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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_7
1장 주체/행동과 다른 관점: 변화 _17 2장 변화 아래에서: 이행과정 _27 3장 눈은 녹는다(또는 존재를 위한 입장은 이행과정의 사유를 가로막는다) _35 4장 변용에 시작이 있는가? _49 5장 이행과정 또는 횡단·늙음은 항상 이미 시작되었다 _59 6장 반전의 모습 _71 7장 삶의 유동성(또는 어떤 것이 어떻게 이미 다른 것이 되어 있는가?) _87 8장 ‘시간’을 발명해야 했는가? _105 9장 사건의 신화 _121 10장 부족한 개념: 역사, 전략, 정치 _139 옮긴이 해제 간극과 탈합치 _159 옮긴이 후기 _185 프랑수아 줄리앙의 저작 _189 |
Fransois Jull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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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인접성에서 계속성으로 이행하기 위한 일관된 해법으로서 특정 시간에도 다음의 다른 시간에도 속하지 않는 순간, 즉 ‘시간 바깥’이라는 순간을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에 가정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 두 시간, 즉 이전과 나중을 연결하려면 시간 바깥의 ‘갑자기’를 만들어 내는 것 말고는 다른 근거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갑자기’는 그 자체로는 가능한 ‘장소’가 실제로 없는 ‘비-장소’로서 지극히 ‘괴이한’ 것이며 변화의 연속성에 난폭하게 구멍을 내는 것이다.
--- p.29 어떻게 우리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한 단락에서 다른 단락으로, 한 장章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가? 선행하는 것과 단절하고, 이어지면서 펼쳐지는 사유를 이 단절을 통해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텍스트 내에 남겨진 여백은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가 그 안에 쓰지 않지만 텍스트가 계속해서 나아가는 생산 장소이다. […] 우리가 배를 타고 있고 노를 잠깐 들어 올릴 때 이것은 이행과정의 기술이다. 우리는 더 이상 노를 젓지 않고, 노를 젓는─글 쓰는─움직임은 멈췄지만, 배는 물결에 실려 이미 진입한 쪽으로 나아간다. --- p.34 유럽 사유와 반대로 중국 사유는 언어에 의해 열린 다른 길을 따름으로써 이행과정의 비-분리, 그리고 거기서 비롯하는 고요한 변화를, 실존의 모든 과정에 접근할 관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 삶과 세계는 끊임없는 이행과정에 있지 않을까? 물론 이는 철학에서 내세우는 ‘유동성’과는 다른 것이다. --- p.38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이 어느 불거진 데에서 나타나지는 않을지라도, 지각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은 변했고 이는 태양이 구름 뒤로 지는 방식에서까지 그렇다. 우리의 여정에서 커다란 전복이 일어났지만 그 전복을 나타내는 균열 없이 그렇게 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스며듦 또는 분위기, 환경은 속성의 용어로 획정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의 존재론에 의한 포획을 거스른다. --- p.57 늙음만으로도 그리스 사유가 비틀거리는 모든 지점이 집약된다. 우선 늙음은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에 덧붙여 내게 닥칠 일이 아니라 나의 ‘본질’을 이루는 것과 분리 불가능하다. 늙음은 여러 속성들 가운데 가능한 하나의 속성이 아니고 그 속성들과 떼어 놓을 수 있는 속성도 아니다. 따라서 늙음은 술어의 양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늙음은 주지하다시피 분리 가능한 특징들이나 특질들로 분해되지 않고, 서로 묶여 있으며 이들의 총체가 노화를 이룬다(눈동자, 안색, 피부, 눈빛 등). --- pp.61~62 실효성 있는 반전은 감지 불가능하게 준비되고 고요하게 가동될 뿐이며, 동시에 이 반전은 가까스로 결실을 맺는 도중 이미 새로운 형국에 진입해 있고 새로운 배태에 흡수되어 있다. […] 부르주아지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도 않은 채 스스로 퇴색된다. 군주나 영웅의 위상을 이었던 부르주아의 위상은, 예고되었던 위대한 순간에 의해 전복되지 않았지만 우리 눈앞에서 잘게 부스러져 와해된다. 더 정확히는 이번에는 추락의 예고도 없이 햇살 아래 눈처럼 나날이 녹아 버린다. --- p.74 번영은 쇠퇴를 불러일으키며, 나아가 이미 쇠퇴를 포함하고 쇠퇴로 전환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전은 눈에 띄지 않은 채, 한 국면에서 그 대립 국면으로 아주 꾸준히 진행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단절이 없으며 ‘고요한’ 변화인 것이다. --- p.95 사건들이 실행하는 사건화는 사건들이 관심을 끌어내는 데 기여하고 이로부터 사람들이 듣고 영향을 받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마이다스의 손이 만지는 모든 것이 금이 되는 것처럼, 미디어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된다. 왜냐하면 사건은 고유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 p.133 사건은 돌출하듯 나타나지만 이처럼 사건의 이전과 이후에 흡수된다. 상류에서는 은미한 숙성으로부터 사건의 앞선 형국이 생겨난다. 하류에서는 이루어진 변화의 완만한 동화에 기인한 동요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 p.141 |
거대한 빙하의 움직임처럼,
커다란 사건은 고요한 변화에서 돌출한다 별은 갑작스럽게 해체되지 않는다─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힌 서양 철학의 빈틈 어느 날, 연인들이 헤어지고 별이 해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런 사건은 어떤 징후도 없이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사건’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연인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나 젊은 항성의 내부에서 고요하게 일어나던 핵융합이, 우리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응축된 결과 사건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저자인 프랑수아 줄리앙은 서양 사유의 전통이 이런 과정을 사고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이유를 인도유럽어 체계에서 찾는다. 필연적으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서술해야 하는 인도유럽어 체계하에서 변화를 이해하려면‘변하는 어떤 것’을 상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하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일례로 ‘늙음’을 제시한다. 우리가 ‘늙음’을 알아챌 수 있는 이유는 눈가의 주름 한 줄이나 흰머리 한 올이 아니라, 그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의 노화다. 변화가 전반에 걸쳐 일어나기에 ‘사건’이라고 인식되는 것은 결국 ‘분위기’가 변화된 결과를 인식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이해가 없다면 ‘사건’은 단절된 ‘어떤 것’으로만 이해될 수밖에 없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회색’이 있다. 두 개의 개별항 사이에 중간항을 만들어 냄으로써 변화의 ‘과정’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회색’은 또 하나의 개별항으로 그 지위를 유지한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 역시 마찬가지다. 서양 사유는 언어의 한계 속에서 존재론을 만들어 냈고, 파편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세계의 연속성과 유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이라는 개념을 가공해 내야만 했다. 사건의 연쇄가 아니라 ‘이행과정’ 그 자체인 세계 서양 사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저자는 중국의 사유를 끌어온다. 중국에서는 한 해의 흐름을 봄과 가을이라는 두 계절, 춘추에 의거하여 파악했다. 이 두 계절은 ‘지속성’의 본보기다. 지속성이란 중국 사유의 핵심적인 개념인 ‘변통’(變通)에서 ‘통’에 해당하는 성질로, ‘변’과 대립되어 나타난다. ‘변’한 것은 지속(‘통’)되고, 지속되던 것이어야 변할 수 있으므로 ‘변’과 ‘통’은 각각 서로를 요한다. 이 원리에 따라 연대기를 정하면서, 변양의 양 극단인 여름과 겨울이 아니라 이행과정을 상징하는 계절들로 연대를 파악하였다는 점은 중국 사유가 ‘시간’과 ‘존재’라는 서양 사유 전통에서 비껴간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서양과 중국의 자연관 역시 이런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인들이 자연을 운동하는 물체로 보고 변화 또한 ‘운동’에 빗대어 인식했던 것과 다르게, 중국에서는 ‘음’과 ‘양’이라는 상관 요소로 자연을 이해했다. 변통이 그러했듯 음양 역시 서로를 요하며, 운행의 과정에서 각각 서로에게 기운다. 보름에 차오른 달이 그믐까지 서서히 기우는 것처럼 말이다. 음양은 ‘존재’로서의 요소들이 아니며, 서양에서 그랬듯 단절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중국에서 세계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은 세계를 ‘이행과정’ 그 자체로 이해했다. 반면 서양에서는 세계를 ‘사건’의 연쇄로써 이해하며, 하나의 사건이 우리 눈앞에 ‘갑자기’ 돌출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사건’을 위주로 세계를 단절하여 생각한다면 사회현상이나 사건의 인과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사건’이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나, 혁명 세력을 집결하게 하고 결국 혁명을 드러나게 만드는 힘은 감지할 수 없이 상황을 전환시킨 이행과정에 있다. 사건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그것이 시대적 흐름의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며, 우리가 눈치 채기 어려운 ‘은미한 경향’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채로 사유의 수면 아래에서 진행된다. 이렇듯 고요한 변화가 가진 힘은 상류에서부터 조금씩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거대한 ‘사건’이라는 결과를 도출하는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고요한 변화를 따르는 방법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고요한 변화가 “확정하고 영속화할 수 있는 공식이나 고정 가능한 모델로 환원되지 않으며, 여러 요인의 작용이 시작된 매 변화를 거쳐 현재 진행 중인 변화를 새로운 전환으로 열어 놓는”(74~75쪽)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변화란 끊임없는 생성이며, 따라서 변화 뒤에 이어질 “변화의 변화”를 예측해야 고요한 변화를 포착할 수 있다. 『손자병법』에서 예시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고요한 변화의 전략을 살펴보자. “적이 편안한 상태로 오면 적을 피곤하게 만들기 시작하라. 배부른 채 오면 배고프게 만들기 시작하라. 결합된 채 오면 분열시키기 시작하라 […] 적이 자각하지도 못한 채 그가 저항할 능력을 상실할 때까지 가도록 그를 변화시켜라.”(151쪽) 고요한 변화의 통찰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삶과 세상의 모습 세계를 사건의 연속으로 생각할 때에는 세계가 운행되는 과정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현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9·11 사태 역시 냉전 체제와 소련의 해체가 세계화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국가 간 갈등의 힘이 긴 시간 축적되어 테러의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건’이 돌출하기까지 고요하게 이루어진 변화의 미세한 징조들을 파악하지 못하면 사회현상의 원인을 파편화하여 이해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상류에서부터 일어나는 변천에 대해 큰 경각심을 가지고 탐색해야 사회가 대면한 변화의 국면을 예측하고 그것을 가시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한국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사유, 즉 음양의 조화라는 방식으로 사고해 왔다. 그러나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서구 문물이 유입되고 서양식 교육과정에 따르게 되면서 사고방식 역시 서구화되었다. 그 결과 삶의 대부분의 영역이 사건 위주로 재단되고, 하루의 여러 부분까지도 단절된 사건의 연쇄처럼 생각된다. 자연히 한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현상도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한국 역시 ‘존재’와 ‘주체’의 관성에 종속된 서구의 관점에서 벗어나 ‘고요한 변화의 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 사회와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