠다

겨우내 버려두었던 텃밭도 품속 따뜻했는지 연두가 기지개다 뾰족한 입술 가진 호미도 혓바닥 넓은 꽃삽도 품속 그리웠는지 입술 묻고 뗄 줄 모른다 나를 품었던 엄니도 이제 품속 돌아가려는지 양지 녘 볕을 있는 힘껏 끌어모으신다

품속 내려놓은 어미 닭이 병아리들 꽁무니 매달고 의젓하게 마당 맴돌고 있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잃어버린 이를 그리는 애가

“저 가을볕 따라 한 생애가 낯선 별자리로 갔다 평생 무명저고리 하나로 강아지풀 스미다 쓸쓸하게 떠났다”

시인은 삶에서 끌어내온 목소리를 통해 그의 생활을 그려내는데, 이번 시집은 겨울과 침잠된 슬픔의 바닥으로 걸어간다.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나는 또 어느 별에서 생명 얻을 것이니 가는 것 너무 슬퍼하지 마라”라는 어머니의 말을 전한다. 다소 담담한 발화로 시작하는 시집의 곳곳에서 시인은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기억은 “애덜 근강햐”냐 “집 안에 쥐는 웂구” 하는 말씀이며, 이 질문 앞에서 시인은 “이 밤 누가 논두렁을 태우고 있나” “매운 눈 비비며 쥐를 잡고 있나”(「적멸」 ) 라며 눈물을 삼킨다.

상실에 대한 감각은 통렬하다. 좋은 이삿날이라는 “손 없는 날 가신 엄니 아직 오시지 않고”(「손 없는 날」) 시인은 꾸역꾸역 비빈 보리밥을 밀어넣는다. 회상과 허전함 속에서 시인의 시선은 조용히 존재하는 주변의 일상과 자연에 머문다.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그 자연의 공간을 깊이 통과하며, 일상적 존재들 안에 깃든 깊은 시간성과 움직임을 되살려냈다. 그 시간의 근원은 생을 떠난 가족에 관한 깊은 그리움과 슬픔을 필두로 한 해학이다. 이 시집 속에서 서글픈 웃음을 담은 목소리는 향토적 서사와 함께 어우러지며 꽃과 풀, 계절과 풍경을 통해 진득한 정서를 드러낸다.

겨울 한복판에서 봄의 목소리를 듣다

“새벽밥 툭툭 털고 일어나 마당 나서면
흰 털 보송보송한 여우가 뽀드득뽀드득 소리 내어 따라왔다”

슬픔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휘발되거나 사그라들지 않는다. 순환과 함께하는 시간이 외로움과 슬픔의 답이 되어주지도 못한다.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애가는 계절과 닿아 서사를 만들어낸다. 시집은 “여기서부터 겨울이다”(「붉은 포도밭」)라는 간결한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 전언은 상실의 슬픔에 빠진 시인이 침잠하는 계절의 시작을 알리면서, 시집 전반에 드리운 서늘한 감각들을 형상화한다. 이 겨울은 “소나무가 한쪽 팔 잃고 먼 산 바라보는” 계절이며 이곳에서 시인은 “밤새 여우가 길 내어 올라간 북방”을 그리워한다. 시인이 구사하는 개인 방언은 시집에 담고자 하는 깊고 진한 정서와 그의 마음 속에 새겨진 그리움과 상처를 부연한다.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오디 돌아댕기기두 으설퍼 문지방 옆댕이 오그리구 앉어 문풍지 우는 소리 들으매 손장단이나 맞추구 있는디 마실 갔다 오종종 들어오던 각시 뜰팡이 엎어놓은 양재기 꽁무니바람에 굴러가다 바람벽 부딪혀 찌그러지는 소리루 한마디 되아내는디 봄은 허세여” (「살림」 2)

그는 겨울 내내 “빨랫줄에 해지고 구멍 난 셔츠”로 걸려 있는 서글픔을 노래하지만, 그에게 닥친 상실의 기억에 온기를 가진 “품속”이 스며든다. 그가 「볕」에서 발화하듯이 “품속 같다 무엇이든 끌어안고 있으면 한 생명 얻을 수 있겠다.” 계절은 변화하고 겨울이 저물어 봄이 오는 ‘이야기시’ 속에서 “텃밭도 품속 따뜻했는지 연두가 기지개”이고 “나를 품었던 엄니도 이제 품속 돌아가려는지 양지 녘 볕을 있는 힘껏 끌어모으”셨다.

육근상 시인은 『여우』를 통해 “자신들의 삶 전체를 바쳐 연연히 이어지는 자연적 삶 그 자체를 수용하고 표현”한다. 이는 시인이 네 번째로 시도하는 “자연적 존재로서의 사람의 ‘삶’과 그들이 깃들여 살아가는 터전으로서의 ‘토양’과 이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우주와 그 혼에 대한 인식과, 그 표현으로서의 사람의 말과 글, 그리고 그 집약체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인식을 가능한 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해설」) 진실한 감각으로 우직하게 밀고 나아가는 이 방언의 시들은 육근상 시인의 진솔한 속사정을 체화해 만들어낸 그의 독보적인 시세계이다. 구체적인 생활언어로 삶의 얼굴을 발굴하는 시도를 통해 시인은 가장 가까운 봄의 세계를 열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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