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부 푸석푸석한 나라의 푸수수한 국경을 건너뛰다가
라 볼바시옹la volvation·12 나의 고독은,·13 타락을 타락시킨 고슴도치의 도취·16 검은 발등에 솟은 눈물·17 알락꼬리마도요의 갓차Gotcha, 득템력·20 그리하여 숲이 숨어서 숲길 감추었다·22 니체의 별·25 프레베르 벤치 위의 모자·26 아낭케anatkh, 밤의 피크닉상자를 열고·28 사랑이라는 글자와 고양이라는 글자를 바꿔 써보자·36 미미끄 지뢰밭 아상블라주mimique assemblage·38 썸머타임 프리패스Summertime free pass·41 마라케시의 구둣방·44 2부 죽어가는 이 왈츠를 받아줘! 비 오는 날의 우리 Suna·48 짐 자무쉬에게 묻고 싶지 않은 질문·49 늑대별이 웃다·52 꾸꾸루 꾸꾸~, 그라나다의 비둘기·54 장미 스물셋과 데이트·58 누낭淚囊의 뱃길·60 나의 시작노트에 적힌 압운은 이렇게·62 산세리프sans serif·65 비익秘匿의 틈·68 수요일의 도둑 ― 뮤지컬 풍으로·69 말테를 위한 수기·72 끄노Queneau에게 어제 쓴 시·74 오늘밤은 리스본·76 3부 키케로가 말한 것을 페트라르카가 받아 적듯이 고독 강점기·80 롱고롱고 몰디브를 마시면,·82 후마니타스의 포도주·84 권총 차고 죽는 이데올로기의 고양이와 꼼짝 안 하는 에셔의 도마뱀·87 대낮의 횃불 하나, - 시인 안수환의 불 먹인 화살과 촌철살인·90 함마슐트에 기록될 릴리함메르라는 시·92 불쑥 솟아오르는 still-life, 정물화·94 오무아무아Oumuamua의 꼬리에 편승해보면·96 몽곤고나무와 ‘!쿵 부시맨족!Kung Bushmen’·97 올리브 동산의 7월 칠석七夕·101 불가사의의 불가리아 여인·104 사진 한 장의 포에트리·107 4부 아름답게 누워서 침이나 뱉고 싶네 맑은 날 꽃들의 한계를 넘어·110 플라뇌르fl?neur 플라뇌르 빠리의 플라뇌르·112 밤의 난간에서 수잔 발라동·115 과월호는 과월호·118 갈대밭의 판신Pan神·119 어섯이 어섯눈을 뜨다·122 베로니카의 지나친 눈물·123 어느 날의 막다른 충동衝動·126 자고새를 위한 자고새·128 토마스 S, 엘리엇을 추억함·130 경외敬畏 경외주의자aweist들·134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136 나의 시집·138 해설 | 고봉준_시적 헤테로토피아·142 |
|
아가씨,
까만 눈동자의 깊은 밤 아가씨 숱 많은 머리카락 그 하나만 뽑아서 나한테 선물로 줘요 그 영혼의 그 밤길 거기 바람의 서쪽 달의 동쪽 100만 분의 1초 만이라도 그 발길 머물러 초승달 샤방샤방 쉬었다 갈 수 있도록 --- 「라 볼바시옹la volvation」중에서 나는 주전자처럼 고독하다 나는, 독 짓는 늙은이처럼 고독하다 나는 모기 눈알처럼 고독하다 나는 난, 자동차 뒷바퀴처럼 고독하다 나는 왜 이렇게 고독한가 나는 시를 쓸 때만 고독하다 나는 나 시를 쓰고 나서도 고독하다 이 고독은 어디서 값비싸게 오는가 그걸 몰라서 근본을 알 수가 없어서 고독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 고독하다 고독이 왜 값비싼 것인지 그런 걸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 고독하다 시인은 나에게 ‘나는 터널처럼 고독孤獨하다’고 엄살을 피웠다 거짓말! 터널을 찾아내 터널 깊숙이 들어가 터널에게 물어보니 터널은 고독과 친한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터널은 달랐을까 산티에고의 고독은 산티에고를 위해 유별난 것이었겠지 나는 정말이지 주전자처럼 고독하다 주전자 속에 끓고 있는 돌멩이처럼 고독하다 ‘고’는 덩어리질 고固 피고름 고膏와 가깝지 않아도 독버섯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독’을 단박에 삭히려고 독 짓는 이의 달항아리 달항아리 속에 들어찬 달빛 못지않게 고독하다 --- 「나의 고독은,」중에서 색소폰과 섹스 수레바퀴와 수레국화의 이질적인 결속 속수와 무책의 끈질긴 관계는 어째서 속수무책 빌붙어 끈적거릴까 이른바 화전충화花田衝火 꽃밭에 꽃불 지피는 화전놀이가 아니고는 빗금 그어진 재채기일까 타락을 타락시켜 터럭의 털끝까지 털어내기 위한 고슴도치 영혼의 깃털 한 묶음 --- 「타락을 타락시킨 고슴도치의 도취」중에서 검은 발등에서 깨끗한 눈물에 이르기까지 “눈물은 인간이 만든 가장 작은 바다이다”* 라는 말이 귓가에 닿기도 전에 재빨리 나의 입술을 겁탈하는 해일이 문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백장미 그룹Die Weiβe Rose*을 아시는지 우아한 침묵, 이어야 한다고 돌무더기에 새기듯 꾹꾹 눌러쓴 문맥을 나는 왜 신경질 부리듯 북 찢어버리고 애먼 책상다리 들먹였던가 어물쩍, 어설픈 결심이 뭉게구름처럼 흩어지고 황량한 불모지에 비바람 몰아친 날들 어둠의 모서리를 강타하는 파도가 다시 거세게 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답적인 저녁이 슬금슬금 불안정한 행복의 뒷주머니를 챙길 때 나는 배고팠다 폭풍에 둥지를 잃은 메추라기처럼 움츠러든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홉뜨고 결심한 듯 일어선다 새로운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을 찾아 머나먼 우주로 길 떠나는 개척자처럼 그토록 불온하고도 거칠었던 순정, 순결하였던 사랑 하나 끝까지 사수하기 위해 온전히 섬 하나를 가슴에 품고 저기 저 눈물은 뜨거운 배꼽을 건너야 한다 마치 밀항자처럼 백장미 꽃잎에 새긴 명문장 하나하나가 해안을 적시고 검은 발등 엄숙히 접수하였듯이 *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의 시, 「나의 이솝」 중에서 * 뮌헨대학 학생과 교수가 결성한 순결하고 거룩한 구국단체. --- 「검은 발등에 솟은 눈물」중에서 저도요, 라는 이름의 도요새에게는 애초부터 반공일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저도요,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나그네새에게 요즈음 남의 둥지에 슬쩍 탁란할 수 있는 공휴일이라는 게 생겼다 뭔 얘기야, 그 건? 알락꼬리마도요는 그런 걸 알고 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무관심한 척 Gotcha power, 득템력! 저도요, 라는 도요새는 어쨌든 날개를 자주 접고 언제든 쉬고 싶을 때 쉬지만 저도요, 라고 나서게 될 땐 알락꼬리마도요가 억세게 빠른 도움닫기를 부추기는 바람에 황망한 토요일 밤을 건너 일요일의 야멸찬 아침햇살 퍼지는 곳까지 심장 뛰게 된다 알락꼬리마도요가 황금빛 날개 휘젓는 저기 먼 곳 * 갓차Gotcha : got you의 연음 축약형. 너 딱 걸렸어! --- 「알락꼬리마도요의 갓차Gotcha*, 득템력」중에서 |
|
시적 헤테로토피아 - 김영찬의 시세계
고봉준(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시집 『오늘밤은 리스본』은 김영찬 시인의 문학적 혈통증명서이다. 이 책에는 현기증이 날 만큼 많은 시인, 소설가, 예술가, 철학자의 이름이 등장한다. 뽈 베를렌, 아르뛰르 랭보, 니체, 자끄 프레베르, 테라야마 슈우시, 베토벤, 짐 자무쉬, 월레스 스티븐슨,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파울 첼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보르헤스, 레이먼드 끄노……. 이들은 시인 랭보가 ‘나쁜 혈통’이라고 말한 태생적 혈통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선택된 예술적 혈통, 즉 시인의 선조(先祖)들이다. 김영찬은 이들 예술적 조상의 이름과 그들의 언표를 다양한 형태로 전유하여 궁극적으로 텍스트에서 주체나 중심의 흔적을 지우는 방식의 시 쓰기를 수행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막심 로베르(Maxime Rovere)는 스피노자에 관한 자신의 저작에 ‘스피노자와 그의 친구들’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을 붙였다. 한 철학자의 삶과 철학을 조망한 책 제목에 ‘친구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스피노자의 사상이 한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의 결과물이라는 의미이다. 김영찬의 이 시집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는 시인의 시 쓰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며, 이런 점에서 시인의 친구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요컨대 김영찬의 시는 주체/중심 없는 상태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뒤엉킨 상태에서 발화된 기표들의 직조물, 즉 퀼트(quilt) 내지 헤테로토피아적(Heterotopia)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셸 푸코의 말처럼 헤테로토피아가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제기라면 김영찬의 시집은 다른 모든 시(詩)에 대한 이의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주체나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시시각각 분열하는 언술이, 그 결과에 따라 파편처럼 흩뿌려져 있는 언표가 있을 따름이다. 김영찬의 시에는 우리가 시(詩)라는 말에서 응당 기대하는 것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그의 시에는 심리적 상처나 그것을 위로하는 목소리가 없다. 그에게 시는 독자를 위로하거나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언어는 감동이나 위로보다는 전쟁, 특히 언어의 층위에서 펼쳐지는 전투에 가깝다.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라는 마야코프스키의 말처럼 김영찬의 시는 대중의 기호나 취향을 의도적으로 배반하는 듯하다. 또한 그의 시에는 독자들의 관음적 시선을 만족시킬 내적 고백이나 가족사에 대한 정보 같은 것이 없다. 그의 시는 개인적 상처나 결핍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으므로, 결핍보다는 이미-항상 흘러넘치는 욕망의 연쇄적인 질주에서 출발하므로, 그것들을 승화시키는 카타르시스 장치를 갖고 있지 않다. 요컨대 그의 시는 김소월, 정지용, 서정주, 백석, 기형도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한국시의 계보에 대한 부채(負債)가 없다. 대신 그는 유럽적인 것, 혹은 그것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비(非)한국적인 것에 친연성을 느낀다. 벨기에 태생의 프랑스 시인 앙리 미쇼는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 아니라 남아메리카와 아시아 같은 비(非)서구 문화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말을 빌려 “좋은 책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앙리 미쇼의 비(非)서구, 질 들뢰즈의 외국어는 위대한 예술이 예술가가 속한 문화적 전통이나 계보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배반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김영찬의 시 역시 매우 적극적으로, 분명한 방식으로 한국시의 전통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오히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와의 친연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하나는 김영찬의 언어가 깊이(심층)가 아니라 표면을 중심으로 기능한다는 것, 따라서 ‘의미’로 낙착되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작 방식이 무의식적 자동 작용, 즉 자동기술법(Automatism)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초현실주의적 자동기술이 온전히 무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앙리 미쇼는 “자동기술은 무절제다.”라고 주장했으나 시작(詩作)이 쓰기와 선별/퇴고의 이중적 절차로 이루어지는 한 의식의 개입은 필연적이다. 이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간극(間隙)으로 인해 우리는 잠시나마 의식 저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날 이티비티 티니위니 비터브 타임itty bitty teenie weenie bit of time 흥진이반興盡而反이면 뭘 어떻고 뜬금없는 스웩swag 스웨기swaggie 스웨거swagger들의 실력 없는 거들먹거림 밤을 모르는 부랑아들은 아무도 모르는 밤에 아무것도 모르지 단지 밤을 좋아해야 할 이유를 묵살하고 아, 아낭케ANATKH 밤에 밤의 블랙박스를 발로 걷어차며 삐뚤삐뚤 걷는다 걷다가 허풍쟁이와 만나면 밤길에 최대한의 허장성세 가령 자투리 시간까지 빈 술병 비워내는 간다르바gandharva, 건달바乾達婆들의 핑계 좋은 일탈 살찐 엉덩이만 흔든다 이런 때 나는 각촉부시刻燭賦詩, 모든 걸 차치하고 사타구니에 불길 솟는 기분 마이아스트라Maiastra에 황금빛 날개를 접은 ‘금의 새’처럼 웅크리고 포란抱卵하는 시를 쓴다 교령회交靈會의 스마우그Smaug the Golden들처럼 SF무대를 단박에 장악하는 시 그래, 세상을 제멋대로 내 맘대로 재구성해야 직성이 풀리지 아마도, 아마 느그들 뜻대로 그렇게 되진 않겠지 그렇게는 안 될 거야, 아마도 아마 느그들 멋대로 홀대받는 외지인 포가니Pogany는 루마니아 태생 그녀의 촌스럽게 쪽진 머리 시뇽chignon의 정결함, 절박한 상황에도 두 손 모은 숭고미 나는 왜 그토록 염결한 초절주의에 둔감할까 -조타수 없는 방향타 - 「아낭케anatkh, 밤의 피크닉상자를 열고」 부분 이 시는 김영찬의 시적 지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앞에서 우리는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간극(間隙)에 관해 이야기했다. 작품이 시인의 퇴고를 거쳐 발표되는 한 자동기술에는 일정한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가 처음 창작되었을 당시의 원형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작품 또한 무의식과 의식이 뒤섞인 상태라고 추론할 수는 있다. 먼저 이 시의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밤’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낮의 건축물인 “최초의 밤”과 모든 것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또 다른 밤”이 그것들이다. 블랑쇼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또 다른 밤”은 초현실주의가 주목했던 ‘무의식’의 영역과 유사하다. 그것이 의식과 이성의 바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에서 ‘밤’은 낮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그리하여 낮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으로서의 밤이 아니라 ‘낮’과 완전히 다른 질서로 작동하는 세계이다. 블랑쇼는 그러한 ‘밤’에 죽음의 이미지를 부여했는데, 여기에서 시인은 그것에 ‘피크닉상자’라는 기호로 표상되듯이 유희/놀이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요컨대 시인에게 ‘밤-무의식’의 세계는 피크닉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 시의 언표들은 피크닉상자에서 끄집어낸 것들인 셈이다. ‘피크닉’은 유희의 세계이다. 그것은 이성/논리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시의 언표들이 이성/논리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시에서 이성/논리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 또는 유희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이 시에서 언어/기호가 논리적 연관성, 나아가 의미의 층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구체적 증거가 바로 “이티비티 티니위니 비터브 타임itty bitty teenie weenie bit of time”라는 진술이다. 이것은 읽기에 따라 음악적 효과를 연출할 수는 있어도 ‘의미’의 층위에서 접근할 수 있는 진술이 아니다. 그러니까 독자는 이 구절을 읽고 ‘이게 무슨 뜻이야?’라고 질문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배치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단어들에는 어떠한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이것은 (언어) 유희일 뿐이다. “스웩swag/스웨기swaggie/스웨거swagger들의 실력 없는 거들먹거림”이라는 진술도 마찬가지이다. 독자들은 ‘스웩swag’이 젊은 세대. 특히 레퍼들이 자신의 스타일과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흔히 ‘허세’나 ‘자유분방함’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 평론가들에 따르면 이 단어는 원래 ‘약탈품’이나 ‘전리품’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이 시에서 ‘스웩swag’은 이러한 ‘의미’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스웩swag’이 무엇을 지시/의미하는가를 따지는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스웩swag/스웨기swaggie/스웨거swagger”라는 표현을 잇달아 발음할 때 만들어지는 음악적 성질, 즉 리듬감이다. 한편 이 시에 등장한 진술들, 가령 “밤의 블랙박스를 발로 걷어차며 삐뚤삐뚤 걷는다”, “간다르바gandharva,/건달바乾達婆들의 핑계 좋은 일탈”, “그래, 세상을 제멋대로 내 맘대로 재구성해야 직성이 풀리지” 등은 모두 질서를 벗어나는 일탈의 해방감을 겨냥하고 있다. 이처럼 김영찬의 시는 “삐뚤빼뚤”과 “일탈”과 “제멋대로 내 맘대로”를 지향한다. “간다르바gandharva,/건달바乾達婆”라는 구절 역시 건달(乾達)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보다는 그것들을 연속적으로 발음했을 때 느껴지는 음성적·음악적 느낌이 훨씬 본질적인 것이다. 시인의 말 자이나 교도들은 밤에 잠행이 아니어도 빗자루로 길을 쓸며 장도에 오른다. 빗자루 대신 밤의 피크닉상자를 든 나는 ‘아낭케’ 깊은 밤의 테라스에 외등을 켜둔 채 어둠을 건넌다. *옥탑방 라그랑쥬에서 `24 여름 enchanted ㅊ° |
|
김영찬의 시는 주체/중심이 없는 다양한 목소리가 뒤엉킨 상태에서 발화된 기표들의 직조물, 즉 퀼트quilt 내지 헤테로토피아적Heterotopia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셸 푸코의 말처럼 헤테로토피아가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제기라면 김영찬의 시집은 다른 모든 시詩에 대한 이의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주체나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시시각각 분열하는 언술이, 그 결과에 따라 파편처럼 흩뿌려져 있는 언표가 있을 따름이다. 그에게 시는 독자를 위로하거나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언어는 감동이나 위로보다는 전쟁, 특히 언어의 층위에서 펼쳐지는 전투에 가깝다.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라는 마야코프스키의 말처럼 김영찬의 시는 대중의 기호나 취향을 의도적으로 배반하는 듯하다. - 고봉준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
|
내가 좋아하는 시는 의미가 사라지는 시이다. 시인에 의해 의미가 종말을 맞는 시다. 한 시대가 수확한 언어의 의미를 뽑아내고 새로운 종을 심는 문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심은 누런 옥수수밭을 영원히 걸어야 한다. 이를 갈아엎기 위해 김영찬은 언어의 의미를 타락시키는 시인이다. 그 후에 새로운 종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김영찬 시인에게 타락은 몰락이 아니라 보편과 윤리의 그늘에 덮인 예술가의 평화 조건이다. “타락을 타락시키는 언어” 나는 그 점에 매혹 된다.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시의 언어라는 점에서 김영찬 시인과 친연성이 짙다. ? - 여성민 (시인)
|