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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미란다 원칙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 천사들의 도시 배꼽의 기원 이불 개는 남자 페르마타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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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편집자입니다.
2025-03-05
이 소설집의 원고를 처음 접한 후 느낀 점은 마치 한 편 한 편의 소설이 일정한 형태로 각을 잡고 반듯하게 잘려있는 티 한 점 없이 새하얀 두부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긴 시간을 들여 인내와 정성으로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만든 따끈하고 고소한 초당두부.
그 부드럽고 오묘한 맛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의 완성도에 관한 연상이고, 이 책에 소개된 일곱 편의 작품들에서는 오히려 천연 간수로 사용된 바닷물의 염기가 스며 오래도록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듯했습니다.
각 작품은 저마다의 개성과 깊이를 지니고 있었고 그 안에는 작가의 고뇌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마치 두부가 콩의 본질을 드러내듯, 소설들은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삶의 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은 저마다 누군가 한때 간절히 열망했던 것, 또는 붙잡을 수 있었으나 끝내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상실감,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불안하고 서글픈 영혼의 숨소리가 고여 있습니다. 책을 손에 놓고 나서도 아직 그들이 내 주위를 떠돌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한우를 낳고 싶’다고 말하던 안쓰러운 사이란과 이국의 들판, 이슬 젖은 풀밭 위를 밤새도록 비틀비틀 걷고 있을 것만 같은 제임스, 교외의 낡은 여관 프런트데스크 앞에 서 있는 외로운 사람의 그림자, 어둡고 긴 일상의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오늘도 가속페달을 밟은 또 하나의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귀 기울여 들어보지 못한 내 자궁의 목소리까지도.
풍요로운 독서의 경험을 선사할 이 책,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를 여러분께 강력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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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서툴고 조심스러운 그 꽃들의 위로가 시작되었다. 마치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듯이, 뜨겁고 축축한 아이들의 손이 다투어 가며 내 등을 두드렸다.
--- p.27 ‘여우는 팔부 능선의 전망 좋은 언덕에 굴을 판다.’ 사이란은 내레이터를 따라 ‘여우’라고 발음하면서 티브이 앞에 섰다. 화면 안에서는 은색 빛이 흐르는 여우가 필사적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다. --- p.47 소를 수입해서 3년간 기르면 ‘국내산’이라고 표기할 수 있어. 하지만, 한우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들에게만 ‘한우’ 라고 할 수 있는 거야. --- p.56 내가 샤워를 오래 하는 날이면 아내는 여지없이 생리하는 것이다. 세상의 아내들은 다 생리를 자주 하는지 궁금하다. 이번 달에는 벌써 세 번이나 했으니, 네 번 못하라는 법도 없다. 한 달 내내 생리를 하는 셈이다. 언젠가 참다못한 내가 물컵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화를 냈더니, 아내는 그 컵에 다시 물을 따라주면서 조용히 말했다. 정신적인 출혈도 있는 법이에요…… 그러나 아내는 내 머리에서 일어나는 뇌출혈은 전혀 모른다. 게다가 아랫도리에서 일어나는 혈액 순환장애는 더 심각하다는 걸. --- p.111 “억울해하지 말아요, 당신이 갇힌 곳은 오만한 자들의 교도소니까요. 때가 되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물론 나도 거기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고요.” --- p.134 다시 한번 발을 구르는데, 어디선가 내 이름 소리가 들린다. 제임스으. 귀신이 내는 소리가 저럴까. ‘스으’ 하고 부르는 신호처럼 이상한 울림이 느껴지다가 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미모사 잎을 떼어내려고 엎드리는데, 다시 내 이름이 들린다. ‘스으’ 하는 여운이 길게 남는다. 내가 막 고개를 돌리는 순간, 팡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하늘거리던 미모사 잎들이 일제히 움츠러든다. --- p.155 당신에게 내 주소를 다시 말해주어야겠다. 당신이 지금처럼 배꼽에 손목을 대고 아래를 향해 주먹을 쥐어보면, 바로 그 위치에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내가 있다. 횡격막 아래의 골반 안쪽에서 당신과 더불어 39년째 살아왔다. 나는 당신의 자궁이다. --- p.163 당신은 옆을 응시하고 있는 독수리의 눈동자가, 재킷에 채워진 한 개의 단추와 정확히 일직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이 무슨 수수께끼 같아서 또다시 섬뜩해진다. 혹시 당신이 모르는 삶의 잔혹한 비밀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 p.273 당신 몸은 쑥쑥 자라난다. 뇌수를 갉기 전에 당신은 잠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 몸통을 길게 한번 꿈틀거리고는 뇌수 속으로 들어간다. 잎은 순식간에 앙상한 잎맥만 남는다. 잠시 후, 거대한 나뭇잎 한 장이 쓰러진다. --- p.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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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의 피를 갈고 싶은’ 사람들의 슬픔
‘내 몸의 피를 갈아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소심한 성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온 우유부단함 때문에, 또는 열등감과 소외 의식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피를 모두 다른 피로 갈아 넣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다. 『페르마타』에서 주인공인 치과의사는 성공을 강요하는 어머니에게서 악착같이 의사가 되길 바라는 아내의 삶으로 이동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다. 한번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지 못했던 그는 ‘공황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자신을 구하는 수단’이라는 말처럼 탈출구를 끝내 찾지 못한 사람이다. 작가는 『미란다 원칙』의 착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회복지사와 공황장애를 앓는 치과의사를 위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페르마타』를 구상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정거장을 페르마타라고 표시한다.) 한편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에 등장하는 사이란은 태국에서 이주해 한국 남자와 살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어렵사리 회복하면서 서툰 한국말로 ‘한우를 낳고 싶다’는 고백을 한다. 소를 수입해서 3년간 기르면 ‘국내산’이라고 표기할 수 있지만 진짜 한우는 본래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란 소를 말한다는 남편의 설명을 듣고 그녀가 내린 결론이다. 진짜가 되고 싶은 열망, 이주민이 아닌 정착민으로서 온전히 그들과 동등해지고 싶은 꿈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불친절한 세상에 대한 화답 저자는 2010년 10월 첫 소설집을 내면서 ‘나를 둘러싼 불친절한 세상에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만약 세상이 내 앞에서 언제나 친절했다면, 소설 쓰기를 계속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러한 환경이 의식을 확장하고 세계관을 갖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밝힌다. 이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들은 모두 저자가 소설을 쓰기 위해 직접 그 공간을 방문하고 문제의식에 치열하게 천착한 끝에 얻어낸 결실이다. 『천사들의 도시』 주인공인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던 필리핀의 앙헬레스 시티. 그곳에서 본 이민자들의 모습이 소설로 이어졌고, 오산시청에서 주최하는 다문화가정의 도우미로 일하며 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열대야의 무지개』로 피어났다. 여성과 자궁에 대해 공부하여 『배꼽의 기원』을 창작했으며 마감 날짜에 쫓겨 소설의 배경이 된 모텔방 506호에 입실해 피 말리는 자기와의 싸움 끝에 쓴 소설이 『이불 개는 남자』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빠져 초현실적인 세계의 풍경 속에서 그리듯 쓴 소설이 『나는, 자정에 결혼했다』이다. 저자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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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의 첫 소설집 《자정의 결혼식》은 무엇보다 살아 있는 몸의 신호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은 어떤 종류의 텍스트를 읽거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본질적으로 ‘체감’에 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문득 실감하게 만든다. 몸이라는 실존적 조건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하며, 인물들의 다양한 감각적 경험들을 유독 민감하게 주시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불현듯 저 독특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기이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 변지연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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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수 소설은 생의 비밀스런 근원을 탐색하는 지적 퍼즐과 같다. 그 퍼즐은 작가가 열정을 바쳐 더듬어 가는 먼 나라 낯선 도시의 사회적 지형이며, 내적으로는 치열함과 통찰력으로 천착하고 파헤치는 생명의 기원, 사랑의 번민, 관계의 단절, 야만적 폭력에 저항하는 절박한 외침이 담긴 삶의 오묘하고도 격정적인 지도로서, 독자를 사로잡고 긴장하게 한다. 머리로 쓰고, 가슴으로 상상하며, 발로 사는 작가, 한지수의 첫 문장은 늘 미지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작된다. “여우는 팔 부 능선의 전망 좋은 언덕에 굴을 판다.” - 서영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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