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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든, 태기는 동의서의 2조 5항에 적힌 문구를 반복해서 읊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로봇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로봇식의 대꾸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감정적 호소가 통하지 않는다면 고객의 목소리는 차차 누그러들기 마련이었다.
--- p.8 딘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오른쪽 엄지손가락 끝부분을 꾹 누르더니 눈을 감았다. 창수는 차창 밖을 멀거니 바라봤다. 육상과 창공, 지하도로로 쉴 새 없이 차들이 오가는 중이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차들의 형태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도로들 틈새로 난 위험한 통로 위로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차를 살 형편이 되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눈에는. 눈곱이 끼어 있고 영양부족으로 피부에는 버짐이 피어 있었다. ‘저 중에 누군가가 내 차에 낙서했을 거야.’ 창수는 갑자기 화가 났다. 무력하게 걷고 있는 그들 중 한 사람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어졌다. --- pp.23~24 그녀가 수영복 위에 방수 재킷을 걸치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굳은 목과 어깨를 푸는 장면, 풀장 안에서 장난을 치는 어린이들을 부드럽게 타이르는 모습 같은 것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준영은 몇 개월 동안 그녀를 보면서 느꼈던 안도감, 반가움, 설렘, 편안함 같은 다채로운 감정들의 무늬가, 사탕 세트를 고르는 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떠올릴 때 느끼는 감정들의 무늬와 다르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건 분명 사랑이었다. --- p.30 유치원에서 내 별명은 ‘원숭이’였다. 팔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내 모습이 원숭이를 연상시킨 거다. 나는 그 별명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팔로 돌아다녔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면 자전거를 타는 다른 애들보다 더 빨리 달릴 수도 있었다. 애들이 신기하게 나를 쳐다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가짜 다리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나았다. --- p.37 봇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이들이 봇이 떠난 뒤에 우울증을 겪는 ‘봇로스 증후군’은 2030년대의 주요 질환 중 하나였다. ‘봇과의 분리에서 연유한 우울 증상’이라는 학명이 붙었는데, 그게 디프레시브 디스 아더 오프 디파트먼트 봇 릴레이션십이라던가, 사람들은 줄여서 그냥 ‘디봇’이라고 불렀다. 디봇에 걸리면 한동안 함묵증이 생기거나 대인기피증이 나타난다. 심한 경우 식사를 거부하거나 계속 잠만 자기도 한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1~2년씩 그런 증상을 경험한다. --- p.44 기업에서는 봇을 수리하는 것이 불필요할뿐더러 봇의 미래를 위해서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업그레이드하면 점점 더 나은 기능의 봇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괜히 봇을 수리해서 사용 기한을 연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이렇게 병에 걸렸는데도. 아이들이 이렇게 아파하는데도. 기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디봇에 걸린 아이들의 가족 연대’에서는 매달 주요 봇 제조업체인 투부사에 가서 항의 집회를 열고, 봇 수리를 추진하는 법 제정을 위해 서명을 받고, 투병 중인 아이들의 소식을 메일에 담아 전했다. --- pp.57~58 하지만 환자가 앞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나는 태우를 생각할 뿐이었다. 태우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이상 반응을 나타냈으니 바로 폐기되었을까?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 연구 대상이 되었을까? 어쩌면 그는 지구에 없을지도 모른다. 곧장 쓰레기 위성으로 보내져 다른 구시대 모델들과 함께 뒤섞여 있을지도. 그 생각이 나를 가장 괴롭혔다. 그의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간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꿈을 꾸다가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 pp.73~74 내 손가락 하나가 없어졌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양구뿐이었다. 봇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으므로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설명했지만 양구는 납득하지 못했다. 아마 양구에게 나는 단지 돌봄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양구에게 나는 가족이고 친구였다. 내게 손가락이 없다는 것은 양구에게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뜻했다. 아파, 아파. 너는 손이 아주 아파. 웬만한 일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양구가 처음으로 호들갑을 떨었을 때 나는 마음 저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진동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가슴 한가운데에서 따뜻한 무엇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 pp.83~84 연봉 협상에서 민지의 급여는 두 배로 올랐고, 월급의 300퍼센트에 달하는 성과급도 받았다. 하지만 민지는 행복하지 않았다. 요즘 회사에 자기 대신 쌍둥이 봇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하는 것도 쌍둥이 봇이었고 칭찬받는 것도 쌍둥이 봇이 대신했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쌍둥이 봇을 보냈고, 가족 모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민지의 몫이었던 행복도 전적으로 쌍둥이 봇의 차지였다. --- pp.103~104 언니는 능숙하게 다미의 쌍둥이 봇을 차곡차곡 접어서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커다란 박스를 꺼내 왔다. 그 안에는 또 다른 다미의 쌍둥이 봇이 담겨 있었다. --- p.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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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하지만 가슴 서늘한, 뜨거운 심장을 가진 소설가가 전하는 미래에서 온 편지
“누군가 사람을 빈 박스 접듯 접어놓았다.” 최정화의 신작 소설 『봇로스 리포트』가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으로 출간되었다. 최정화는 2012년 등단한 이래, 『지극히 내성적인』 『없는 사람』 『흰 도시 이야기』 『날씨 통제사』 등을 발표하며, “불안의 연금술사”(권여선),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신형철),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에 빠삭한 이야기꾼”(황현경), “세계를 휙휙 가로지르며 우리를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하성란), “진정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인물들의 장엄한 기록”(구병모), “말릴 수 없는 ‘이야기 통제사’”(정용준), “결코 낡은 것이 아닌 문장의 박력”(김미정) 같은 호평을 받아왔다. 『봇로스 리포트』는 기후변화와 환경, 노동, 인권, 감염병,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무게감 있는 주제들을 두루 다루면서도 ‘이야기’의 자유자재한 미덕을 잃지 않는 작가의 ‘이야기꾼’적 면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SF, 미스터리, 블랙코미디의 문법을 슬쩍슬쩍 묻힌, 한껏 불안을 고조시키면서도 유머를 놓치지 않는 최정화표 이야기들은 무한히 생성되고 증식될 수 있는 연작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실제로 책에 수록된 여덟 개의 이야기 중 네 편이 위픽 연재 시 발표되었고, 네 편은 이후 추가 집필되었다. 제목의 ‘리포트’에서 보듯, 애초 기록이며 보고의 형식을 띤 이 이야기들의 ‘비밀’을 읽어내고 연결해내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2030년대, 봇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다 헤어진 사람들이 ‘디봇’이라고 불리는 우울증에 걸린다. 애니멀 봇 판매원인 ‘태기’는 고장 난 반려동물 봇을 수리해달라고 호소하는 고객들의 요구에 능수능란하게 대응한다. 구형 기사 봇 딘의 운전으로 출근한 ‘창수’는 회사로부터 별안간 문전박대를 받는다. ‘준영’은 수영장 안전요원에게 사랑 고백을 하려던 날 그녀가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세 살 때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아리’는 구식 운동 봇 하루 2.0과 카포에라를 연습한다. 학습 봇 제니를 잃은 뒤 극심한 디봇에 걸린 형을 둔 ‘두호’는 환우 가족 모임이나 ‘디봇에 걸린 아이들의 가족 연대’ 활동을 하며 봇 수리 기사가 될 결심을 한다. 디봇 환자들을 상담하는 ‘서라’는 대화 봇 태우에게서 다른 누구로부터 얻지 못한 완벽한 위안을 느낀다. 간호 봇 ‘이삭’은 망가져가는 몸으로 치매 노인 양구의 돌봄 노동을 감당한다. 쌍둥이 봇을 개발한 ‘민지’는 어느 날 자신의 쌍둥이 봇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 처리됐음을 알게 된다. 폐기된 봇은 인공 쓰레기 위성에 버려지고, 고장 난 봇을 수리하는 것이 불법인 근미래. 태기, 창수, 준영, 아리, 두호, 서라, 이삭, 민지는 가깝거나 먼 사람들을 향해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 속에 ‘잔소리’를 숨겨놓았다고 밝힌다. 누구도 반기지 않지만 “가장 뜨거운 심장을 가진 구성원의 입술을 통해” 세상에 이어져온 잔소리를, 잘 눈치채지 못하게 교묘한 방법으로 숨겨놓고 싶었다고 말한다. 언뜻 경쾌하게 읽히지만 돌아서면 가슴 서늘한, 가장 뜨거운 심장을 가진 소설가가 전하는 미래에서 온 편지. 다시, 이 이야기의 ‘비밀’을 읽어내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가 50권의 책으로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즈덤하우스는 2022년 11월부터 단편소설 연재 프로젝트 ‘위클리 픽션’을 통해 오늘 한국문학의 가장 다양한 모습, 가장 새로운 이야기를 일주일에 한 편씩 소개하고 있다. 연재는 매주 수요일 위즈덤하우스 홈페이지와 뉴스레터 ‘위픽’을 통해 공개된다. 구병모 작가의 『파쇄』를 시작으로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가 독자를 찾아갈 예정이다. 위픽 시리즈는 이렇게 연재를 마친 소설들을 순차적으로 출간한다. 3월 8일 첫 5종을 시작으로, 이후 매월 둘째 수요일에 4종씩 출간하며 1년 동안 50가지 이야기 축제를 펼쳐 보일 예정이다. 이때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한데 묶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단 한 편’의 단편만으로 책을 구성하는 이례적인 시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한 편 한 편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위픽은 소재나 형식 등 그 어떤 기준과 구분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단 한 편의 이야기’라는 완결성에 주목한다. 소설가뿐만 아니라 논픽션 작가, 시인, 청소년문학 작가 등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장르와 경계를 허물며 이야기의 가능성과 재미를 확장한다. 또한 책 속에는 특별한 선물이 들어 있다. 소설 한 편 전체를 한 장의 포스터에 담은 부록 ‘한 장의 소설’이다. 한 장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이야기 한 편을 새롭게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위픽 시리즈 소개 위픽은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입니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 작은 조각이 당신의 세계를 넓혀줄 새로운 한 조각이 되기를,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당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당신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 한 조각의 문학이 되기를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